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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신문뉴스

동학농민군, 일본군과 싸워 첫 승리한 ‘면천 승전곡전투’

1894~2024 동학 130년, 충남동학혁명 현장을 가다 〈4〉

2024.06.10(월) 16:08:19 | 홍주신문 (이메일주소:uytn24@hanmail.net
               	uytn24@hanmail.net)

동학농민군일본군과싸워첫승리한면천승전곡전투 1

충청서부지역, 동학농민군에 장악되자 정부·일본군 10월 10일부터 토벌들어가
내포동학농민군, 선두에 ‘천역불변도역불변(天亦不變道亦不變) 깃발 들고 진군
면천 승전곡전투, 동학농민군이 지략으로 일본군 물리친 처음이자 마지막 전투
10월 25일 덕산군 구만리서 관군과 전투 승리, 26일 예산 신례원에 대진 설치 

 

동학이 내포지역에 처음 들어온 시기에 대한 기록은 천도교 제4대 교주 춘암 박인호가 1883년 3월 18일 제2대 교주 최시형을 찾아가 입교한 것이 최초로 전해진다.

특히 홍주, 예산, 서산, 태안, 당진 지역은 서산 지곡면 장현리 독주골 출신의 원암(元菴) 최형순(崔亨淳)이 1890년경 종사 관계로 관향인 경주에 왕래하면서 최씨 문중에서 동학의 1대, 2대 교주가 출현하자 1890년 3월 16일 최시형을 찾아가 입도함으로써 최형순에 의해 동학이 처음 들어온 것으로 전해진다. 그렇다고 당진지역의 동학 유입이 최형순에 의해 유입됐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다만 1894년 10월 18일 승전곡 전투를 위해 여미평에 집결한 접주 가운데 면천의 이창구, 한명순, 이화삼과 당진의 박용태, 김현구 등이 포함돼 있어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 이전에 이미 동학이 유입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 동학농민혁명 이후인 1898년 8월, 의암 손병희가 당진군 수청리 모동(茅洞;띠울골망)으로 이주해 이곳에서 1899년 10월 청양군 정산으로 이주할 때까지 1년 2개월 동안 거주했기 때문에 이곳에 동학이 전파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진지역의 동학에 관한 기록은 동학농민혁명에서 유일하게 일본군에 승리한 ‘승전곡 전투’가 있다. 당진지역에서 기포를 통해 승전곡 전투에 참가한 기록은 발견할 수 없으나 여미벌에 모인 2만여 명의 동학농민군은 서산, 태안, 당진지역의 교인들이 다수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동학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는 가운데 1892년 10월 공주와 11월 전라도 삼례에서 수만 명이 집결해 교조신원운동을 펼쳤으며, 이듬해 2월에는 광화문 복합상소를 통해 교조신원운동을 했다. 이후에도 오히려 탄압이 계속되자 3월에는 충북 보은 장내리에서 3만여 명이 모여 ‘척양척왜운동’을 했다.
 

■ 면천의 승전곡, 매우 유리한 지형 선점
충청 서부지역이 동학농민군에 의해 장악되자 정부와 일본군은 10월 10일부터 본격적인 동학토벌에 들어갔다. 일본군과 경군이 출동해 내려온다는 소식을 들은 덕포와 예포, 아산의 안교선 대접주는 태안에 모여 대책을 협의하게 됐다. 이때 전라도의 전봉준과 충청도의 손병희가 논산에서 합진해 공주성 공략을 위해 북상하고 있었다. 신창과 아산을 비롯한 충청 서부지역의 동학농민군은 해미의 여미벌에 집결했다.

동학농민군은 북상을 시도하기 위해 덕산 방향보다 위험 부담이 적고 세 규합이 쉬운 면천 방향을 선택한다. 면천의 승전곡은 협곡이어서 동학농민군에게 매우 유리한 지형이라 여기고 선점했던 것이다.

홍종식과 조석헌 역사에도 승전곡 전투에서 일본군이 대패한 상황을 기록하고 있으나 전투 상황은 자세하지는 않다. 조석헌의 기록과 일본군의 기록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산상에 포진하고 있던 2만여 동학농민군과 계곡으로 공격해 들어오던 80여 명 정도의 일본군은 12시 반부터 3시 반까지 3시간여에 걸쳐 공격을 시도했다. 이 전투는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은 동학농민군을 깔보고 좁고 깊은 계곡 길을 따라 공격해 왔다. 일본군이 계곡 아래 능선에 있던 동학농민군은 쉽게 물리칠 수 있었으나 산상에 배치된 동학농민군은 당해낼 수가 없었다. 일본군은 집중 공격을 받게 되자 개인장비를 버린 채 면천으로 달아났다. 동학농민군이 맹렬하게 추격하자 합덕으로 갔다가 마침내 26일에 홍주성으로 후퇴했다.’

면천의 승전곡 전투는 동학농민군이 지략으로 일본군을 물리친 처음이자 마지막 전투였던 것이다. 동학농민군은 25일에 기세 당당하게 예산 고덕면 구만리까지 진출하고, 저녁에는 신례원(新禮院) 뒤 들판에 진을 친다.

