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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삼국시대

  • 무령왕의 모습

    무령왕 (武寧王, 461~523)

    『삼국사기』에 따르면 무령왕은 동성왕의 둘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무령왕의 출생과 관련해서는 3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동성왕[牟大王]의 둘째 아들이라는 설과 개로 왕의 아들이라는 설,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왕의 아들로서 말다왕(동성왕)의 이모형이라는 설이다. 이와 관련하여 기록을 검토해 본 결과 그의 계보는 동성왕과 부자관계로 설정할 수 없으며,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를 아버지로 하는 이모형(異母兄)의 관계로 보는 것이 타 당하다. 무령왕의 아버지인 곤지는 458년 중국 송으로부터 정로장군 좌현왕을 제수받은 인물로 당시 11명의 관작 수봉자 중에 제일 높은 위상을 지니고 있었던 인물로 개로왕의 동생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남진으로 개로왕이 전사하고 한강유역을 상실하자 문주왕은 475년 웅진으로 천도를 단행하게 된다. 그러나 웅진천도 이후 문주왕의 피살과 삼근왕의 단명 등 정치적 불안이 지속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이 안정을 찾아가는 것은 동성왕대에 이르러서이다. 동성왕은 다양한 정치세력을 등용하는 등 왕권의 안정화에 노력하였으며, 대외적으로 국가의 위상을 회복하는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동성왕 말년에 천재지변 등 경제적 어려움에 따른 사회적 불안이 가속되었으며, 정치세력간의 갈등이 야기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동성왕은 결국 백가가 보낸 자객에 의해 해를 입게 되었고, 무령왕이 즉위하였다. 그리고 즉위 직후 동성왕을 살해하는데 주동적인 역할을 했던 백가는 가림성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무령왕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우두성으로 출정하여 반란군을 토벌하였다. 무령왕은 반란군을 평정하는데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였고,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무령왕은 재위기간 중 대내적으로 왕권의 안정화를 이루었으며, 대외적으로 고구려와 말갈의 침략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면서 국력회복에 크게 기여하였다. 먼저 대외관계에서는 475년에 상실한 한강유역의 회복에 주력하였다. 또한 중국 남조의 양과도 외교관계를 강화하여 512년과 521년 두 차례에 걸쳐 사신을 보냈다. 그리고 521년에는 양으로부터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영동대장군(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의 작호를 받았다. 그리고 512년에는 가야의 영토였던 섬진강 유역으로 비정되는 상다리․하다리․사타․보루 등 4현을 합병하였으며, 기문․대사지역에도 진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무령왕은 주변국에 대해서는 강경정책을 펼친 반면에 대중국․왜관계는 우호관계를 유지하는데 노력하였다. 대중국관계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무령왕릉이다. 무령왕릉은 전축분으로 중국 양나라의 대표적인 묘제인데, 무령왕은 이를 받아들여 자신의 무덤으로 하였다. 대왜관계는 주로 백제가 왜에 선진문물을 전수해 주는 입장이었다. 무령왕은 513년과 516년에 오경박사 단양이와 고안무를 각기 왜국에 보내 문물을 전수해 주었다. 한편 무령왕은 대내적으로 체제의 정비에도 노력하였다. 지방통치와 관련하여 지방에 자제와 왕족을 파견하여 통치하는 담로제를 완비하였으며, 민생의 안정에도 노력하여 506년에는 기근으로 백성들이 굶주리게 되자 창고를 풀어 이를 구제하였으며, 510년에는 영을 내려 제방을 수축하는 한편 국내의 유식자(遊食者)들을 구제, 고향에 돌아가 농사를 짓게 하였다. 그로 인해 민심이 크게 그를 따랐다고 한다. 무령왕은 523년 5월 7일 62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2년 뒤인 525년(성왕 3년) 8월 12일 공주 송산리에 안장되었다. 왕비는 526년 11월에 사망, 529년 2월에 안치하였다. 그리고 왕릉은 왕이 죽기 11년 전인 512년에 이미 축조준비가 되어 있었음을 명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성왕의 모습

    성왕 (聖王, ?~554)

