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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충남 토성(土姓)및 입향성씨 -(5)성주도씨(星州都氏)

김진우의 성씨(姓氏)이야기

2011.12.26(월) | 김진우 (이메일주소:sewoora@naver.com
               	sewoora@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성주도씨 집성촌 논산시 연산면 관동리는 성주도씨 8세손 도사면(都思勉)이 고성이씨 입향조인 이민의 사위가 되면서 홍주에서 연산으로 입향하였다. 도사면은 두문동 72현 도응(都膺)의 아들이다. 도사면의 아들 도경손(都慶孫)은 화악리 여산송씨 사위가 되어 여산송씨정가공파 집성촌인 화악리와 가까운 관동리로 이주하였고,이 후 두마면 농소리와 벌곡면 대덕리.신양리, 상월면 한천리에 세거하게 되었다. 도응의 자손 가운데 도진민(都振民,자는 여호)이 사계 김장생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연산 지역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공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1591년(선조 24)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충북 옥천에서 중봉(重峯) 조헌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도군민.도호민.도우민  등 형제와 다른 종형제들이 뜻을 모아 규합한 백여 명의 향병을 이끌고 조헌의 휘하로 들어갔다.(출처 논산문화대전)

1592년 8월 2일 청주에서 왜적을 무찌르고 청주성을 수복하였으나,  금산의  눈벌전투에서 처절하게 싸우다 종형제 9명과 백여 명의 향병들은 전사하였다. 이 때 왜군의 조총을 맞고 중상을 입은 동생 도우민 과 함께 호남순무사 권율 의 휘하로 들어가 호남과 호서의 요충지인 대둔산 근방의 금산 이치(梨峙)고개에 주둔중인 왜군을 격파다고 한다. 도진민은  당시의 전공을 인정받아 통훈대부(정3품당하관품계)로 장악원정(정3품)에 추증되었으며, 선무원종공신 2등에 올라 진위장군(振威將軍,정4품품계) 훈련원정(訓鍊院正,정3품) 이 되었다. 또한 가선대부(종2품품계)로 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총관(종2품)에 추증되었다.

성주도씨는 현재 논산시 연산면 관동리에 집성촌을 이뤄 약 50여호가 살고 있다. 또한 인근의 논산시 상월면 한천리에도 약 30여 호가 살고 있다.

도사면의 묘가 논산시 연산면 어은리 일은골에 있고, 도응 묘소는 충청남도 예산군 응봉면 지석리 산 141-16번지(기념물 제90호)에 소재한다.

 충남 논산시 연산면 관동리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청송당 도응의 세계(世系)를 보면, 1세조 도순(都順)의 2세 도충박(都忠朴)이 전리상서(尙書:정3품장관)를 역임했고, 공조전서(典書:정3품장관)를 지낸 3세 도유도(都有道:대구파)와 종부판사에 추증되어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진 3세 도유덕(都有德)이 성주도씨의 양대산맥을 이루었다.

도유덕의 장남 도효신(4세)은 <성주파조>가 되고, 차남 도효안(4세), 3남 도효정(4세) 3형제를 두었다. 차남 도효안의 아들 도홍정(都洪正:5세)은 고려말에 도씨를 반석위에 올려놓은 인물로 동양창 판관(判官:5품벼슬)을 거쳐 공민왕때 벽상공신에 책록되고 삼중대광(三重大匡:정1품품계)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종1품 정승)에 이르러 칠곡부원군에 봉해졌다.

그의 차남 도길부(都吉敷:6세)는 우왕때 이성계의 부장으로 충청과 전라도에 침입한 왜구를 황산과 운봉에서 격퇴시켜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정1품품계)로 문하첨의찬성사(贊成事;정2품부총리)에 오르고 성산부원군에 봉해졌으나,1388년(우왕14) 1월에 일어난 이인임의 축출사건에 연루되어 화(禍)를 당했다.

도길부의 아들 도응(都應:7세)은 두문동(杜門洞:개풍 광덕산 마을이름) 72현의 중심인물로 문하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정2품 부총리,1369년(공민왕18)공민왕이 원나라의 지배를 벗어나려는 노력의 하나로 문종 때의 관제로 돌아가면서 첨의찬성사를 고친 명칭)를 지냈으나 기사화변(己巳禍變)으로 아버지가 화를 당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홍주의 노은동(홍성)에 은거했다.

