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통합검색 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화면컨트롤메뉴
인쇄하기

사는이야기

충남 토성(土姓) 및 입향성씨-(13)연안리씨(延安李氏)

김진우의 성씨(姓氏) 이야기

2012.01.13(금) | 김진우 (이메일주소:sewoora@naver.com
               	sewoora@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충남 공주에서 활동한 인조반정 1등공신 리귀(李貴)

 리귀(李貴,1557~1632,)는 조선 중기에 충청남도 공주에서 활동한 문신으로 자는 옥여(玉汝)이고, 호는 묵재(默齋),시호는 충정(忠定)이다.

할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왕명을 출납하던 중추부의 정3품당상관) 리기(李夔)이고, 아버지는 영의정(정1품정승)에 추증된 리정화(李廷華)이다. 어머니는 안동권씨청송부사(府使,정3품수령) 권용(權鎔)의 딸이다.

1592년(선조 25) 강릉참봉(參奉,종9품)으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였고, 이어 이덕형(李德馨).이항복(李恒福) 등의 추천으로 삼도소모관(三道召募官,조선때 병난이 발발했을 때 그 지역의 향병(鄕兵)을 모집하기 위하여 왕이 임시로 임명하던 관리)과 이듬해 삼도선유관(三道宣諭官)에 임명되어 체찰사(體察使,조선때 전시총사령관으로 외적이 침입하거나 내란이 일어난 비상시에 설정하는 임시 직책이며 2품이상의 재신이 임명되고 군사와 행정을 점검함) 류성룡(柳成龍)을 도와 군졸을 모집하고 양곡을 거두어 개성으로 운반하여 한양 수복을 도왔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는 전란 후의 혼란을 수습하는 데 힘을 쏟았다.

1616년(광해군 8)에 이천으로 유배되었는데 3년 후에 풀려나 1622년 평산부사(정3품수령)가 되었다. 이후 광해군의 폭정이 계속되자 이를 개탄하고 김류(金瑬),신경진(申景禛) 등과 함께 인조반정을 일으켜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으로 녹훈되었다. 호위대장, 이조참판(參判,종2품차관)겸(兼)동지의금부사(義禁府使),대사헌(大司憲,종2품검찰총장.감사원 감사위원) 우참찬(의정부 정2품),좌찬성(左贊成,의정부 종1품재신) 등을 역임하였고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에 봉해졌다.

1626년(인조 4) 인헌왕후(仁獻王后)상기를 만 2년으로 주장하였다가 대간의 탄핵으로 사직하였다. 정묘호란때 왕을 강화도에 호종(扈從,왕가를 뒤따름)하여 최명길(崔鳴吉)과 함께 화의를 주장 탄핵받았다.
저서에는 묵재일기(默齋日記).이충정공장소(李忠定公章疏),편저에 한음공언행록(漢陰公言行錄)이 있다.

묘는 충청남도 공주시 이인면 만수리 계성산 능선에 있다. 묘소 앞에 1641년(인조 19)에 건립된 묘비가 있는데, 이식(李植)이 비문을 지었다. 만수리 입구에는 신도비(神道碑,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89호)가 있다. 신도비 앞면에는 조익(趙翼)이 비문을 짓고 오준(吳竣)이 글씨를 썼으며 여이징(呂爾徵)이 전서를 썼다.

신도비의 건립 연대는 경인(庚寅)이라고만 적혀 있어 1650년(효종 1년)으로 추정한다.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인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충청남도 공주시 이인면 만수리 계성산 능선에 리그의 세 아들인 연양부원군 리시백(李時白), 사우당 리시담(李時聃), 연성군 리시방(李時昉)을 배향하기 위해 세운 성봉서사 터가 있다. 성봉서사는 1871(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충남토성및입향성씨13연안리씨 1         

                      <충남 공주시 이인면 만수리에 있는 연평부원군 리귀 묘와 묘비 墓碑>

 연안리씨(延安李氏)시조인 연안후(延安侯) 리무(李茂)의 묘는 대전시 유성구 갑동 갑하산 아래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제2묘역 좌측 상단에 있고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제1묘역" 우측 갑하산 아래에는 인조반정 1등공신 리귀(李貴)의 아들 사우당(四友堂)리시담의 묘가 있다. 또한 유성구 구암동에 위패를 모신 연원사(延源祠)가 있는데, 해마다 개천절(10월 3일)에는 전국의 후손들이 운집하여 세천(歲薦)을 올리고 돈종목족(敦宗睦族)하는 정의(情誼)를 다지고 있다.