    성왕은 무령왕의 맏아들로 523년 부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성왕이 왕위에 오를 당시 백제는 대내외적으로 크게 혼란한 상황이었다. 대외적으로 고구려에 대응하기 위해 신라와 우호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여전히 고구려가 백제의 옛 땅을 차지하고 있었고, 대내적으로 중앙 및 지방 제도가 완비되지 않아 국가 기강이 확립되지 못했다. 불교가 통치이념으로 널리 퍼져 있었지만 아직 국가이념으로 적극 활용되지 못한 실정이었다. 성왕은 이에 고구려에 침탈당한 영토를 회복하고 새롭게 도약하기 위해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하고 중앙 및 지방 제도를 정비하였다. 또한 사찰 창건, 불경 번역, 불교 교류에 앞장서 통치 기반을 확립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국가체제를 완비하고 독특한 불교문화를 꽃피울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성왕은 즉위 후 가장 먼저 중앙 및 지방 제도를 정비하였다. 먼저 중앙제도의 경우, 복색(服色)과 관식(冠飾), 대색(帶色)으로 이루어지는 관등제를 엄격하게 실시해 질서 체제를 통일하였다. 또한 종전 6좌평 중심의 6좌평 16관등제의 중앙관제를 내관(內官) 12부, 외관(外官) 10부로 재편(총 22부사)해 업무 확대 및 통치 체제의 변화에 대응하였다. 나아가 내관은 궁중과 관련된 사무를 담당하고, 외관은 서정(庶政)을 관장하도록 해 국가 운영에 공사를 엄격하게 구분하였다.

    중앙제도에 이어 지방제도는 한성시대의 불완전한 지방제도를 그대로 답습한 22담로를 방-군-성 제도로 개편해 전국을 일원화하였다. 먼저 전국을 5방 37군 200성(현)으로 나누고, 각 방에 직할지를 둬 각 방이 직할지 및 부속 성(현)을 통제하도록 하였다. 군사의 측면에서도 방령(方領)이 7~10개의 군을 통솔하고, 방령 아래 방좌(方佐)를 배속해 방령이 최고 지방행정관이자 군지휘관이 되도록 하였다. 아울러 군도 직할지를 둬 5~6개의 성을 통치하게 하였다. 중앙 및 지방 제도를 개편해 대내적인 체제 정비에 돌입한 결과 백제는 성왕대 왕권 중심의 정치 운영체제를 확립할 수 있었다. 성왕은 538년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수도를 천거해 사비시대를 열었다. 웅진도읍기 국가 체제를 완비하였고, 사비시대를 개막해 새로운 기틀을 마련한 점은 성왕의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당시 성왕이 머문 왕궁터는 현재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부소산성(扶蘇山城) 남록에 자리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소산성을 중심으로 외곽 요충지에 나성(羅城)을 쌓고, 내부를 5부(五部) 각 부를 다시 5항(五巷)으로 구획하였다. 이는 한국 고대 도성제 사상 가장 발전된 형태로 평가받는다. 사비 천도 후에는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로 개칭해 국가의 면모를 일신하였다.

    한편 성왕은 불교 진흥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불교는 성왕이 왕위에 오르기 약 150여 년 전(침류왕 원년)에 이미 전래되어 공인되었으나, 성왕이 국가이념 정립 및 대외발전에 이용하며 크게 성행하였다. 평소 불교에 대한 성왕의 관심은 웅진도읍기 대통사 창사기록 및 불경번역 사업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성왕은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 활동을 벌여 불교 융성에 힘썼다. 불교진흥을 통한 국가이념의 확립, 중앙 및 지방 제도 개편을 통한 대내적인 체제정비 이후, 성왕은 고토회복의 염원을 품고 지속적으로 고구려와 겨루웠다. 그 결과 551년 가야군 및 신라군과 합세해 한강 하류 지역의 6개 군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진흥왕(신라)이 나제동맹을 깨고 한강 하류 지역을 탈취하며 고토회복의 염원은 이내 수포로 돌아갔으며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 무왕의 모습

    무왕 (武王, ?~641)

