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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열녀(烈女)가 꼭 가문의 영광이었을까?

열녀, 부부 정려문 이야기

충남 예산군 삽교읍 상하리 산 82-9

2024.04.19(금) 14:08:23 | 유정민 (이메일주소:mm041@daum.net
               	mm041@daum.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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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려 (출처 : 네이버 '한국 여성사 편지'중)

<정려(旌閭)는 충신·효자·열녀 등이 살던 동네에 붉은 칠을 한 정문(旌門)을 마을 입구나 집 문 앞에 세워 표창하던 풍습을 말한다.>

그 옛날, 나라에서 정려를 하여 열녀문이 세워지면, 가문의 영광이자 온 동네가 축제 분위기였다고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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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녀 철원임씨 정려문


임진왜란(1592년)과 병자호란(1636)의 오랜 전쟁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당시(조선시대) 나라에 충성, 부모에 효도, 남편에게 절개를 지키는 것이 유학(성리학)의 바탕이기에 충신, 효자, 열녀를 찾아내어 상을 주면 나라가 바로 서며 튼튼해진다고 믿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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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녀 철원임씨 정려문


열녀문이 많이 세워진 것도 이 시기라 하는데, 조선 초기에는 남편이 죽은 후 재혼을 하지 않아도 열녀로 인정받았지만, 조선 후기에는 재혼하지 않은 것만으로는 열녀로 인정을 받기 힘들었다고 한다.
결국 열녀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남편이 죽으면 따라 죽어야 하는 상황까지 발생했는데, 왜 그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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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구


조선 후기에 양반은 대대로 높은 벼슬을 유지하는 양반, 낮은 관리직으로 겨우 체면만 유지한 양반, 몇 대째 벼슬을 못해서 평민보다 못한 양반과 직접 농사를 지어야 살고, 빈털터리에 가까운 양반 등 여러 층으로 나누어졌다.
그런데, 이런 몰락한 양반 집안에서 며느리나 딸이 죽어 열녀가 나온다면 양반으로서 과거의 영화를 찾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고 하니, 이런 연유로 집안에서는 남편이 죽으면 홀로 남은 여인에게 죽음을 강요하는 인륜을 저버리는 불상사가 종종 발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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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비꽃 (꽃말: 나를 생각해 주오!)


양반만이 아니라 천민이 열녀로 인정되면 신분이 상승하고, 세금과 부역도 면제해 주니 가히 열녀문 만들기 열풍이 불었을만하지 않은가~!
하지만, 이면에 이런 희생을 강요당하며 이름 석자 제대로 남기지 못하였던 여인들의 삶은 과연 어떠했을까?

<상기 글은 숭고한 열녀들의 열행(烈行)을 폄훼하려고 쓴 글이 아닙니다.>


▷열녀 철원임씨 정려문 (충남 예산군 삽교읍 상하리 산 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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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녀 철원임씨 열녀문(정려문)


예산군 삽교읍 상하리에는 김재양의 처 철원임씨의 열행을 기리기 위해 1796년(정조 20) 명정을 받아 세워진 열녀 철원임씨 열녀문을 마을 입구 도로변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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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녀 철원임씨 정려 중수기적비


철원임씨는 남편이 신혼 초 병에 걸리자 5년 동안 제대로 잠도 자지 않으며 직접 탕약을 달이고 한결같이 간호하였지만 부인 임씨의 정성에도 끝내 세상을 떠나자 자신도 세상에 뜻이 없음을 내비쳤다.
하지만 집안에서는 임씨의 마음을 알고서 불의의 일을 막고자 힘썼으나, 임씨는 집안 식구들을 안심시키고 나서 결국 먼저 떠난 남편을 따라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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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려 현액(右)과 정려기


내부에는 '열녀 학생 연안 김재양 처 유인 철원임씨지문'이라 적힌 현액과 열행을 기록한 정려기가 걸려있는데, 그 시절 여인으로 살아간 애절함과 안타까움을 읽을 수 있다.


▷ 김의재·창원황씨 부부(夫婦) 정려문 (충남 예산군 봉산면 고도리 산 19-2)

열녀가꼭가문의영광이었을까 1

▲ 부부 정려문


효자와 열녀만 있겠는가?
부부의 효행이 알려져 정려된 효자 김의재와 부인 효부 창원황씨의 부부 정려문 이야기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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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의재· 처 창원황씨 정려


본관이 경주인 김의재는 11세에 부친상을 당하자 어른과 다름없이 시묘할 정도로 어린 나이에도 효심이 깊었다. 부부는 시모가 병이 나 오이와 물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자 구해서 드렸고, 자신의 허벅지 살을 떼어 성심껏 병구완을 하였으며,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3년간 정성을 다해 시묘하였다. 이에 1891년(고종 28)에 김의재와 그의 처 창원황씨가 함께 명정을 받아 정려각이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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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려 현액


정려각 앞쪽에는 '효자 증통훈대부사헌부감찰 김의재지문'이라 적힌 현액이, 뒤쪽에는 '효열부 증통훈대부사헌부감찰 김의재 처 증숙인 창원황씨지문'이라 적힌 현액이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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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의재·창원황씨 부부 정려문


복숭아꽃 너머 노(老)부부의 모습에서 그 옛날 어느 부부의 효행(孝行)이 흐릿하게 겹친다.


열녀 철원임씨 정려
충남 예산군 삽교읍 상하리 산 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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