이후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개국하고 왕위에 오른 후 어릴 적 친구인 그에게 대장군(大將軍:종3품)을 두 번 임명하고, 다섯 차례나 벼슬을 내려 불렀으나, 충신은 불사이군(不事二君:한사람이 두임금을 섬기지아니함)이라며 거절했다.이성계는 그의 절의에 감복해 청송당(靑松堂)이라는 호를 내려 치하하고 운천서원과 경양사에서 제향케 했다.

관조 도 순(都順)의 7세 청송당 도응(都應)은 이태조의 명을 거절한 후 후손의 장래를 걱정한 끝에 장남 도사면(都思勉:8세)은 논산시 연산으로, 차남 도사심(都思諶:8세)은 충북 괴산으로, 3남 도사민(都思敏:8세)은 함양으로 4남 도운봉(都雲峯:8세)은 경북 군의로 흩어져 세계(世系)를 잇게 했다.

연산면 관동리에 세거 하게된 도사면(都思勉)은 도경손, 도순손, 도의손, 도진손 4형제를 두었다. 장남 도경손(9세)은 도영하(10세)를, 도영하는 도응서(11세)를, 도응서는도수인(12세), 도수의(12세), 도수예(12세), 도수지(12세), 도수신(12세)등 5형제를 두었다.

장남 도수인은 연산종가를 차남 도수의는 상월 한천에서, 셋째 도수예는 전북 정읍에서, 넷째 도수지는 한천에서, 다섯째 도수신의 후손은 익산등지에서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성주도씨 집성촌인 연산면  관동리 출신 도상하(都相廈,1873~1944년,자는 충필,호는 해산)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하여 농민군과 관군이 논산에서 보복전을 벌일 때 양쪽을 중재하였다. 당시 전봉준의 농민군 선봉대는 논산지역에서 남접과 북접이 만나는 논산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은진을 점령하였다.전봉준은 10월 12일 4천여 명의 농민군과 함께 현재의 연산면 관동리에 본영(本營)을 설치하고 관군.일본군을 상대로 보복전을 벌였다.이때 도상하는 농민군과 관군을 중재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도응 왕지(王旨) 4점과 녹패(祿牌) 1점 (보물제 724호지정) 논산시 연산 보호각에 소장

                                 성주도씨종중문서(5매)-충남 논산시 연산면

 

성주도씨 종중문서는 서기 1393년(조선 태조 2)부터 6년(1397)까지 도응(都膺,초명은 유(兪),호는 청송당)에게 하사한 사령왕지 4매와 녹패 등 5매의 고문서이다. 도응은 고려말 충신으로 두문동 72인중 한 사람이다. 고려 공민왕 때 중대광(重大匡),문하시중(門下侍中), 찬성사(贊成事)를 역임하였는데, 죽마지우인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관직을 하사하였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다.

고문서를 보면 도응위조봉대부전의소감사령교지(1393), 도응위선절장군흥위위좌령장군사령교지(1394), 도응위선절장군용우무위사좌령장군사령교지(1395), 도응위보공장군호용순위사간대장군사령 교지(1397), 회사선절장군흥위위좌령장군사령녹패 등이다. 이 왕지에는 고려말 조선초의 관직이 섞여 있으며 "조선지보"라는 도장이 찍혀 있다고한다. 이것은 태종 이후에 "조선왕국지보"나 '경국대전"반포 후에 사용된 "시명지보"와는 다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조선 전기 관제의 변천과정,새보(국왕의 도장)의 사용경위, 서체의 변천 그리고 고문서 양식의 변천과정을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관동리(官洞里)는 성주도씨 집성촌으로 관동리 132번지에는 성주도씨 사우(星州都氏祠宇)가 있다.

이곳은 성주도씨 문중 사당으로 고려말에 찬성사(贊成事:정2품부총리)를 지낸 문신 도응(都膺)을 배향하고 있다. 이곳에 있는 어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조선 태조가 도응에게 내린 왕지(王旨) 4매와 녹패(祿牌) 1매가 보관되어 있다. 어필각에 보관된 성주도씨종중문서(星州都氏宗中文書)는 보물 제724호로 지정되었다. 어필각은 1982년에 고직사는 1984년에 건립되었다.