충남토성및입향성씨13연안리씨 2

                                                            연안리씨 시조 묘소 표지석            

 

충남토성및입향성씨13연안리씨 3

충남토성및입향성씨13연안리씨 4

 사진 위 <국립대전현충원 제2장군 묘역 우측 갑하산 아래에 위치한 연안리씨시조 리무 묘>- 2010년 촬영

                             사진 아래 비문은 연안리씨 리항녕 박사가 쓴 구비(舊碑)

 리시담(李時聃,1584~1665)의 자는 현충(玄忠) 또는 자현(子玄), 호는 사우당(四友堂)이다. 아버지는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리귀(李貴)이며,어머니는 참판(參判:6조의종2품차관)장민(張旻)의 딸이다. 영의정을 지낸 리시백(李時白, 1581~1660)은 그의 큰 형이며 충남 보령에서 지석(誌石)이 발견된 리시방(李時昉,1594~1660,호는 서봉,시호는 충정)도 형제이다.

리시방은 현종때 공조판서(정2품장관)로서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의금부의 으뜸 벼슬인 판사(判事)로 종1품관직)를 겸하여 재차 호남지방에 대동법을 실시할 것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남한산성을 개수하다가 이듬해에 병으로 죽었다. 저서로는 <서봉일기>가 있으며,영의정에 추증되었다.리시방 초상은 시도유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되어 대전시 유성구 <선사박물관>에 있다.

리시담(李時聃,1584~1665)은 1613년(광해군 5) 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과거)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유생으로 있으면서 1623년의 인조반정에 아버지와 형과 함께 참여하여 공을 세우고,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반정 뒤 6품직을 제수받았고,내자시주부(內資寺主簿:내자시는  궁중에서 쓰는 여러 식품인 국수.쌀.술.간장.기름.꿀.채소.과일 등과 직조(織造) 및 내연(內宴) 등을 맡은 관아의 6품).사헌부감찰(監察:백관을 규찰하던 정6품검사).사직서령(社稷署令:조선때 사직단(社稷壇)을 관리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의 정6품)등을 지낸 뒤 외직으로 나가 충주목사(牧使:정3품수령)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1663년(현종4)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왕명을 출납하던 중추부의 종2품)가 되었다. 동지중추부사는 수계(受繼:조상의 업적이나 유산을 물려받아 이어나가는것)로 받았다.

그는 부임하는 곳마다 선정하여 명관이라는 평을 들었으며 순창. 능주 등지에 선정비가 세워졌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과 글씨에 뛰어난 재간을 발휘하였으며 오언시를 특히 잘 지었다고 한다.

충남토성및입향성씨13연안리씨 5

                      <사우당 리시담묘-국립대전현충원 장군 제1묘역 우측 상단>

그의 묘소는 대전 유성구 갑동 국립대전현충원내 제1장군묘역 우측 상단에 있고,묘역 하단에는 당시 의정부 좌참찬(정2품)이던 동춘당 송준길(1606~1672)이 찬하고,대광보국숭록대부(정1품품계)로 의정부 좌의정(정1품정승)으로 치사하고 봉조하(奉朝賀,전직 관원을 예우하여 종2품의 관원이 퇴직한 뒤에 특별히 내린 벼슬)에 오른 송근수(1818~1902년)가 글씨를 썼으며,10대손 리병서가 전(篆)한 신도비(神道碑,숭정 신축 5월(1661년)에 세움)가 있다. 최근(2010년)에는 국립대전현충원에서 등산로를 만들면서 길 옆에 노출되어 쉽게 찾을 수 있다.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당시는 공주 갑촌 甲村)이 리시담 선조가 받은 사패지(牌地:나라에서 공신에게 왕이 내려준 논밭)인 관계로 이 곳에서 십여세대를 거치면서 세거 하였는데,이곳이 1970년대 박정희대통령에 의해 국립묘지로 지정되고 1985년 국립묘지가 완공되어 인근에 있는 연리묘역들은 현재 논산시 죽림리로 대부분 이장하였다.