    무왕은 600년부터 641년까지 42년간 재위하며 왕권강화와 정치안정을 이룩한 백제 30대 왕이다. 기록상 출신배경과 가계, 즉위과정이 불명확하다. 삼국사기』에는 법왕의 아들이라고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유사를 비롯한 여타 기록에는 출생에 관한 다른 비화가 전해 법왕의 아들인지 명확하지 않다. 다만 이름이 장(璋)이고, 의자왕의 아버지인 점은 분명하다. 또한 삼국유사에 따르면 그의 어릴 적 이름이 서동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서동(무왕)이 선화공주 설화의 주인공인 바로 그 서동인지 확실하지 않다. 다만 백제 왕계, 설화의 내용과 성격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무왕을 선화공주 설화의 서동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무왕이 즉위할 무렵 백제는 귀족 간 내분으로 인해 정세가 매우 불안정하였다. 이에 무왕은 즉위 초 강력한 군사활동을 전개해 국론을 통일하고, 신라와의 불안정한 대외관계도 청산하고자 하였다. 이에 귀족들과 협력해 가야지역으로 진출하여 신라에 빼앗긴 영토를 탈환하고, 가야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당시 무왕이 신라와 수행한 전쟁은 기록으로 전하는 것만 13회에 달한다. 무왕은 신라와 활발한 군사활동을 벌여 신라에 대한 백제의 명예를 회복하고 우위권을 확보하는 데 전력을 기울인 뿐만 아니라, 당시 중국 정세를 기민하게 이용해 정치안정을 도모하였다. 이는 곧 무왕이 혼란한 정국을 마무리하고 전제왕권을 이루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왕은 대외환경을 조성해 정국을 안정시킨 뿐만 아니라, 왕권 강화의 수단으로써 유교정치사상을 확립해 대내적인 체제정비에 돌입하였다. 또한 불교와 도교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대규모 역사를 단행해 왕권을 과시하였다. 630년 사비궁 중수와 634년 궁남지 조성, 미륵사 및 왕흥사 창건이 그 한 예다.

  • 의자왕의 모습

    의자왕 (義慈王, ?~660)

    의자왕은 무왕의 원자(元子)로 백제 31대 왕이다. 태자 때부터 부모를 극진하게 섬기고 형제와 우애가 두터워 ‘해동증자’로 불렸다. 즉위 후에는 유교 정치사상을 강조해 왕권을 강화하였다. 의자왕은 왕위에 오른 뒤 가장 먼저 국내를 시찰해 민심을 수습하였다. 이후 정변을 단행해 귀족 중심의 정치 운영체제를 개혁하고, 대신라 전쟁에서 우위를 점해 권력기반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즉위 초 너무 활발한 활동을 벌인 탓인지 재위 말 나라가 안정기에 접어들자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다고 전한다.

    즉위 초 민심 수습에 나선 의자왕은 642년 제왕자의 아들 교기를 비롯, 외척세력과 내좌평 기미 등 고명인사 40여 명을 섬으로 추방해 귀족 세력의 결집력을 와해시켰다. 그리고 같은 해 군대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해 40여 개의 성을 함락시키며 최고 지도자의 위상을 몸소 확립하였다. 또한 장군 윤충(允忠)을 보내 신라 대야성(경남 합천)을 함락시키고, 대야성의 성주이자 김춘추의 사위 및 딸인 품석(品釋)과 고타소랑의 항복을 받아냈다. 특히 국제관계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탄력적인 대외정책을 폈다. 신라를 압박하기 위해 당과 공존을 모색하고, 왜와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또한 고구려와 협력해 신라와 당을 연결하는 요충지인 당항성을 공격해 수복하면서도, 당항성 점거가 오히려 신라와 당을 결속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정략적인 판단을 내려 후퇴하였다. 그뿐 아니라 당이 신라의 원조를 받아 고구려를 쳤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재빨리 신라를 습격해 7개 성을 탈환하였고, 고구려·말갈과 연합해 신라를 공격하여 30여 개 성을 함락시켰다.

    『삼국사기』와『삼국유사』,『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의자왕은 재위 말 술과 여자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다고 전한다. 서자(庶子) 41명을 좌평으로 임명해 기존 6좌평의 중앙관제가 47좌평이 된 것을 보면 이는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추정된다. 의좌왕은 660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막지 못하고 항복해 장안으로 압송되었으며 얼마 후 그곳에서 운명하였다.

