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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석탑, 정림사지를 돌아보다

2015.07.14(화) 13:00:22 | 부여타임스 (이메일주소:jynews1@hanmail.net
               	jynews1@hanmail.net)

정림사지 오층석탑

▲ 정림사지 오층석탑


정림사는 백제가 웅진(공주)에서 사비(부여)로 천도되면서 세워진 왕실의 사찰이다. 지금은 그 터와 1600년이라는 세월을 홀로 견딘 오층석탑(국보 제9호), 고려 때 조성된 대형 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자리하고 있다.일제강점기 당시인 1942년. 일본인들에 의해 조사된 이 절터에서 ‘太平八年 戊辰 定林寺 大藏唐草(태평팔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라는 글귀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면서 이곳의 이름이 정림사라는 절터였음이 확인됐다.

이런 정림사의 숨결을 찾기 위해 복원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정림사지 박물관만이 최선의 방법으로 세워졌다.

불교가 융성했던 나라

정림사지 박물관에 들어서면 절터에서는 느낄 수 없던 매혹적인 백제의 감성이 숨을 쉰다. 그다지 높지 않은 듯 하면서도 낮지 않은 건물의 층고는 백제인들의 소박함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백제는 불교문화를 가장 잘 받아들인 나라다. 또한, 잘 전파한 나라이기도 하다. 고구려는 백제보다 한 발 빨랐다. 후한과 전진을 타고 대륙으로 이어졌다. 백제는 고구려와 같이 4~5세기경 불교가 도입됐지만, 최소 몇 년 이상 늦게 들여왔다. 하지만, 어느 나라보다 융성했고, 이 문화를 전파했다. 신라도 불교전파의 수혜국이었다.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보다 한 세기 정도 뒤늦게 불교를 받아들였다. 해상왕국으로 불렸던 백제는 일본에 처음으로 불교를 전한 나라가 됐다. 그리고 아스카문화를 만든 장본인이 됐다.

백제 아비지, 불교탑의 최고 권위자

삼국시대 불교문화는 목탑이 주를 이뤘다. 몇 층씩이나 되는 목탑들의 웅장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백제문화단지에 복원된 능사(능산리사지)목탑만 해도 그 규모가 대단하다. 황룡사지 9층 목탑은 높이는 70m가 넘는다고 한다. 지금도 이런 목탑을 구축하기가 쉽지 않다.
황룡사지 9층 목탑은 아비지라는 백제인이 지은 것이다. 당시 선덕여왕이 백제에 요청해 불러들인 인물이다. 그만큼 건축술이 상당히 뛰어났다는 것이다.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황룡사지 9층 목탑은 닮은꼴이다. 기단에 해당하는 부분이 상당히 크고, 처마 끝 모서리인 전각은 살짝 치켜세워졌다. 아비지는 이런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였고, 당대 최고의 건축가였음이 증명된다.

 

정림사지박물관에 전시된 정림사 복원모형도

▲ 정림사지박물관에 전시된 정림사 복원모형도


일탑일금당

정림사는 백제시대 사찰의 전형적인 가람배치(구조)를 가지고 있다. 사찰의 입구 양쪽에는 정화됨을 의미하는 두 개의 연못이 있고, 정문인 중문으로 들어서면 탑이 놓여 있다. 또, 탑 뒤에는 불상을 모셨던 금당이 있고, 뒤쪽에는 강당이 있다. 또한, 강당으로부터 좌, 우로 중문까지 이어져 사람이 통행할 수 있었던 회랑이 있었다. 이것이 일탑일금당의 양식이다.
중국의 영녕사도 일탑일당이고, 일본도 마찬가지다. 익산 미륵사지는 약간 다르다. 삼탑삼금당의 양식을 띄고 있다. 신라의 황룡사는 일탑삼금당의 양식이고, 평양에 있는 청암리사지에는 탑 주변으로 서금당과 동금당이 둘러싸고 있는 일탑삼금당의 양식이다.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혼합형인 듯하다.오층석탑, 사리는 존재한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현존하는 석탑 중 가장 오래됐다. 또한, 아직 단 한 번도 해체한 적이 없는 탑이다. 불교의 탑에는 사리가 들어있다. 탑 자체가 사리를 보관하기 위한 용도다.
탑에 사리를 보관할 때는 작은 항아리 같은 모양의 사리감에 넣은 뒤, 심초석에 다시 보관하는 형태다. 심초석은 탑의 가운데에 위치하기 때문에 마음 심(心)자를 쓴다.
목탑의 심초석은 탑의 맨 바닥에 자리하지만, 석탑은 기단에 심초석이 있다고 한다. 오층석탑의 경우 1층 탑신 안에 사리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구조도

▲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구조도


별석 149개의 조화

오층석탑은 주로 화강석으로 이뤄져 있다. 요즘은 이러한 모양을 만들 때, 큰 돌을 놓고 조각을 하는 양식이지만, 오층석탑은 돌 하나, 하나를 모두 깎아서 만들었다. 이렇게 개개의 돌을 ‘별석’이라고 한다. 지금도 이러한 탑을 만들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층석탑에는 별석 149개가 사용돼 조립됐다.

오층석탑은 목탑의 닮은 꼴

오층석탑은 미륵사지 석탑과 함께 최초의 석탑으로 분류된다. 특히, 오층석탑은 목탑의 양식을 빌은 석탑이라고 널리 알려져 있다. 당시 이 석탑은 처음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목탑이 가지고 있던 특징들을 그대로 살렸던 것으로 보인다. 목탑의 고정관념을 크게 깨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오층석탑의 지붕돌이 크고, 넓은 형태를 띠고 있다. 이것 때문인지, 1층 기단은 다른 탑들과 상당히 비교될 정도로 크다. 당시의 건축술 뿐 아니라, 설계도 상당히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정림사는 생각보다 작았다

정림사지 주변에는 1.5m 가량의 높이로 담이 쌓여져 있는데, 그동안 이 절터가 이정도로 컸다고 생각됐었다. 그러나 최근에 정림사의 터 발굴 작업으로 건물지를 찾아냈다. 약8.8m에 이르는 높은 오층석탑 뒤로, 대형 비로자나 석불좌상이 있었기에 크다고 생각됐으나, 건물지의 기둥이 있던 자리들에서는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는 않다(검이불누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는 대목이 여실이 드러났다. 사찰의 규모는 아담하면서도 웅장함과 단조로움에서 묻어나는 석탑의 아름다움은 그야말로 우리 민족의 기상을 대변해 주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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