시조와 후손 리시담의 묘는 연안리씨종친(당시 청와대 행정처장 등)들이 당시 박정희대통령에게 건의하여 이장을 면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관들의 말에 의하면  국립대전현충원은 남한에 있는 가장 좋은 명당자리 중 한곳이라고 한다. 그의 장손 리명저는 사마시에 합격을 하였으나, 대과(大科:문과)에는 합격하지 못하고 음직(蔭職:과거를 거치지 않고 조상의 혜택으로 얻던 관직官職)으로 영동현감(縣監:종6품수령)을 지냈다.

                                              연안리씨(延安李氏)

                          8명의 대제학과 청백리 7명, 8 정문(旌門)

                연리광김(延李光金:연안리씨(延安李氏)와 광산김씨)이라 하여

                         양반가문중에서도 첫째로 꼽힌 문벌(門閥)

 

<연안리씨로 표기하는 이유>

연안리씨는 1947년 조선어 맞춤법 통일안을 재수정할때 한국에서는 두음법칙을 신설하여 두음에 나오는 ㄹ은 ㅇ이나(라-이)ㄴ으로(로-노) 바뀐다고 정하였다. 두음법칙이 없는 북한은  리로 쓰고 남한에서는 이로 쓰게 되었다. 수천년 동안 이어져 온 성씨까지 두음법칙에 적용하는것은 잘못이라고 보며, 1947년 이전의 사람들은 리로 썼고, 더구나 연안리씨는 중국계 리씨 이므로 중국에서 표기하는대로 한자표기는 李, 로마자 표기는 Li, 그리고 한글표기는 리로 쓰는것이 맞다며 리로 표기하고 있다.<편집자주>

연안리씨(延安李氏)는 리무(李茂)를 시조로 받든다.

시조 리무(李茂)는 신라가 백제를 평정하던 서기 660년(신라 무열왕 7년)나.당 연합군의 당나라 장군 소정방(蘇定方)과 함께 원군으로 신라에 들어온 중랑장(中郞將:고려때는 정5품무관)이었다.

리무(李茂)는 전쟁이 끝난후 당나라에 돌아가지않고 신라에 귀화하였다고 한다.

이에 신라 조정에서는 통일신라에 기여한 그의 무공(武功)을 높이사 연안백(延安伯)으로 봉(封)하고후에 연안후(延安侯)에 가봉(加封)되었다.

연안리씨 족보와 문헌에 따르면 시조 리 무(李茂)는 서기 660년( 당나라 고종. 현경 顯慶)5년에 신라 원군(援軍)의 장수(將帥)로 참전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하는데 공을 세워 중랑장(中郞將:고려때는 정5품)에 오르고, 시염성(豉鹽城:황해도 연안의 고구려때 이름)을 유수(留守:지방장관으로 2품) 하였다고 한다.

그후 라.당의 화합과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하는데 기여한 공(功)으로 김유신(金庾信)장군의 주청(奏請,왕에게 상주하여 청함)에 의하여 문무왕(文武王)이 리무(李茂)장군에게 시염성(豉鹽城:연안)을 식읍(食邑:나라에 공이 많은 사람에게 그 곳의 조세를 개인이 받아쓰게 한 고을)으로 주고 높은 벼슬을 제의했으나,극구 사양하여 국빈(國賓)으로 예우(禮遇)했다고 한다.

리무는 중국 5호16국(五胡十六國)시대 서량(西凉)을 세운 무소왕(武昭王:리호李暠)의 후손으로서 서기 660년 당 고종(高宗)현경5년 소정방(蘇定方)과 함께 신라원군의 장수로 참전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하는데 공(功)을 세워 중랑장(中郞將:정5품)에 오르고 나당화합과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백제를 정복한후 소정방(蘇定方)이 백제전(百濟戰)의 승세를 몰아 신라까지 정벌할 욕심으로 여러 장수들과 논의 하였는데,리무는 신라 군사가 막강하고 고구려가 건재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신라와의 연합이 당의 국익(國益)이라는 판단으로 소정방(蘇定方)을 설득하여 먼저 당라(唐羅)간에 무술시합을 해본후에 결정 하는것이 옳겠다고 건의하여, 망해정(望海亭)에서 궁술(弓術)을 시합하고 신라에 이기자 소정방(蘇定方)이 탄복하면서 "리무(李茂)장군의 건의가 없었다면 대사(大事)를 크게 낭패할뻔 하였다" 고 계획을 변경했다고 한다.