성주도씨(星州都氏)족보와 문헌에 의하면, 고려 원종때 전리상서(尙書:정3품장관)를 지낸 도 순(都順)을 기세조(起世祖)로 받들고 대구파, 평양파, 성주파, 단삼파, 노포파, 연노파, 용안파, 고흥파 등 8파(派)로 갈라져 세계(世系)를 잇고 있다.

 

  충남토성및입향성씨5성주도씨 1  
                                           성주도씨 사우 비각

 

  충남토성및입향성씨5성주도씨 2  
                                논산시 연산면 관동리 성주도씨 사우

 

  충남토성및입향성씨5성주도씨 3  
    충남 예산군 응봉면 지석리의 고려말 충신 도응(都膺)내외와 손자 순손(順孫)내외의 묘

 

                                           성주도씨(星州都氏)의 선계(先系)

 성주도씨(星州都氏)의 시조에 대해서 "경술보(庚戌譜)"수성시조(受姓始祖)편에 보면, 시조가 도계(都稽)라고 한다. 그는 기원전 110년 한무제때,중국 남월(南越)의 재상인 여가(呂嘉)가 왕건덕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을 때, 복파장군(伏波將軍)으로 여가를 사로잡고 반란을 토평한 공으로, 임채후(臨蔡侯)에 봉해지고, 도씨(都氏)로 수성(受姓)함으로써 도씨(都氏)가 비롯되었다고 한다.

시조 도계의 후손으로 도조(都祖)가 한나라 성제때 사람인데, 고구려로 건너와 유리왕을 도와 공을 세우고 정착하면서, 우리나라 도씨(都氏)의 가계가 시작되었다.

 우리나라 도씨의 시조 도조의 후손으로,백제 개루왕때의 재상 도미(都彌),그리고 통일신라 때의 도유(都儒)는 신라에서 김유신을 도와 백제군을 격파하는 등 여러 공을 세워 상천후(尙川侯)에 봉해졌다고 한다.

 후손 도진(都陳)은 고려 태조를 도와 고려개국에 공을 세우고,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에 봉해짐으로써, 성주(星州)가 도씨의 관향이 되었다. 그러나 중시조 도 순(都順) 이전 선대의 세대(世代)는 문헌의 유실로, 정확하게 밝힐 수 없어 고려중기에 전리상서(典理尙書:정3품 장관)를 지낸 도순(都順)을 1세조로 받들며 세계(世系)를 잇고 있다.

도씨(都氏)는 성산도씨(星山都氏).성주도씨(星州都氏).팔거도씨(현재의 칠곡 漆谷)등 몇 본이 있지만, 모두 같은 뿌리이다. 성산(星山)은 성주(星州)의 옛이름이고, 팔거는 옛날 성주(星州)의 속현(屬縣)이다.

도씨는 1752년 대동보를 편찬할 때 종회의 결의로써, 당시 팔거현이 속한 성주목(星州牧)의 지명을 따서성주도씨로 개칭하였다.

 삼국사기 동사열전(東史列傳), 동국통감(東國通鑑),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등의 문헌에는 도순(都順)이전 인물로, 도도(都刀). 도두(都頭). 도공(都功). 도비(都非). 도눌최(都訥催). 도유(都儒),도조(都祖). 도미(都彌). 도진(都陳)등의 도씨성(都氏姓)이 등장한다.

도조(都祖)는 고구려 시조 동명왕의 큰아들 유리(琉璃)가 이복동생 비류(比流). 온조(溫祚)와 왕권쟁탈전을 벌일때 유리(琉璃)를 도와 왕위에 오르게 한 공신이라고 한다.

백제 개루왕때 사람인 도미(都彌)는 부인이 아름답고 정숙하기로 소문이 났기에 개루왕이 그 소문을 듣고 그의 아내를 유혹하려다가 실패하자 도미(都彌)의 두 눈을 뺀 다음 배에 태워 한강에 띄워버렸다. 그러나 도미(都彌)의 아내는 잠자리를 강요하는 왕을 속인 뒤, 남편을 뒤쫓아 하류의 천성도(泉城島)에서 해후하고 고구려 땅에서 나물과 풀뿌리를 캐먹으며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삼국사기.삼국유사.조선씨족통보.전고대방(典故大方)등에 전함>

                        "도미(都彌) 부인 '아랑'의 정절은 역사상 손꼽히는 여절부덕(女節婦德)의 상징"

도미(都彌)의 무덤은 경남 웅천(熊川)에 있는데, 이 지방에서는 누구든 8월 초하룻날에 제일 먼저 벌초를 하면, 득남한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다.

