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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사회

단종복위 성삼문의 의리

새로배우는 충남學

2021.07.15(목) 11:29:00 | 도정신문 (이메일주소:scottju@korea.kr
               	scottju@korea.kr)

성삼문 초상화

▲ 성삼문 초상화



권력 장악한 세조에 반기
후대엔 의리와 정의 표상

 
권력 장악을 위한 갈등과 대립이 치열하던 시기의 기록은 새력에 의해 지워지거나, 입맛에 맞게 고쳐쳤다.
단종 복위운동에 대해, “세조실록은 여우와 쥐 같이 간악하고 아첨하는 붓을 지닌 자들이 편찬한 것이라 믿을 수 없다”는 조선중기 학자 이자(1480~1533)의 표현은 이를 잘 대변한다.

1452년 12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던 단종은 왕자의 난(1398년)과 같은 전례가 자신에게도 닥칠 수 있다는 염려를 떨치지 못했다. 그 우려는 즉위 후 현실로 나타났다. 삼촌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넘겨야 했고(1455년), 성삼문 등 사육신이 주도한 단종복위운동(1456년) 이후에는 삼촌으로부터 사약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수양대군의 권력욕에 의해 발생한 계유정난은(1453년) 왕조 건국 60여 년 만에 최대 규모의 지배층 이합집산을 초래한 정치적 사건이었다. 유교적 의리론과 명분론의 입장에서 볼 때, 계유정난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으려면 수양대군은 왕위에 오르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정권의 정당성 및 인간의 기본적인 도리마저 상실하였던 수양대군은 명분보다 실리를 쫓았다. 자신의 쿠데타를 ‘정난(靖難)’, 즉 국가의 위태로운 난리를 평정했다는 억지 주장을 피력하기도 했다.

세종 때부터 성리학의 이념 정착에 주력하였던 성삼문은 명분 준수와 의리의 실천을 이상으로 생각했다. 그러한 의지는 1456년(세조 2) 상왕(단종)을 복위시키겠다는 행동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실패로 끝나면서 정치적 및 사상적 이상을 접어야 했다.

성삼문의 정신과 사상은 세조 당대에는 반역이었지만, 후대에는 충신의 표상이 되었다. 의리와 명분, 공정과 정의가 요구되는 오늘 현재 성삼문의 절의 정신이 빛나고 있다.
/김경수 청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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