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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충남 토성(土姓) 및 입향성씨-(2)가평이씨

김진우의 성씨(姓氏)이야기

2011.12.21(수) | 김진우 (이메일주소:sewoora@naver.com
               	sewoora@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충남  논산지역 입향성씨(入鄕姓氏)인 가평이씨(加平李氏)는 이인보(李仁輔)가 완산지방의 토호로서 완산호장(戶長:고을아전의 맨 윗자리)을 지내 본관을 완산(完山)으로 하였고, 이인보를 시조로 받들게 되었다.

본관을 완산으로 삼은것은 신라시대라고 하며 8세손 이기문(李起文)이 가평 조종현(朝宗縣:조종은 가평의 옛지명)에 이주하여 살면서 본관을 조종으로 삼았다가, 조선시대에 이다림(李多林)이 가평군(加平君)에 봉해져서 본관을 가평으로 하였다고 한다.

결국 가평이씨의 관적은 처음 완산(完山)으로부터 시작되어 조종(朝宗)으로 바뀌었고, 다시 조종에서 가평(加平)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충남토성및입향성씨2가평이씨 1  
                                시조에서 30세 세단비

가평이씨 족보(계해보.癸亥譜)에는 "신라시대에 시조 이인보(李仁輔)가 완산에 정착한 이래로 6대가 실전(失傳:대대로 내려온 사적이나 묘를 알수없게 됨)하여 알 수 없으나, 8세손 기문(起文)께서 가평 조종현(朝宗縣)에 살으시어 본관이 되고 그 후 31세손 다림(多林)께서 이조 태종 12년에 무갑과(武甲科)에 급제 하시여 가의대부(嘉義大夫)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겸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가평군으로 봉(封)해져 이로부터 가평으로 개관되었으며 가평군을 중시조(中始祖)로 모시고 있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리고 정유보(丁酉譜) 서문(序文)에는 "우리 이씨가 신라와 고려 때부터 30여대 높은 벼슬을 하여 온 벌족이지만 직계로 단통(單統)이라는 점이 아쉬웠음을 밝혔으며, 자손이 번성하지 못하고 오히려 호서(湖西)에서 영남(嶺南)으로 영남에서 서호(西湖)로 드문드문 떨어져 살게 되었다"고 되어 있다.

  충남토성및입향성씨2가평이씨 2  
                     가평이씨 중흥시조이자 연산 입향조 이다림 묘소(연산면 청동리 매산 梅山)

 

 

 

  충남토성및입향성씨2가평이씨 3  
                                                   이다림 신도비(神道碑) 문(文)

논산 연산지역 입향조이자 가평이씨 중시조(中始祖) 이다림(李多林,1394~1468)은 판도판서(版圖判書,정3품장관)를 지낸 이춘계(李椿桂)의 손자로 서기1412년(태종 12)에 무과(武科:무관을 뽑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에 급제하여 압록강.두만강변의 만주. 여진족의 방어와 해안에 출몰하던 왜구들의 격퇴에 큰 공을 세우고 요직을 두루거쳐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왕명의 출납과 궁중의 숙위.군기 등을 맡아본 관청인 중추원의 종2품 가선대부 품계)와 군의 최고통수기관이었던 오위도총부의 부총관(副摠管:오위도총부의 종2품)에 올랐다.

그는 증병조판서(判書:국방장관)와 친공신의 부친에게 내리는 순충적덕보조공신에 책훈되고 가평군(加平君)에 봉군되었기에 본관을 <조종>에서 <가평>으로 바꿔 중흥시조(中興始祖)가 되었다.

 가평이씨(加平李氏)를 빛낸 인물을 보면, 장간공(章簡公) 이윤손(李允孫,시호는 장간)은 이다림의 큰아들로  1414년 10월3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1438년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문종때 영변부사(府使;정3품 수령)와 평안도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종2품의 무관으로 각도의 병마를 지휘한 병사.절도사),강원도관찰사(종2품감사.도지사), 도총관(都摠管:조선시대에 오위도총부의 군무를 총괄하던 정2품) 등을 역임하고 한성부판윤(判尹:정2품 서울시장)과 이조판서(吏曹判書:정2품 장관)에 이르렀다.

왕이 내린 이윤손유서(天順元年李允孫諭書)가 지금도 전한다.