도미(都彌)부인 아랑의 정절은 우리 역사상 손꼽히는 여절부덕(女節婦德)의 상징으로 1984년 5월 창작 무용극 [도미 부인]으로 꾸며져,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문화 행사 무대에 올려졌고, 그 후 여러나라에서 1백 수십여회의 공연을 가졌으며, 도미부인을 기리는 동상이 "서울시 강동구 천호1동 천일어린이공원내"에 세워져있다.

1세조 도순(都順)의 아들 도충박(都忠朴)은 고려 원종 때 전리상서(典理尙書:정3품 장관)를 지냈으며, 3세 도유도(都有道). 도유덕(都有德)등 형제도, 공조전서(工曹典書:정3품장관)와 명경진사(明經進士)에 각각 올라 명성을 떨쳤다.

4세손 도효원(都孝源)이 전객령(典客令), 도효신(都孝臣)이 판서(判書:정2품장관), 도효안(都孝安)이 동양창 판관(東陽倉判官:종5품) 등을 지냈고, 도효정(都孝貞)의 손자 도천우(都千遇)는 경성수복공신(京城收復功臣)이 되었다.

전국의 도씨(都氏)들은 모두 이들의 후손으로 대구 달성. 경북 울진. 군위. 성주. 청도(淸道). 경주(慶州). 예천(醴泉), 경남고성(固城). 산청(山淸). 거창(居昌). 청주(淸州). 청산(靑山), 충남 천안, 논산시 연산(連山)등이 집성촌이다.

고려 때 도씨(都氏)인물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사람은 도효안(都孝安)의 아들 도홍정(都洪正)이다. 그는 공민왕때 시중(侍中:고려때 국정을 총괄하던 대신으로 종1품 정승)에 오르면서 정계의 중심인물로 활약했다.

그의 아들 도길부(都吉敷)는 우왕 때 찬성사(贊成事:문하부의 정2품 부총리)를 역임한 무신으로 당시 세도가 이인임(李仁任)의 인척이었다.

도길부(都吉敷)는 1380년 왜구가 대거 침입 해 충청. 전라도지방이 큰 화를 입게 되자 이성계등과 함께 충청도에서 전투를 시작하여 지리산에서 왜구를 완전히 격퇴했다.

이것이 황산대첩(荒山大捷)이다. 그러나 이인임(李仁任)이 실각하는 정변에서 그 일파로 몰린 그는 죽음을 당하고 일족은 풍비박산 곳곳으로 흩어지게 됐다. 도(都)씨들은 이 참변을 <기사화변(己巳禍變)>이라 부르고 있다.

도길부(都吉敷)의 아들 청송당(靑松堂) 도응(都膺)은 고려말을 대표하는 도(都)씨의 인물로 찬성사(贊成事:문하부의 정2품부총리)를 지낸 그는 이성계와 가까운 사이였다.

기사화변(己巳禍變)때 장인 우인열(禹仁烈) 덕으로 화를 면하였고, 고려가 망한 후에는 홍주 노은동(魯隱洞)에 은거하였는데 태조 이성계가 상장군(上將軍;정3품)에 임명하고, 두 번이나 예물을 보내 출사를 권했으나 뿌리쳤다.

그 뒤에도 이성계가 다섯 차례나 불렀지만 끝내 응하지 않고 불사이군(不事二君:한사람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함)의 지조를 지켰다. 이에 감복한 이성계는 청송당(靑松堂)이라는 호와 송절시(頌節詩)를 내려 그의 절의를 기렸다고 한다.

이때의 왕지(王旨) 4점과 왕명 1점이 보물 724호로 지정돼 충남 연산의 보호각에 소장되어 있다. 도 응은 고려말에 절의를 지킨 두문동(杜門洞) 72현의 한사람이다.