그는 라당군(羅唐軍)의 위험한 대치상황을 무술시합으로 유도하는 기지(機智)를 발휘,나당간의 화합을 굳히는 계기로 만들었으며,신라인들 한테는 크나큰 은인(恩人)으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나라 유인원(劉仁願)과 함께 정복한 백제땅에 머물러 지키다가 서기 668년 나당연합군은 고구려를 정복하고 시조 리무는 당이 고구려 땅에 설치한 9 도호부(都護府)의 하나인 시염성을 유수(留守:고려때는 동경.서경.남경에 두어 수도이외의 요직을 다스리던 2품지방장관)하였다.

그 당시 당나라에서는 측천무후(則天武后,624~705년 12월16일,성은 무(武),이름은 조(曌),시호(諡號)는 측천순성황후(則天順聖皇后)가 섭정하면서 국정(國政)이 혼란하자, 리무(李茂)장군은 본국인 당나라로 귀국하지 않고 신라에 귀화하여 오늘날 연안리씨(延安李氏)의 시조로 받들어지고 있다.

측천무후(則天武后,624~705년 12월16일,성은 무(武), 이름은 조(曌), 시호(諡號)는 측천순성황후(則天順聖皇后)는중국에서 여성으로 유일하게 황제가 되었던 인물로 무후(武后), 무측천(武則天), 측천후(則天后), 측천제(則天帝), 측천여제(則天女帝), 측천여황(則天女皇) 등으로도 불린다. 측천무후(則天武后)라는 호칭은 당 고종(高宗)의 황후(皇后)로서의 지위를 나타내지만, 690년 당의 국호를 주(周)로 고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15년 동안 중국을 통치했다. 그는 빼어난 미모로 14살 때 제2대 태종의 후궁이 되었고,태종이 죽자 비구니가 되었다가 다시 고종의 눈에 들어 후궁이 되었다.그 후 황후를 쫓아내고 황후가 되어 황태자 충(忠)을 폐위시켰다. 683년 고종의 건강을 핑계삼아 스스로 정무를 관장,독재권력을 휘두르며 천후(天后)라 칭하였다. 고종이 죽자 자신의 아들 중종(中宗).예종(叡宗)을 차례로 즉위시키고 황족을 탄압하였으며 690년 혁명을 단행하여 국호를 주(周)로 고치고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올랐다.

우리나라는 사실상 고려때부터 성씨(姓氏)의 본관이 사용됨에 따라 후손들이 시조(始祖)의 식읍(食邑)이었던 염주(鹽州:시염성의 고려때 명칭)를 관향(貫鄕)으로 삼아 염주리씨(鹽州李氏)로 하였다가, 충선왕때 연안(延安)으로 지명이 개칭됨으로 연안리씨(延安李氏)로 바뀌었다. 그러나 신라시대의 선조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아 각파(派)의 중시조를 1세조로 받들고 있다.

후손들이 시조가 식읍(食邑:공신에게 내리어 그곳의 조세를 개인이 받아쓰게 하던 고을)으로 하사 받은 연안(延安)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시조(始祖)이후 약 500여년간 나라가 바뀌고 수 많은 전쟁과 재해 등으로 문헌(文獻)이 실전(失傳:묘지나 고적등이 대대로 이어온 사실을 알수없게 됨)되어 여러대(代)의 선계(先系)를 잃게 되었다.

연안리씨는 기록에는 여러파가 있으나 현재는 소부감판사공파(少府監判事公派).태사첨사공파(太子詹事公派).대장군공파(大將軍公派).통례문부사공파(通禮門副使公派)등 4파(派)만전해져오며 각 파(派)간에 세대(世代)구분을 알 수 없어 항렬자는 따로 사용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명문가(名門家)라고 하면 연리광김(延李光金:연안리씨(延安李氏)와 광산김씨光山金氏)이라 하여 양반가문(兩班家門)중에서도 첫째로 꼽힌 문벌(門閥)이다.

현재도 각계 각층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고 있다.

