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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충남 토성(土姓) 및 입향성씨-(9)경주김씨(慶州金氏)

김진우의 성씨(姓氏) 이야기

2012.01.02(월) | 김진우 (이메일주소:sewoora@naver.com
               	sewoora@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공주 계룡면 월곡리 밀머리 고개(구암리 유왕골 경계)가 마음의 고향,논산 강경읍,익산 등지 세거지

경주김씨(慶州金氏)는 신라 왕족 3성씨(박.석(昔).김)가운데 하나로 한국의 대표 삼한갑족(三韓甲族,옛날 부터 대대로 문벌이 높은 가문)으로 불린다.

경주김씨인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와 역시 경주김씨인 승일연(김견명)이 지은 삼국유사에 의하면,시조 알지(閼智)는 영평3년(서기60,탈해왕4) 8월4일에 호공이 월성의 서리(西里)를 걷고 있을때, 큰 빛이 시림속에서 나오는데 자주색 구름이 하늘에서 땅으로 뻗쳐있었고,그 구름속에는 황금궤가 나뭇가지에 걸려있었다. 금궤에서 빛이 나오고 나무 밑에서는 흰 닭이 울고 있었다.보고를 받은 탈해왕은 친히 숲으로 행차하여 궤를 열어 보았더니, 사내아이가 누워있다가 곧 일어났다. 왕은 사내아이를 안고 대궐로 들어오니, 새와 짐승들이 따라와 춤추고 뛰놀았다고 한다. 시림의 금궤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金)으로 하였고, 우리말 '아기'라는 뜻의 "알지"라고 이름 하였다. 왕은 "하늘이 내리신 아들"이라 하여 훌륭히 키웠다.

알지는 태자에 책봉되어 왕위에 추대되었으나, 끝내 사양하고 파사대왕에게 양보하였으며, 알지의 6세손인 미추왕을 시작으로,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알지의 28세손)이 서기 935년 천년사직인 신라를 고려에 손국할때까지, 38대왕을 상계하여 선원세계(璿源世系)를 계승했다.천년사직의 가문인 만큼 경주김씨는 그 파계가 복잡하다. 

  충남토성및입향성씨9경주김씨 1  

                제숙공 김균(金稛,1341~1398,시호 제숙)의 묘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능평리 산 89-1(경기도 기념물 제105호)

경주김씨 충남지역 주요세거지와 변천과정에 대해 <계림군파 갑자보>에 의하면, 계림군파(鷄林君派)의 경우 파조(派祖)인 좌찬성(左贊成;의정부 종1품) 김균(金稛,1341~1398,시호 제숙)의 아들 김계성 대(代)부터 경기 고양시 벽제읍에 대대로 세거해왔다.

일부가 5세 김홍령 대(代)이후로 수원시 일원으로 옮겨 갔고 일부는 김귀령의 대 이후 평택시에 터를 잡았으며, 김학령의 대를 전후 하여 용인시에 세거했다. 김승련은 연산군조 무오사화때 평남 가산에 세거를 시작하였고 김영수 대(代) 이후는 홍주에 터를 잡았다. 6세 김억수 대(代) 이후 안성시에, 김연수의 대 이후로는 충남 서산시 대산면 일원에, 김수정 대(代) 이후는 충남 청양군에 터를 잡았다.

  김봉수는 임진왜란당시 충남 해미로 이거하였으며, 7세 김방.김역 형제는 임진왜란시 경북 상주 낙동면과 중동면에 이거하여 세거하였다. 7세 김경원 대(代) 이후 연기군 전의면 일원, 김후원 대(代)부터는 충북 진천군 월촌면 일원, 김충원 대(代)부터는 과천, 김감의 대부터는 강원 양양군 토성면 일원으로 옮겨갔다. 7세 김구 대(代)부터 충남 공주(公州)에, 김철원 대부터 청주에,김인원 대부터 결성에 터를 잡았고, 김육원은 병자호란이후 상주로 이거하였는데, 지금의 문경시 삼남면 일원에서 세거하였다. 8세 김의진 대(代) 이후는 양주군 화도면 일원에 터를 잡았고, 김수성 이후 청원군에, 김수겸 이후 홍천군에 옮겨갔다. 김수준의 대 이후 보령시 웅천면에 이거했으며, 임진왜란때 김수안. 김수향 형제는 서산시 고북면으로 김기성은 평양으로 옮겨갔다.1900년대 이후 계림군파 방계 후손들은 현재의 논산시 일원에 산거하였다.