도응의 초명은 유(兪),자는 자예(子藝)이다.도응이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에 은거하면서 성주도씨가 충청도에 세거하기 시작하였다. 아들 도사면(都思勉)은 다시 논산시 연산면 어은리로 낙향하였고, 손자 도경손(都慶孫)은 여산송씨의 사위가 되어 처가에서 가까운 논산시 연산면 관동리로 이주하여 세거하였다.

도응은 고려 우왕때 과거에 급제하여 문하찬성사(정2품부총리)까지 올랐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면서 태조가 옛 정을 생각하여 상장군(정3품)에 임명하였으나 사양하였다. 그 뒤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은거하면서 다섯 차례의 소명을 모두 거절하여 불사이군의 귀감이 되었다. 태조는 도응의 충성과 절의를 아름답게 여겨 비단에 청송당(靑松堂)이라는 호를 내리고 절구시(絶句詩)를 하사하였다.묘소는 충청남도 예산군 응봉면 지석리 산141-16번지에 있다.

태조가 도응에게 내린 왕지(王旨) 4점과 녹패(祿牌) 1점이 남아 있는데, 1981년 7월 15일 보물 제724호로 지정되었다. 순조(純祖) 때 운천서원(雲川書院)과 두문동서원(杜門洞書院)에 배향되었다.

도흥(都興)은 공민왕때의 무신으로 명성을 날렸으나, 상원수(上元帥)로 전라도도순문사(全羅道都巡門使)가 되어 재직중에 왜구의 침입을 잘 막지 못해 한때 파직되었다가, 다시 기용되어 왜구 방어에 공을 세웠다. 1392년 정몽주가 이방원 등에 의해 살해된 뒤 그의 일파로 몰려 유배를 당했다.

도 연(都衍)은 고려말에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으며, 공민왕 때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백관을 규찰하던 사헌부의 정5품)을 지냈다.

조선 초기에 도(都)씨 들은 고려말의 시련 때문에 출사(出仕)를 꺼려하였으며, 세조때 도하(都夏)가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정언(正言:왕에게 간하던 일을 맡은 사간원의 정6품).교리(校理:홍문관.승문원의 정5품)를 거쳐, 부사(府使:정3품수령)를 지냈다. 조선 중.후기에 이르러는 15명의 문과(文科;대과) 급제자와 무과급제자를 배출했다.

특히 도성유(都聖兪). 도여유(都汝兪). 도응유(都應兪). 도경유(都慶兪). 도신수(都愼修). 도신징(都愼徵). 도형(都衡). 도균(都勻)등 이름난 학자가 많다.

도성유(都聖兪)는 성리학자로 임진란때 의병을 일으켜 군량을 모았고, 오경체용합일도(五經體用合一圖)와 체용각분도(體用各分圖)를 만들었으며,성리지학(性理之學)등을 저술했다.

도여유(都汝兪).도신수(都愼修)와 더불어 대구광역시 달성군의 서재(鋤齋) 용호서원(龍湖書院)에 배향됐다.

 도여유(都汝兪)는 이괄의 난 때 의병을 모집하여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이 컸고 병자호란 후에는 은거하여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도응유(都應兪)는 '이괄의 난'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고, 정묘호란때는 창의상장(倡義上將)으로 공을 세웠으며, 조정에 축성선장(築城選將)의 소(疏)를 올리는 등 국방 책략에 조예가 깊었다.

또 예문에도 밝아 오현예설(五賢禮設)을 편찬하였으며, 동생 도경유(都慶兪)와 함께 대구 병암서원(屛巖書院)에 배향됐다.

도경유(都慶兪)는 인조때 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합격하고, 1627년 정묘(丁卯)호란때 세자를 남원으로 호종(扈從:왕가를 모시고 따르는것)하였고, 병자호란때는 조령(鳥嶺) 전투에서 대승했으나, 쌍령(雙嶺) 전투에서 화약고가 폭발하는 바람에 패배해 그 죄로 유배되던 도중에 죽었다. 그러나 후에 화약고 폭발이 군율을 어겨 그에게 처형당한 비장의 아들이 분풀이로 한 것임이 밝혀져 승지(承旨:정3품)로 추증됐다.

 서재(鋤齋) 도여유(都汝兪)의 아들 도신수(都愼修). 도신여(都愼與). 도신행(都愼行). 도신징(都愼徵) 형제는 아버지와 함께 5부자가 당대의 성리학자로 이름을 떨쳤다.

