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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사회

병자호란과 서산의 충신 류사

새로배우는 충남學

2021.10.15(금) 11:06:06 | 도정신문 (이메일주소:scottju@korea.kr
               	scottju@korea.kr)

서산 충절사

▲ 서산 충절사



남한산성으로 가다 전사
부석면에 충절사에 모셔져

 
병자호란 당시 서산지역은 직접적인 침략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살신성인의 자세로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고자 앞장섰던 지역의 인사들이 있었는데, 류사(柳泗, 1599~1636)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괴산군수 역임 시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충청감사 정세규의 막비로 근왕병 300여 명을 모집하였다. 남한산성으로 가던 중 험천전투에서 37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전투 중에 죽음으로 임금을 섬긴다(死君事)는 혈서를 써서 자신의 등에 메고 “무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전투에서 전사한 자가 충신”이라고 외쳤다.

순국 당시 시신은 수습하지 못했고, 부하가 투구와 토시만을 챙겨 전투 장소를 겨우 빠져나왔다. 유품만 수습한 뒤 지금의 서산시 부석면 가사2리에 도착하였는데, 이곳에 그를 모신 사당(충절사)이 있다.

진정한 군인 류사의 머릿속에는 오직 나라와 백성의 고통을 해결하려는 의지만 가득했다. ‘편안할 때 위험을 준비하라’는 거안사위(居安思危)와 ‘사적인 것을 없애고 헌신하는’ 멸사헌신(滅私獻身), ‘근심을 먼저하고 즐거움을 뒤로하는’ 선우후락(先憂後樂)의 자세에 매진할 뿐이었다.

진정한 지도자는 나라와 국민의 안전을 최우선 과제로 인식하고, 당면한 문제의 해결에 목숨을 걸었다. 류사도 동시대 다른 관료들과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부모님과 처자식이 있었다. 그렇지만 모든 일처리의 순서는가정보다 국가가 먼저였고(先公後私), 침략군을 물리치는 일이라면 추호의 양보와 타협이 없었다.

지도자들이 대국(大局)을 보지 못하면, 그 피해는 언제나 백성에게 돌아간다. 병자호란 당시 나라를 지키다가 순국했던 서산의 충신류사의 순국이 무겁게 다가오는 이유와 역사적 및 현재적 의미를 되새기는 배경이 여기에 있다.
/김경수 청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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