김민찬(金敏讚)은 조선 후기 영조때 공주시 우성면 내산리 뜸밭에서 성장하여,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왕명을 출납하고 궁중의 숙위를 맡아보던 중추부의 정3품 당상관)에 올라 유명했는데, 그는 계림군(鷄林君) 김균(金稛,1341~1398,시호 제숙)후손으로 첨추공파(僉樞公派,계림군 20세 김학성이 첨추공파 세계(世系)만들고 19세 김철식이 파보 서문 씀)의 파조(派祖)이다. 파조 김민찬의 묘는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내산리 뜸밭에 있다.

  파조(派祖) 김민찬의 아들로 조선 영조때 봉산군수(郡守;종4품수령)를 지내고, 동북면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각 도의 병마를 지휘하던 무관의 종2품)에 오른 김경호(묘는 공주시 계룡면 기산리)와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백관을 규찰하고 풍속을 바로잡던 정6품 검사)을 지낸 통훈대부(通訓大夫:정3품 당하관 품계)김최호(金最豪:묘는 논산시 노성면 구암리 유왕골 비룡산)형제가 가문을 빛냈는데, 김경호와 김최호 후손들은 공주시 계룡면 월곡리 속칭 밀머리(구암리 유왕골 경계), 논산시 노성면 구암리,논산시 강경읍,청주시, 익산시, 대전시 등지에 산거하고 있다.계룡면 월곡리 밀머리고개(구암리유왕골)에 살면서 참봉(參奉,종9품)을 지낸 김헌식(金憲植)과 김헌식의 큰아들로  노성면 구암리에서 구장(區長:리장)일을 보며 서당(書堂)을 열고 후학을 길러낸 김학성(金學聖)은  유학자로 명성을 떨쳤다.그는 특히 계림군 후 <첨추공파>의 파보(派譜)를 만들었다. 

감찰공 김최호의 아들 김정기(金正基,배위는 해주오씨.전주최씨)와 김정기의 아들 김필상(金弼商,배위는 한산이씨),김필상의 아들 김봉원(金鳳遠,배위 전주이씨),김봉원의 아들 김성태(金星泰,배위 경주이씨.전주이씨),김성태의 아들 김낙소(金樂韶,배위 공인(恭人) 연산서씨)는 정5품 통덕랑(通德郞)에 올랐으며,아들 김헌식(金憲植,배위 해주오씨)는 장사랑(문관 종9품 품계)으로 참봉(參奉,종9품벼슬)을 지냈다.참봉공의 아들 김학성(金學聖)이 구암리에서 서당을 열고 후학을 양성한 유학자로 유명하였다.이들 계림군후 감찰공및 후손 묘역은 1999년 12월 밀머리고개 양지바른곳에 <감찰공후손 공원묘역>으로 다시 조성되어있으며,감찰공 9대 종손 김재규(金宰圭,창길)가 관리하고 있다. 

  충남토성및입향성씨9경주김씨 2  
계룡산이 펼쳐진 전체의 모습을 볼 수 있는곳,계룡면 월곡리 밀머리고개 정상에 경주김씨 계림군파 후손 감찰(監察,정6품검사)공(公) 김최호와 후손들의 묘역이 있다.이곳 밀머리에 살던 김붕원이 전북 익산으로 이주하였다.좌측 비석군(群)은 밀머리고개 정상에 있는 아우 김봉원의 후손 묘역이다.(2012년1월2일촬영)

 공주시 계룡면 월곡리에서 거주하다 익산으로 이거한 김붕원의 5세손 김현기(金顯基,1929∼1979,계림군파 21세)는 익산출생으로 3선 국회의원(신민당)을 지내다 지병으로 사망하였다.(하단 참조) 계림군 후 <첨추공파보> 서문을 쓴 김철식(金澈植)과 20대 손으로 파보(派譜)의 발문(跋文,책의 끝에 본문 내용의 대강(大綱)이나 간행 경위에 관한 사항을 적은글)을 쓴 김학중(金學中),노성중학교교장,한밭상고교장, 대전시교육장과 충남고교장을 역임한 김학종,청주 중앙치과의원원장,공주의 효자로 유명한 탄천면 장선리 장마루 출신의 김상규, 노성 궐리사의 전사관를 지낸 김최호 9대종손 한학자 김재규(金宰圭,김창길),대전MBC주부가요열창의 음악담당으로 활동했으며 가수 이동원과 함께 재미동포를 위한 위안공연을 해온 가수 김진권,(주)대우 기조실에서의 근무를 거쳐 산업디자인분야에서 활약중인 김진흥(충식),비룡산 유왕골에서 농업경영인으로 친환경영농(營農)에 열중인 김진민, 공주고와 공주사대를 졸업하고 고교교사로 후학을 양성하고 있는 김세원 등이 감찰공 김최호의 후손들이다.