  • 풍왕의 모습

    풍왕 (豊王, 미상)

    풍왕은 의자왕의 아들로, 백제 부흥운동을 이끈 마지막 왕이다. 631년(무왕 32년) 왜에 파견된 이래 계속 그곳에서 체류하다, 662년 30여 년 만에 백제 부흥의 꿈을 안고 조국에 돌아와 왕위에 앉았다. 백제 부흥운동은 풍왕이 환국하며 분위기가 반전되고 사기가 회복되는 등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풍왕이 무리하게 천도를 감행하며 이내 급속도로 쇠락하였다. 풍왕은 주류성(周留城)이 농사에 부적합하고 평야와 동떨어진 요해지라는 이유를 들어 부흥운동의 거점지를 주류성(周留城)에서 피성(避城)으로 옮기려 하였다. 주류성 이전 문제는 당시 지도층 사이에서 백제 부흥운동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권력관계를 일으킬 만큼 중요한 사안이었다.

    662년 풍왕은 복신을 비롯한 왜장에게 “주류성은…농토와 멀리 떨어져 있고 토지가 척박하니 농잠(農蠶)할 땅이 아니요 방어하고 싸울 장소이다. 이곳에 오래 있으면 백성이 굶주리게 될 것이다…피성은 서북에는 물이 띠를 두르고 동남쪽에는 깊은 진흙의 큰 제방이 있어 방비하기에 좋다…(또한) 삼한에서 가장 기름진 곳이다…비록 토지가 낮은 곳에 있지만 어찌 옮기지 않으리요” 본영 이전의 뜻을 밝혔다. 이에 대해 왜장은 “피성은 적이 있는 곳에서 하룻밤에 갈 수 있습니다. 서로 가깝기가 이처럼 심합니다…대저 굶주림은 후의 일이고 망하는 것은 먼저입니다”라고 간언하였다. 하지만 풍왕은 간언을 듣지 않고 이내 피성 천도를 감행하였다. 그 결과 이듬해에 본영(피성)이 적진에 그대로 노출되어 거열성(경상남도 거창)을 비롯, 거물성(전라북도 남원), 사평성(전라남도 승주), 덕안성(충청남도 은진) 등이 차례대로 함락되고 약 1천 70여 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였다.

    영토가 계속 신라에 넘어가는 상황에서 피성은 더이상 거점지가 될 수 없었다. 이에 풍왕은 천도 2개월 만에 다시 주류성으로 본영을 옮겼다. 그 결과 주류성 이전에 반대한 왜장의 입지는 강화되고 풍왕의 입지는 약해졌으며, 백제 부흥운동은 동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특히 풍왕이 복신과 권력을 사이에 두고 또다시 내분을 벌이며 백제 부흥운동은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풍왕은 왜에 오래 체류하여 백제에 뚜렷한 권력기반이 없었고 더구나 의자왕의 적자(嫡子)도 아니었다. 반면 복신은 의자왕의 사촌 형제이자 풍왕의 아제비 항렬이었으며 무엇보다 대중의 신망받는 지도자였다. 663년 복신과의 갈등은 풍왕이 복신을 살해하며 일단락되었지만, 군 지휘관을 대대적으로 숙청해 지휘체계의 혼란을 가져왔다. 풍왕은 같은 해 나당연합군과 네 번 싸워 네 번 모두 참패하였으며 백강전투에서 백제왕의 상징인 보검을 떨구고 고구려로 달아나 생을 의탁하였다.

  • 계백의 모습

    계백 (階伯, ?~660)

    계백은 660년(의자왕 20)년에 결사대 5천을 거느리고 18만 나당연합군에 맞서 싸우다 황산(충남 논산시 연산면 신량리 일대)에서 전사하였다. 그는 나당연합군의 협공에 전사한 패장이지만, 네 번이나 진퇴를 거듭하면서도 끝까지 나라를 지키다 전사한 명장이다. 오늘날 그는 쉽게 지지 않는, 백제의 정신을 상징하는 명장으로 기억되고 있다.