이윤손 유서는 1457년(세조 3년) 3월 12일 세조가 친히 날인한 제14밀부(第14密符)를 내린다는 내용의 유서를 말한다.이는 이윤손이 1455년(세조 원년)8월 19일 평안도 도절제사(都節制使,조선초기 의흥친군위에 따린 군직으로 세조 12년 관제개편에 의해 병마절도사로 개칭)로 임명된 후 관례에 따라 유서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윤손은 이다림의 큰아들로 강원도 관찰사(종2품도지사), 한성부윤(종2품서울시행정부시장) 등을 지냈다.
유서는 국왕이 군사권을 가진 관원에게 내리는 명령서로 조선시대에는 관찰사(종2품도지사), 절도사(節度使,각지방의 군댈르 통솔하고 경비를 담당하던 종2품무관), 방어사(防禦使,경기이북지방의 요충지를 방어하기위해 두었던 종2품무관), 유수(留守,종2품지방장관) 등이 왕명 없이 군사를 발동하거나 역모를 일으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이다.
국왕이 밀부(密符)를 내릴 때는 유서를 함께 내렸으며, 관원에게서는 매우 귀중한 것이어서 항상 유서통에 넣고 지니고 다녔다.현재 이 유서는 서울 중랑구 중화동 326-9호에 거주하는 이윤손의 19대 손인 이영옥이 소장하고 있다.

  충남토성및입향성씨2가평이씨 4  
유서란 임금이 군사권을 가진 관찰사, 도절제사, 병마절도사, 수군절도사 등에게 밀부(密符,유수.감사.병사.수사 등에게 병란이 일어나면 즉시 응할 수 있도록 내리는 병부)를 내릴 때 함께 발급하는 명령서다.
이윤손 유서는1457년( 세조 3년) 3월 12일 내린 것이며 변란에 독단으로 대처할 일을 위해 만든 것으로, 역모에 의해 군사를 함부로 움직이는 것을 미리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밀부는 산유자나무를 지름 약 10㎝정도의 원형으로 깎아 앞면에는 ‘제기부’라 새기고 뒷면에는 ‘어압’을 표시하였다. 나중에 둘로 나누어 왼쪽편은 청에 보관하고, 오른쪽편은 지급받는 관리에게 주어 지니게 하였다.
현재까지 전해오는 여러 유서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하단 참고)

둘째 아들 이형손(李亨孫,1418~1496년,자는 창백)은 가평이씨의 대표적인물로 어머니는 여산송씨 송리(宋理)의 딸이다.1436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군기부정(軍器副正:병기 만드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의 종3품), 절충장군(折衝將軍:정3품 당상관), 의주목사(牧使:관찰사 아래의 목을 다스리던 정3품 수령)등을 역임하였고, 함길도도진무사(都鎭撫使:진무영의 종2품 최고무관), 1467년 세조13년에 박충선과 함께 평안도에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에 올라 연산군(連山君)에 봉해지고 그해 가을 가평군(加平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전라도부절제사(副節制使:절도사밑에 딸렸던 종3품,대개 부윤이 겸임함,병마절제사가 정식명칭) 겸 전주부윤(府尹:종2품 지방장관)이 되었으나, 이듬해 부친상을 당하여 사직하고 돌아와 노모봉양에 힘쓰자 성종이 이를 가상히 여기어 특별히 어머니가 살고 있는 공주의 목사(牧使,정3품수령)로 발령하여 효를 다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후에 청주목사,홍주목사가 되고 다시 병조참판(종2품국방차관)이 되었다. 1490년 부총관(오위도총부의 종2품)에 임명되고, 1492년(성종 23) 서얼의 인재를 거두어 쓰고자 우림위(羽林衛,금군을 통솔하던 종2품무관이었으나 후에 정3품으로 됨)를 설치할 때 그 장(將)을 했으며, 오위도총부부총관(종2품), 내금위장(內禁衛將,내금위를 지휘하던 종2품)을 겸하였다. 1496년(연산군 2) 3월 19일 향년 79세로 생을 마쳤다.
연산면 청동3리에 묘소가 있는데,묘역은 쌍분으로 문인석.묘비.묘갈명.상석 등으로 조성되어 있고  이형손의 묘역 바로 상단에는 부친 이다림의 묘소가 있다.병조판서(정2품국방장관)에 추증하고 시호를 평호(平胡)로 내렸다.
대를이어 손자인 이철근(李鐵根)과 이철영(李鐵榮)은 군수(郡守:종4품수령)를 지냈으며 이장생(李長生)은 승지(承旨:승정원의 정3품 당상관)와 이조참판(吏曹參判:종2품차관)을 역임하고 병조참판(兵曹參判:종2품국방차관)을 지낸 뒤 한성판윤(判尹:정2품서울시장)에 올랐다. 또한 증손자 가원군 이장생(평호공의 장손)은 무과(武科:무관을 뽑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급제 후 여려 군직의 장을 역임후 충청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수영의 병사를 통솔하는 3품)와 함경.평양 양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각도의 병마를 통솔하던 종2품 절도사.병사). 오위도총부부총관(종2품),두 번에 걸쳐 병조참판(參判:종2품국방차관)을 지냈다.