 또한 부총리를 지낸 김준성,9년동안 최장수 박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렴(1924~ )현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회장, 재무부장관으로 “부가가치세를 처음 도입”했으며 국회의원으로 자민련 수석부총재를 거쳐 한나라당 상임고문으로 있는 상촌공파 김용환, 충암 김정의 후예로 목원대 김응철 교수,그리고 경기도지사 김문수, 전국회의원 김경재, 김학원(부여출신으로 판사.국회의원.자민련대표.한나라당 고문,2011년 사망), 김창수(조선일보 초대노조위원장.국회의원.대전)와 13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홍만,김현(효성학원), 우송대학교 총장을 지내고 현재 이사장을 맡고 있는 김성경박사,금성건설(주)김주일회장(김회장은 대한건설협회충남도회장, 한국자유총연맹대전지회장, 대전상공회의소회장 등 활발한 사회활동으로 지역경제 활성화에 노력해온 점을 높이 평가받아 2010년석탑산업훈장수훈)등이 경주김씨 각 파(派)의 충청권 후예들이다.

 충남 공주시 계룡면 월곡리 등지에 세거하던 계림군 김균의 후손으로 전라북도 익산(益山)지역에 세거하는 경주김씨는 김학순(金學純,1876∼1949)이 있다.그는 근대의 한학자로 익산 팔봉면 출신이다.호는 후송(後松)이며,문집으로 후송유고(後松遺稿)필사본 1책이 전한다. 내용은 시.서.서.잡저이다.

 또 김한규(金翰圭, 1891∼1981)는 교육자, 서예가로 호는 하정(荷汀),전주출생이나 익산시에서 오래 살았다. 김용태(金溶泰)의 아들이며 17세까지 한문학을 배웠다. 1920년 익산군 북일면에서 북신서당(北新書堂)을 세워 교육에 힘쓰다가 다음 해 서당을 사립 계문학교(啓文學校)로 승격시켜 초대교장으로 취임했다. 1948년 이원용과 함께 이리동명중학교(현재 이리중)를 세워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51년에는 유지들과 더불어 북창교회 내에 대성학원(大成學院)을 설립하여 교장으로 취임했다. 그 해 이리 농과대학(현 전북대 농과대학)설립위원회 회장직도 맡았다. 한문과 서예에 능하여 다섯 차례나 서예전을 가졌다. 저서에 하정설교집(荷汀說敎集)이 있다.

  김현기(金顯基,1929∼1979,계림군파 21세)는 김붕원(金鵬遠,공주시 계룡면 월곡리 밀머리 출생 익산으로 이거,김붕원의 아우 김봉원(金鳳遠) 5세손으로 밀머리 고개인 구암리 유왕골 거주 김재규(창길) 증언)의 후손으로 3선 국회의원을 지냈는데 의정활동에 크게 두각을 나타낸 정치인이나 아깝게 지병으로 사망했다. 김현기 전의원은 익산시 팔봉면 출신이며 서울대 상과대학을 졸업하고 이리농림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1967년 6월 8일 제 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전국구 19번으로 추천을 받아 처음에는 당선권에서 벗어났으나 앞 순위인 김도연(金度演)후보의 돌연한 사망으로 인해 결국 원내에 진출하게 되었다. 1971년 5월 1일에 실시한 제 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당선되었다. 1972년 국회를 해산하고 유신헌법에 따라 1973년 2월 27일에 제4공화국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으며, 1978년 12월 12일에 실시한 제 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4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원내 체신분과위원장 등을 역임했고 특히 재정경제 분야의 의정활동에 두각을 나타냈다.

 계림군파 후손들은 논산읍 일원,공주시 탄천면 장마루,노성면 장마루 인근 속칭 발룡,노성면 구암리 구야에서 서당을 열고 후학을 가르치던 김세기(金世基) 후손들이 2012년 현재도 거주하고 있으며,계림군파의 방계후손 김영기.김병기.김문기.김학윤.김학철 후손들도 구암리에 거주하고 있다. 

  충남토성및입향성씨9경주김씨 3  

                                     <계림군후 첨추공파 감찰공 후손묘역>

공주시 계룡면 월곡리와 논산시 노성면 구암리 접경지 "밀머리고개"감찰공 후손묘역

 대전시 동구에는 경주김씨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판도판서는 호부상서로 고치기 전의 정3품 장관) 파조인 김장유가 고려말에 나라가 혼란해지자, 충청북도 보은에 은둔하여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김장유의 후손에서는 정랑(正郞:정5품) 김효정의 아들 김정(金淨:호 충암)이 중종때의 명신으로 유명하다.

그는 조광조와 함께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실현하기 위해 혁신정치를 시도하다가,기묘사화(己卯士禍:1519년(중종 14)에 남곤.심정 등의 수구파가 조광조.김정 등의 신진 도학자들을 죽이거나 귀양보낸 사화)가 일어나 서른여섯의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그는 기묘명현으로 일컬어졌다. 그에 대한 일화가 "당적보(黨籍譜)"에 다음과 같이 전 한다.