    삼국사기에 수록된 계백의 행적은 내용이 매우 짧지만 오늘날 우리가 계백에 관해 알 수 있는 가장 상세한 기록이다. 삼국사기에 수록된 기록은 “「계백(階伯)은 백제인이다. 벼슬은 달솔(達率)에 이르렀고, 의자왕 20년(660)에 당나라 고종이 소정방을 신구도대총관(神丘道大摠管)으로 삼아 군대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신라와 더불어 백제를 칠 때 계백은 장군이 되어 결사대 5천 명을 뽑아 이에 대항하였다. 이 때 계백은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는 이제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한 대군을 맞아 싸워야 하니 국가의 존망과 나의 목숨이 어찌될 지를 예측할 수가 없다. 혹여 내 처와 자식들이 포로로 잡혀 노비가 될 지 모르는데, 살아서 욕을 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쾌히 죽는 것이 낫다’라고 하면서 가족을 모두 죽였다. 황산벌에 이르러 세 진영을 설치하고 신라의 군사를 맞아 싸울 때 뭇 사람에게 맹서하기를 ‘옛날 구천(句踐)은 5천 명으로 오나라 70만 군사를 격파하였다. 오늘은 마땅히 각자 용기를 다하여 싸워 이겨 국은에 보답하자’고 하였다. 드디어 힘을 다하여 싸우니 한 사람이 천 사람을 당해냈다. 신라 군사가 이에 물러났다. 이처럼 진퇴를 네 번이나 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힘이 다하여 죽었다.”

    계백은 백제가 멸망하며 역사에서 잊혔기 때문에 그의 출신과 가계가 명확하지 않다. 김정호가 1865년(고종 2)에『대동지지』,「사원조」에 그의 이름과 성을 유일하게 기록하였으나 그 해석이 학자들 사이에서 분분하다. 이에 계백의 출신 성분과 기반은 설화에 기대 추정할 수밖에 없다. 다만 그가 부여 태생이라는 점은 조선시대 각종 읍지류에서 명확하게 확인된다. 계백은 황살벌 전투에서 패했지만, 안정복(조선후기)이『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계백이 험한 곳에 의지해 군영을 설치한 것은 지(智)의 표상이다”라고 할 만큼 지세를 활용하는 전술은 높이 평가받았다. 실제로 그는 황산벌 지형을 이용해 황룡산성(黃龍山城)에 좌군을, 산직리산성(山直里山城)에 중군을, 신흥리산성(新興里山城)에 우군을 각각 분리·배치하고 적군을 유인해 결사대 5천을 이끌고 신라 5만 대군을 4번이나 격파시켰다. 반면 그가 결전에 앞서 처자식을 죽이고 전장에 나아간 것에 대해서는 ‘싸우기도 전에 굴복’했다는 부정적인 평가와 ‘나라와 더불어 죽는 자’라는 긍정적인 평가로 극명하게 나뉜다.

  • 성충의 모습 흥수의 모습

    성충․흥수 (成忠․興首, ?~656)

    성충과 흥수는 백제 의자왕대 왕에게 목숨을 걸고 직언한 충신이다. 생몰연대와 출신배경이 명확하지 않다. 다만 조선후기 각종 읍지와 1940년대에 편찬된『지석동지』에 따르면 부여현 사람이고, 혜오화상의 권유로 벼슬길에 나아가 관직이 좌평벼슬에 이른 사실이 확인된다.

    성충은 656년 의자왕이 술과 여자에 빠져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자, 목숨을 걸고 직언하였다. 그는 이 일로 감옥에 갇혀 생을 마감하였는데, 죽기 직전까지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견하고 구체적인 방책을 제시해 충언하였다. 흥수는 성충 사후 의자왕이 더욱 타락해 귀족들의 모함을 받고 유배가게 되었다. 당시 귀족은 좌평 임자(任子)가 부귀영화를 탐해 적국(신라)과 내통할 정도로 부패하였으며, 의자왕은 신라와 무분별한 전쟁을 치러 나제동맹이 체결되기에 이르렀다. 660년 성충의 직언대로 나당연합군이 쳐들어오자 흥수는 대신들의 모함을 받아 유배를 사는 와중에도 의자왕의 요구에 응해 방책을 마련하여 충언하였다.

    성충과 흥수는 후대 충신의 사표로서 추숭되었다. 조선 초기 권근은 ‘의자왕이 성충의 말을 듣지 않아 나라가 망한 것’이라고 평가하였으며, 조선중기 유성룡은 ‘성충은 제 몸을 돌보지 않고 분연히 일어나 임금의 잘못을 간하다가 두 다리를 묶인 채 감금당한 처지에서 절명시(絶命詩)를 읊기까지 하면서도 능히 국가대계(國家大計)를 진술하여 왕의 한번 깨달음을 시도하되 조금도 원망하는 말이 없었(고)…흥공(興公)은 나라의 일이 허물어져감을 답답하게 여기어 빈척(擯斥)당함을 꺼리지 않으며 정성스럽게 그치지 않고 꾸준히 간한 말이 곧 전일의 성공(成公)의 말이요, 마음 역시 전일 성공의 그 마음이었다’고 충의를 칭송하였다.