또 연안리씨(延安李氏) 첨사공파(詹事公派)에서 분적(分籍)해 나갔다고 하는 안산리씨(安山李氏) 리인수(李仁守)계통이 있다.

연안리씨는 고려조에 태자첨사(太子詹事:고려때 동궁과 첨사부에 딸렸던 정3품)를 지낸 리습홍(李襲洪),판소부감(判少府監:고려때 궁중의 공예품과 보물의 보관에 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의 벼슬로 소부시로 고침)에 오른 리현여(李賢呂),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통례문은 조회.의례 등의 예식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를 지낸 리지(李漬)와 대장군(大將軍:종3품 무관)에 오른 리 송(李松)등은 연안리씨의 4대 산맥이다.

이들의 후손이 번성하여 오늘날 연안리씨(延安李氏)의 주류를 이룬다.

연안리씨는 조선시대에 총 250명의 문과(文科:대과) 급제자와 8명의 상신(相臣:정1품 정승), 8명의 대제학(大提學:홍문관.예문관의 정2품 문형)과 청백리(淸白吏:관직 수행 능력과 청렴(淸廉).근검(勤儉).경효(敬孝).도덕.인의(仁義)등의 덕목을 겸비한 조선시대의 이상적인 관료상으로 의정부에서 뽑은 관직자에게 주어진 호칭이며,총 217명이 선발됨) 7명을 배출하여 조선시대에 연안리씨는 명문(名門)으로 큰 위세를 떨쳤다.

조선후기 영조와 순조 때에는 부자(父子)대제학(大提學:홍문관.예문관 정2품문형),3대(代)대제학(大提學)을 배출하여 더욱 명성을 날렸으며, 아울러 연안리씨는 효자 리지남(李至男)부터 아들, 손자,며느리 8명이 효부,열녀로 정문(旌門)을 받아 8정문(八旌門) 문중으로 유명하다.

연안리씨가 자랑하는 리호민(李好閔)은 외교의 명수이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이조좌랑(吏曺佐郞:문관의 천거를 담당하던 요직이었던 이조의 정6품 전랑)으로 명나라의 원병을 끌어들이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그는 그 후 부제학(副提學:경서와 사적의 관리, 문한의 처리 및 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인 홍문관의 정3품)에 올라 대명외교문서를 도맡아 기초하는 등 탁월한 외교 솜씨를 발휘했다. 전란이 끝난후 대제학(大提學:홍문관.예문관의 정2품 문형)에 이르렀으며 예조판서(禮曹判書:정2품 장관)를 거쳐 좌찬성(左贊成:의정부의 종1품)에 올랐다.

리귀(李貴)는 학자의 가문인 연안리씨(延安李氏)가문을 명실공히 명문의 위치에 올려놓은 인물이었다. 리 귀는 선조 36년에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하고 여러벼슬을 거쳐 평산부사(平山府使:정3품 수령)로 있다가 광해군의 폭정을 개탄하고 사직했다.

서기1623년 인조반정을 주동하여 인조를 옹립하는데 공을 세워 일등공신에 책록되고 대사헌(大司憲:백관을 규찰하고 풍속을 바로잡던 사헌부의 종2품 검찰총장)을 거쳐 좌찬성(左贊成:의정부의 종1품 재신)에 오르고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에 봉해졌다. 

충남 공주시 이인면 만수리에는 연평부원군 리귀(李貴,1557~1633,자는 옥여,호는 묵재,시호는 충정)의 묘가 있다. 이곳 계성산에는 조선 중기 연평부원군 리귀와 아들 연양부원군 리시백(李時白,1581~1660,호는 조암,시호 충익),사우당 리시담(李時聃), 연성군 리시방(李時昉)을 제향하던 성봉서사가 함께 있었으나 현재 유허만 남아 있다.리시백은 일곱 번이나 판서(정2품장관)를 역임했고 영의정(정1품정승)에까지 올랐으나, 청빈해 빈한한 선비집 같았다 한다. 장유(張維).최명길(崔鳴吉).조익(趙翼)과 교유하였다.

연안리씨는 벌열(閥閱:나라에 공이많고 벼슬 경력이 많은 벌족)의 가문으로 후손들이 현달(顯達:벼슬이나 덕망이 높아서 이름을 세상에 들날림.입신출세)하였다.