  충암 김정이 증광문과(增廣文科:나라에 경사가 있을때 기념으로 보이던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고,정언(正言:사간원의 정6품)을 거쳐 순창군수(郡守:종4품수령)로 나가있을 때 옛 글벗인 승정원 승지(承旨:승정원의 정3품) 이항이 청탁편지를 부쳐왔다.

  그 편지는 직함을 갖추어 쓰고 도장을찍었으며 우정있는 말은 하나도 없고 마치 높은 자리에서 하명하는 듯 한 말투였다.이에 김정은 거절의 뜻을 밝히고 아래와 같은 시를 써넣었다고 한다. 

"서당에서 같이 배우고 옥당에서 같이 있다가 남녘 시골로 흘러내린 병든 이 한몸이라 천상에서 화려한 직함인 승지 이씨여,편지쓸 즈음에 옛벗을 생각이나 해 봤는가".

  이 시(詩)에 앙심을 품은 이 항은 후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김정의 죄를 추론하는데 앞장섰다 한다.

  충암 김정은 제주로 귀양 가다가 해남의 바닷가 노송 아래서 회포를 달래며 소나무껍질을 벗기고 적은 시가 전하며 36세로 사약을 받을 때 남긴 절명사(絶命詞)가 유명하다.

  충암 김정(1486~1520,자는 원충.호는 충암.고봉)은 중종2년(1507)에 문과(文科:대과)에 장원급제하고, 부제학(副提學:홍문관의 정3품),도승지(都承旨:승정원의 정3품 왕의 비서실장)를 거쳐, 성균관대사성(大司成:정3품)과 예문관제학(藝文館 提學:예문관은 칙령과 교명을 기록하던 관청,제학은 종2품)을 지냈다.

  정암 조광조등과 함께, 미신타파와 향약의 전국 시행을 위해서도 힘썼으나,지치주의를 위한 혁신정치를 시도하다가, 기묘사화로 사사되었다.그를 기리는 사우가 대청댐 주변에 불천위(不遷位:나라에 큰 공훈이 있거나 도덕성과 학문이 높으신 분에 대해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사당(祠堂)에 영구히 두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허락된 신위(神位)를 말함.부조위)로 모셔져 있다.충암 김정 묘소는 대전시 동구 신하동 268-5번지에있으며 대전시 문화재자료 제25호로 지정되었다.

  김정은 기묘사화 때 극형에 처해지게 되었으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등의 옹호로 금산(錦山)에 유배되었다가, 진도를 거쳐 다시 제주도로 옮겨졌다. 그 뒤 신사무옥에 연루되어 사림파의 주축인 생존자 6인과 함께 다시 중죄에 처해져 사사되었다. 1545년(인종 1) 복관되었고, 1646년(인조 24)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대전시 대덕구 동면 내탑리에 있던 건물과 묘소를 1978년에 동구 신하동으로 옮겼다.건물 안에는 인조 19년(1641)에 세운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우던 비)와 위패가 모셔져 있는 사당이 있다.충암(冲菴)은 보은 출신이며 김호(金滸)의 증손으로,할아버지는 김처용(金處庸)이고,아버지는 호조정랑 김효정(金孝貞)이며,어머니는 김해 허씨(金海許氏)로 판관(判官:종5품) 허윤공(許尹恭)의 딸이다.

  충암은 3세에 할머니 황씨에게 수학하기 시작했고 20세 이후에는 최수성(崔壽峸)·구수복(具壽福) 등과 성리학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리하여 관료 생활을 하면서도 성리학에 대한 학문 정진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또한, 시문에도 능했으며 새·짐승 등의 그림도 잘 그렸다.

  일찍이 사림 세력을 중앙 정계에 추천했고, 조광조의 정치적 성장을 뒤에서 도왔다. 그 뒤 조광조와 함께 사림파의 대표적인 존재로서,그들의 세력 기반을 굳히기 위해 현량과(賢良科)의 설치를 적극 주장하기도 하였다.또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개혁 정치를 폈는데, 그 일환으로 미신 타파와 향약의 실시, 정국공신의 위훈삭제(僞勳削除) 등을 추진하였다.

  제자로는 김봉상(金鳳祥).김고(金顧).최여주(崔汝舟) 외에 조카인 천부(天富).천우(天宇) 등이 있다. 보은의 상현서원(象賢書院),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제주의 귤림서원(橘林書院),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충암집>이 있는데, 여기에 실린 <제주풍토록>은 그가 기묘사화로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 견문한 제주도의 풍토기이다. 시호는 처음에는 문정(文貞)이고, 나중에 문간(文簡)으로 고쳐졌다. <대전시 향토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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