  • 흑치상지의 모습

    흑치상지 (黑齒常之, ?~689)

    흑치상지는 백제의 달솔(達率)로 풍달군(風達郡) 군장(郡將)을 겸하였다. 660년 임존성에 3만 군대를 규합하여 부흥운동을 일으켰지만, 당의 회유책에 넘어가 자신이 부흥운동을 일으켰던 근거지인 임존성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그 후 당에 건너가 토번, 돌궐과의 전투에서 전공을 세워 황제의 신망을 받았다. 그러나 간신(주흥周興)의 밀고로 누명을 써 끝내 이국 당에서 최후를 맞았다.

    흑치상지는 660년 7월 13일 나당연합군에 의해 사비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이 항복하자, 무리를 이끌고 투항하였다. 그러나 당 장군 소정방이 의자왕을 포박하고, 군사를 풀어 노략질하는 무도함을 보고 좌우 수장 10여 명과 함께 달아나 군사를 모으고 임존성에 들어가 백제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백제부흥운동은 당시 열흘이 채 지나지 않아 의병이 3만에 이를 만큼 큰 지지를 받았으며, 실제 소정방의 공격을 물리치고 성 200여 개를 수복하는 등 전공을 올렸다. 특히 흑치상지가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 풍(풍왕)을 옹립한 이후 더욱 조직적으로 전개되어 사비성을 포위하였다. 심지어 지휘부 내부에서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풍왕이 다시 복신을 죽이는 내분이 일어나고, 당 유인궤가 이 틈을 타 신라 김유신과 반격에 나선 데에도 굳건하였다. 당시 흑치상지가 거점지로 삼은 임존성은 663년 풍왕이 고구려로 망명하였을 때에도 신라 문무왕이 회군하고, 당이 전술을 바꿔 고종의 칙서로써 흑치상지를 회유할 만큼 난공불락이었다.

    흑치상지가 고종의 칙서를 받고 투항한 배경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자세하지 않다. 그는 663년 당 유인궤(劉仁軌)에게 나아가 항복하고, 같은 해에 끝까지 투항한 지수신(遲受信)을 공격해 자신의 근거지였던 임존성을 쳐 함락시켰다. 백제부흥운동은 이후 지수신이 성을 버리고 고구려로 망명하며 막을 내렸다. 672년 흑치상지는 신라가 백제의 옛 땅을 접수해 웅진도둑부가 소멸되며 고향을 떠나 다시 당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해 ‘좌영군장군 겸웅진도독부사마(左領軍將軍兼熊津都督府司馬)’ 관직을 제수받고, ‘부양군 개국공’과 식읍 2천 호에 봉해졌다. 그리고 이후에 양주자사(洋州刺史)가 되어 678년 토번 정벌에 나섰다. 당시 당은 토번군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번번이 패퇴하였는데 흑치상지가 결사대 5백을 이끌고 나아가 무너뜨렸다. 흑치상지는 이후에도 토번과의 전쟁에서 계속해서 승리를 거둬 그가 군대를 이끈 7년 간 토번이 단 한번도 변경을 노략질하지 못했다. 이어 서경업의 난을 평정하고, 지금의 외몽골 지역을 관장하는 연연도대총관(燕然道大摠管)에 올랐다.

    흑치상지는 이다조(李多祚) 등과 함께 돌궐을 격파해 당의 중앙아시아 지배권을 확고히 하였다. 이 공로로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여 마침내 연국공(燕國公) 작위와 식읍 3천호를 하사받았다. 그러나 687년 동료장수 찬보벽(爨寶壁)과 돌궐을 격파할 때, 찬보벽(爨寶壁)이 흑지상지와 함께 공을 이루라는 조칙을 무시하고 공을 탐내 무리하게 진격하며 전군이 패몰되는 불명예를 떠안게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간신 주흥(周興)이 흑치상지가 조회절(趙懷節) 반란사건에 가담했다고 무고하며 잔혹한 고문을 받고 689년 교수형에 처하였다. 699년 흑치상지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은 지 10년 만에 아들 흑치준의 노력으로 누명을 벗었으며 북망산에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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