맏아들 도신수(都愼修)는 인조 때 문과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함흥부사로 선정을 베풀었고, 말년에는 고향에서 학문 연구에 전념했다. 함흥부사로 부임했을 때 억울하게 투옥된 백성을 모두 방면하자, 밝은 하늘에서 갑자기 비를 내렸고, 세인들은 이를 <설원우(雪寃雨)>라고 칭송했다고 한다.

둘째 도신여(都愼與)는 효종 때 문과를 거쳐 예조정랑(禮曹正郞:정5품),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정4품)를 지냈으나 재임중에 사망하자, 조정에서는 한 사람의 동량을 잃었다고 아쉬워하며, 영이(요즘의 영구차)까지 내렸다고 한다.

넷째 도신징(都愼徵)은 현종. 숙종 때 활약한 학자로 유림에서 명망이 높았으며, 특히 예제(禮制)에 밝았다.

그는 16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효종 비)가 죽어 자의대비(慈懿大妃:인조의 계비)의 복상(服喪) 문제가 일어났을 때 대공설(大功說)로 예론(禮論)이 기울어지자, 상소를 통해 이를 반대하고 기년설(朞年說:만1년)을 주장 결국 이를 관철했다.

그 뒤 강릉참봉(參奉:종9품), 주부(主簿:종6품)를 거쳐,용궁현감(縣監:종6품)으로 나가 치적을 쌓고, 통훈대부(通訓大夫:정3품 당하관)가 되었다.

대구시 달성군 다사읍 서재리에는 <용호서원>이 있다. 이 서원은 1708년(숙종 34)에 건립하였으며, 도성유, 도여유, 도신수 3현을 병향하고 있다. 이 서원은 정면 5간, 측면 1간반의 팔작지붕이다.

도성유(자는 정언,호는 양직당)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승인 서사원을 따라 의병을 일으켜 군량을 모았고, 오경체용 합일도와 체용각분도를 만들었다. 도여유는 도성유의 종제인데 자는 해중, 호는 서재로 일찌기 한강 정구와 낙제 서사원에게서 수학하였으며, 덕업으로 세인으로부터 추앙을 받았다.

인조 2년(1623)에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향병을 모집하여 모당 손처눌과 함께 난을 평정하는 공을 세웠다. 도신수는 도여유의 장남으로 호는 지암이다. 인조4년(1626)때 문과에 급제하여 영해부사를 역임하면서, 많은 업적을 올려 왕으로부터 내구마를 하사받았다. 저서로 지암문집이 있다. 또한 도형(都衡)과 도균(都勻)형제는 성주(星州)에서 후진양성에 힘써, 성향선정(星鄕先正)으로 추앙받은 인물이다.

형 도형(都衡)은 중종때 현량과에 천거되어, 정언(正言:왕에게 간하던 관청인 사간원의 정6품)등을 지내다 공조좌랑(工曹佐郞:정6품)재임 중,조광조(趙光祖:기묘명현으로 지치주의를 실천하려다 사사됨) 일파로 몰려 파직됐다. 낙향후 아우 도균(都勻)과 함께 후진양성에 전념하며, 성리회찬(性理會纂),효경집해(孝經集解) 등의 저서를 남겼다. 이밖에 도인엽(都寅燁), 도석훈(都錫壎), 도진삼(都鎭三)등의 학자들이 있다.

국난을 맞아 활약한 인물로는 임란때 백목원(白木員)싸움의 도현종(都現宗).도흥종(都興宗) 형제가 유명했으며,기계.안강 전투에 큰 공을 세운 도맹교(都孟郊).도맹호(都孟浩) 형제, 화왕산성에서 전공을 세운 도우(都遇)와 행주산성에서 큰 공을 세운 판관(判官:종5품 벼슬) 도맹삼(都孟三)등이 성주도씨의 가통을 이었다.

일제시대 때는 지하활동을 하다 8ㆍ15 직전에 체포되자, 왜관(倭館)낙동강 철교에서 투신하여 순국한 도병철(都炳喆)이 유명했고, 이상재(李商在)등과 연계하여 조선교육협회를 조직했던 도진기(都鎭基), 성주에서 3.1운동을 주도한 도무환(都武煥)등이 독립운동으로 가문을 빛냈다.(도씨 문헌 참고)

성주도씨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대과), 무과(武科:무관을 뽑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에 6명, 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21명 등 30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성주는 1896년 경상북도 성주군으로 개편되었으며, 1914년 군.면 폐합때 관할면이 성주.벽진면 등 9개면으로 폐합되었고,1979년 성주읍으로 승격하였다.