연안리씨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대과)에 250명, 무과(武科:무관을 뽑기 위하여 보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에 26명, 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시험)에 620명, 음양과(陰陽科:천문.지리. 명과학(命課學)에 밝은 사람을 뽑던 과거)에 1명 등 897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연안(延安)은 황해도 연백군(延白郡) 일원의 옛 지명으로, 고구려때는 고염성(鼓鹽城), 신라시대에는 해고군(海皐郡)이었다. 고려때는 염주(鹽州).영응현(永膺縣).복주(復州).석주(碩州).온주(溫州)등으로 고쳐 불렀다. 1310년(충선왕2)에 연안(延安)으로 고쳤으며,1413년(태종13)에 연안도호부가 되었고 1895년(고종32)지방제도 개정으로 연안군(延安郡)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연안군은 다시 배천군(白川郡)과 합하여 연백군이 되었다.

인구조사에서 연안리씨(延安李氏)는 1985년에는 30,274가구 126,569명이었으며,2000년에는 총 44,799가구에 145,440명이었다. 

<연안리씨 근.현대 인물>

리동녕(李東寧,호 석오石吾 1864~1940)은 천안시 목천읍 동리에서 출생한 독립운동가로 임시정부 초대의정원 의장.주석을 지냈다. 리동녕은 1894년 25세에 결혼하여 다음해 큰아들 리의직을 낳았다. 리의직은 석오가 세운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부임하던 중인 1915년 사망했고,둘째 아들 리의식(1900~?) 등은 한국으로 돌아왔다. 리의식은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를 1회로 졸업하고 서울에서 개원했다. 해방 후 미군정 민주의원에 뽑혔으며 반민특위 감찰관을 역임하다 6.25 때 납북됐다. 그는 리철희와 리석희 두 아들을 뒀다. 리철희씨는 미 샌프란시스코대학을 졸업하고 해방 후 귀국한다. 경무대 대통령비서관, 문교부 편수국장, 국사편찬위원회 사무국장, 서울교대 학장 등을 지냈다. 리석희는 경기고.서울법대를 졸업하고 대우개발 사장, 대우그룹 부회장, 대우증권 회장, 대우통신 회장을 역임하고 은퇴했다. 현재 광복회 부회장, 리동녕선생기념사업회 부회장으로 있다.

석오의 증손자인 리용순은 서울대 정치학과를 나와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 국제부 차장을 지냈다. 리용석(46)은 조지워싱턴대를 졸업하고 국내에서 사업 활동 중이다. 리동녕(李東寧,1869~1940년)의 친필 산류천석(山溜穿石) 즉, 산에서 흐르는 물이 바위를 뚫듯 조국광복도 꼭 이뤄진다라는 뜻으로 지금도 전해진다.

리도영(李道榮:호 관재(貫齋,1884~1933)서화가.예서 행서에 능함),리병기(李秉岐,호 가람)-국문학자.시조 작가,리원순(李元淳,독립운동가 경제인)-부인 리매리여사국회의원,리중재(李重宰)-재무부장관, 리정림(李庭林)-홍익대설립자.경제인 연합회회장, 리연(李然)-동원탄좌 회장, 리숭녕(李崇寧)-국문학자,리항녕(李恒寧)-법학자,리재후(서울고.서울법대졸업.법조계최고의파워집단 김&장대표변호사,리항녕아들).리재창교수(리항녕아들 고려대명예교수 국제통계기구회장),리지호-지리학자,리봉녕(李奉寧)-쌍방울회장,리웅희(李雄熙)-문화공보부장관,리치호(전국회의원),리돈희(전교육부장관),리장녕(독립군참모장,건국훈장추서),리상수(전서울대물리과교수,과학대통령상수상)와 리복이(李福伊) 전국문중협의회 회장과 이윤훈 전국문중협의회 사무총장 등이 가문을 빛내고 있다.

 

김진우님의 다른 기사 보기

[김진우님의 SNS]
댓글 작성 폼

댓글작성

충남넷 카카오톡 네이버

* 충청남도 홈페이지 또는 SNS사이트에 로그인 후 작성이 가능합니다.

불건전 댓글에 대해서 사전통보없이 관리자에 의해 삭제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