박인호는 예포의 박덕칠과 10월 22일 태안 동면 역촌리에 주둔하고 있다가 23일 해미 구밀리에서 유숙하고, 23일 여미평(汝美坪)에 집결했다. 이때 내포지방에서 2000~3000여 명씩의 동학농민군이 모여들어 2만여 명에 달했다. 위세 등등한 선두에는 ‘천역불변도역불변(天亦不變道亦不變;하늘도 굽어 살피시니 그 길을 따르리니)’이라는 글을 써서 세우고, 수십척 되는 대장기에는 ‘덕의대접주박인호(德義大接主朴寅浩)’라 쓰고 척양척왜, 보국안민, 포덕천하, 관제창생 등의 깃발을 들고 진군했다. 
 

동학농민군일본군과싸워첫승리한면천승전곡전투 2

■ 동학농민군, 신병기 무장 일본군에 승리
역촌에서 합류한 예포와 덕포동학농민군은 10월 24일 해미 여미벌에 진을 치고 있던 관군과 유회군의 습격을 받았으나 맞서 싸웠다. 일본군과 경군으로 구성된 엽합부대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면천으로부터 여미벌로 진격해 오고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

면천 승전곡의 지리에 익숙한 동학농민군은 그 소식을 듣고 승전곡 양쪽 산등성에 올라가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다. 진압군이 승전곡을 향해 진격해 오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동학군은 깽과리와 징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공격해 승리를 거뒀다. 승전곡 전투는 동학농민혁명군이 신병기로 무장한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를 한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승전곡은 당진읍 구룡리 동쪽 사기소리와 면천면 사기소리(沙器所里) 검암천 양쪽 암벽산에 계곡을 이루고 있는 3㎞ 정도의 협곡이다. 계곡의 북쪽에는 이배산(離背山, 220m)이, 남쪽에는 웅산(雄山, 253m)이 솟아 있어 깊고 좁으며 꼬불꼬불하게 계곡길을 굽어보고 있다. 이 능선 양쪽에 각각 1만 명의 동학농민군을 배치하고 일본군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승전곡 전투가 박인호가 이끄는 동학농민군이 일본군과 싸운 첫 번째 접전이었다.

10월 24일 면천에서 아침에 출발한 일본군은 오전 10시경 나무고개를 넘어 사기소리로 향해 들어오고 있었다. 이곳을 지키던 동학농민군 일부는 일본군이 사격을 하자 후퇴해 낮은 능선에 배치된 동학농민군과 합류했다. 일본군은 계곡에 당도하자 1개 분대를 이 능선으로 올라가게 하고 주력부대는 계속 골짜기를 따라 전진했다. 사기소리에서 구룡리 쪽으로 오다 보면 왼편에 길고 낮은 능선이 가로 놓여 있다. 여기에 농학농민군 일부가 배치돼 정면에서 공격해 오는 일본군을 향해 일제히 발포했다. 일본군은 이곳을 점령하면 길이 열릴 것으로 보고 공격을 해왔던 것이다. 동학농민군과 일본군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으나 얼마 후 동학농민군은 후퇴해 좌측에 있는 웅산으로 올라가 다른 동학농민군과 합류했다.

이때 선봉 척후(先捧 斥候;선봉을 보내 험한 곳이 있으면 달려와 알리는 자)가 관군이 행군해 오는 것을 보고하자 농학농민군은 승전곡 양쪽 산으로 올라가 복병을 했다. 일본군이 골짜기 안으로 몰려들어서자 동학농민군은 공격을 개시해 공격 한 시간여 만에 적을 모두 격퇴시켰다. 동학농민군의 사기는 충천했고, 아무런 훈련이 없던 동학농민군이었지만 박인호의 지휘 아래 통제가 잘 됐고 모두가 결사적 각오로 싸워 신식무기를 가진 일본군을 제압했다. 오전 10시경부터 시작된 전투는 오후 4시경 일본군이 퇴각하면서 동학농민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동학농민군이 일본 정예군과 싸워 승리한 전투는 이곳 ‘승전곡 전투’가 유일하다.

이곳은 동학농민군이 관군에 승리해 ‘승전곡’이라 지명이 붙여졌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1936년에 발행된 ‘당진군사(唐津郡史)’에 의하면 임진왜란 당시 큰 승리를 해 ‘승전곡’이라 했다는 것이 확인되기도 했다.

이어 다음날인 25일에는 덕산군 구만리에서 관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했고, 26일에는 예산 신례원 후평에 도착해 대진을 설치했다. 승전곡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일본군은 지역의 지리에 어두웠고, 동학농민군의 전력을 얕잡아 보았으며, 우수한 무기와 전투력을 갖춘 일본 정규군이 동학농민군에게 패배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둘째로는 동학농민군이 유리한 지형을 이용해 방어 전술을 펼쳤다. 셋째로는 동학농민군의 조직력이 독립적·개별전으로 활동하던 결사 시기와는 크게 달라졌다는 것이다. 죽창으로 무장한 초보적인 군사집단이긴 했지만 전술과 전략을 사용할 줄 알게 됐다. 마지막으로 동학농민군의 일치단결된 결연한 의지와 용기가 대접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요인으로 꼽힌다.
 

<이 기사는 충청남도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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