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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저승까지 거리는

이정록 시인의 서랍

2022.05.08(일) 23:46:27 | 도정신문 (이메일주소:scottju@korea.kr
               	scottju@korea.kr)

저승까지 거리는
병풍 두께 2.5cm.

꽃 피고 새가 나는
병풍 한쪽은
기쁜 날에 펴고요.

먹글씨만 쓰인
다른 한쪽은
슬픈 날에 펼쳐요.

삶도 죽음도
병풍 두께 2.5cm.

젖 먹던 입부터
숨 거두는 콧구멍까지도
병풍 두께 2.5cm.

『콧구멍만 바쁘다』 창비


저승까지거리는 1


너도나도 양반이라며 팔자걸음을 걷던 시절, 관혼상제도 모르면 양반이 아니라 염소반이라며, 증조부께선 제사상 장사를 시작하셨다고 한다. 제사상을 하나 사서 해체한 뒤에, 그 조각들을 여러 벌 깎아서 조립하는 식이었다고 한다. “제사상만 가마니때기 위에 놓고 지낼 거여? 병풍하고 돗자리도 있어야지.” 그렇게 ‘원 플러스 원!’으로 돈을 모은 뒤에 벼슬도 사셨다니, 우리 집안도 잠시나마 족보의 골격을 갖춘 시절이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와 전쟁과 조국 근대화를 거쳐 오는 사이, 그 ‘감찰대부’께서 장만하신 재산은 장마철 상춧잎처럼 녹아버렸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무얼 만드는 걸 좋아하셨다. 손재주를 익혀서 제사상과 병풍을 제작하는 걸 바라신 것은 아니었겠지만, 경운기를 고치고 텔레비전을 수리하는 기술자가 되려면 연장을 잘 다루는 건 필수라고 생각하신 거였다. 하루는 연살을 깎다가 왼손 검지를 다쳤다. 순간 뼈가 보이고 피가 솟구쳤다. 아버지가 천천히 다가와서 너덜거리는 살점을 덮고 광목천을 찢어서 묶어주셨다. “정록아. 왜 손가락이 열 개 겄어?” 글을 쓸 때도, 어린 시절 열 개의 손가락이 더듬은 날카로움과 우둘투둘함과 냄새와 끈적거림을 정확히 그려내려고 애쓴다. 

요즘 아이들의 손이 엄지장갑을 닮아간다. 연필을 깎지 못하는 애들이 많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사과를 깎지도, 라면도 끓이지 못하게 한다. “그러다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누가 아이들의 손가락을 석고붕대로 친친 감아버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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