성주도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서 총 14,350가구에 46,186명이었다.

                                 임진왜란때 처참한 생활기록 용사일기(龍蛇日記)국역 출간

  충남토성및입향성씨5성주도씨 4  
              성주 후손에 의해 국역된 용사일기

 

 

 

 

 

 

 

 

 

 

임진왜란 당시의 비참한 생활상을 생생하게 기록한 '용사일기'가 2009년 한글로 출간됐다. 용사일기(龍蛇日記)는조선중기경북성주출신 암곡(巖谷)도세순(都世純,1574~1653,본관 성주,자는 후재 厚哉)이 임진왜란때의 피난생활을 기록한 일기다.

이 책은 도세순이 18세 되던 해인 1592년(선조25)부터 1595년(선조28)까지 임진왜란의 피난중에 왜적의 침입으로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던 당시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저자는 일기에서 임진왜란을 맞아 가족과 동네 친척들 40여명이 성주 운정리 인근의 여러 산 속에 함께 숨어 지내다가, 김천 증산과 경남 합천,경북 군위등지를 다니며 겪었던 참상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도세순은 한강 정구 선생의 문인으로 학문이 넓고 뛰어나 사림으로부터 추앙받아온 인물이다. 그의 문집으로는 1976년에 후손들에 의해 간행된 2권 1책의 '암곡일고'(巖谷逸稿)가 있으며, 여기에 '용사일기'가 실려 있다.

지금까지 전해진 임진왜란과 관련된 일기류는 주로 관군이나 의병으로 참전하면서 겪었거나 왜군의 포로로 있으면서 기록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용사일기'는 도세순이 약관 18세 청년으로서 직접 겪은 피란 중 일상생활을 기록했으며, 당시의 처참한 전란상을 있는 그대로  남겨 자료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역자인 도두호는 성주출신으로 성주도씨 가문에서 소중하게 간직해 오던 도세순의 일기를 한글로 알기 쉽게 국역해 출간했다. 역자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일기에 기록된 장소들을 10여 차례 현장 답사하면서 간접적으로 당시의 참상을 느껴보는 기회를 갖기도 했다"고 밝혔었다.

용사일기를 읽어보면 임진왜란 당시 성주지역의 실상을 간접적으로 접하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도 가질 수 있다. 일기의 제목으로 쓰인 '용사(龍蛇)'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용(龍)의 해인 임진년(壬辰年,1592)과 뱀(蛇)의 해인 이듬해 계사년(癸巳年,1593년)을뜻하는 말에서 사용된 명칭이다.

도세순(都世純,1574~1653)의 <용사일기(龍蛇日記)>는 18세 청소년이 쓴 전란을 체험한 내용을 보기드문 감성으로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조총과 칼을 든 왜병을 나무가지로 가려 숨었다가 적의 공격을 날쌔게 피하여 바위 밑으로 숨는 절박한 순간을 전해주는 내용은 감각이 예민한 청소년의 눈으로 묘사된 임진왜란의 숨막히는 순간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드러난다.

...."형님이 눈물을 닦으면서 말하기를,“내가 산등성이를 바라보니 적이 봉우리에서 내려오기에 나무를 꺾어서 몸을 숨기고 나무에 의지하여 서 있었습니다. 조금 후에 발자국소리가 나서 급히 돌아보니 적 한 놈이 큰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습니다. 나는 몸을 가볍게 날려서 달려가 바위 벽에 몸을 숨겼는데, 그 아래가 몇 길 낭떠러지라 그대로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등나무 줄기에 매달려서 아래로 내려가 그 밑에 숨었는데, 괴상한 고함소리가 나서 앉아서 엿보니 적 둘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 사이가 다만 나무 하나 사이, 다섯 걸음 정도였습니다. 벌떡 일어나서 날쌔게 달려 높은 산등성이를 겨우 넘어가서야 붙잡히지 않았습니다"라고 하니 듣는 사람은 모두 감탄하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서 돌아온 사람을 보는 듯하였다.<용사일기(龍蛇日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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