국가에 공을 세운 훈신에게 왕이 내리는 최고의 영예인 군호(君號)를 중시조 가평군(加平君)에 이어 차남 평호공은 가평군(嘉平君)으로, 손자는 가성군(嘉城君)으로 증손자는 가원군(嘉原君)으로 4대가 이어 받아 4대봉군 가문으로 4대봉군은 가평이씨의 상징이 되어 오늘날까지 내려오고있다.

이밖에 백봉(白峰) 이민진(李敏進)은  연산현감(종6품수령) 김홍익과 함께  1636년(인조14) 병자호란때 의병을 일으켜 광산에서 적을 만나 격전 끝에 전사하여, 뒤에 좌부승지(左副承旨:승정원의 정3품 당상관)에 추증되고 정문(旌門:충신.효자.열녀 등을 표창하기위해 그의 집 앞이나 마을 앞에 세우던 홍살문)이 세워졌다.

이명백(李命百)은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보은에서 왜적을 방어했고, 다음해 전사하여 이조판서(吏曹判書;정2품 장관)에 추증되었다.

이제항(李齊恒)은 1729년(영조5) 진사(進士:소과와 진사과에 급제한 사람)가 되고, 1735년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한 후 이조좌랑(佐郞:문관의 인사팀장 정6품 전랑)과 승지(承旨:승정원의 정3품 왕의 비서실장)등을 역임했다.

                                    <충남 논산 연산지역 가평이씨>

논산 연산 지역에 입향한 후 가평이씨를 빛낸 인물로는 평안도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한성부판윤(判尹,정2품서울시장)과 도총관(정2품) 등을 거쳐 이조판서(判書,정2품장관)를 역임한 이다림(李多林)의 맏아들 이윤손(李允孫)과 세조의 즉위를 도운 공로로 원종2등 공신에 오르고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적개2등공신에 오르면서 연산군에 봉해진 이다림의 둘째 아들 이형손(李亨孫,1418~1496),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켜 연산현감(縣監,종6품수령) 김홍익과 함께 종군했다가 전사함으로써 후에 좌승지(左承旨,승정원의 정3품당상관)에 추증되고 정려를 받은 이민진이 대표적이다.  백봉(白峰) 이민진(李敏進)은 1638년(인조 15)에 이어 1833년(순조 33)에 재차 증직되고, 1834년 충곡서원에 배향되면서 가평이씨는 논산 지역에서 광산김씨와 전의이씨에 버금가는 사족(士族:대대로 문벌이 좋은 가문)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1400년대 초반 가평군 이다림이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화악리에 세거하던 사족인 여산송씨와 사돈 관계를 맺으면서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청동리(靑銅里)로 이주한 후 후손들이 세거하게 되었다. 청동리는 본래 연산군 내적면 지역이었는데 이곳에서 청동이 나왔다하여 청동골 또는 청동리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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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평이씨 묘역과 추모비-연산면 청동리 소재

 

 

이다림은 논산의 가평이씨 입향조이자 태종 때 무과에 급제한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왕명을 출납하던 중추원의 종2품)와 부총관(종2품)을 역임함으로써 가평이씨를 중흥시킨 중시조이기도 하다.

이다림의 아들 이형손이 논산 연산지역 세거 사족(士族,대대로 이어온 선비집안) 단양우씨(禹氏)의 딸과 혼인하고, 이형손의 손자 이장생이 전의이씨의 딸과 혼인하면서 가평이씨는 논산 지역에서 사족으로서 자리 잡게 되었다.2008년 현재 가평이씨는 연산면 청동리를 중심으로 논산시 일원에서 살고 있다.

이다림의 묘소가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청동리 매산(梅山)에 있으며 매년 10월1일 향사(享祀,제사)한다.이형손 묘소가 연산면 청동리(청동골)에, 이윤손 묘소가 연산면 임리(황새울)에 있다.

가평이씨는 병란이 일어났을때, 즉시 대응할 수 있도록 임금이 내리는 명령서인 유서를 가보로 간직하고 있다.천순원년 이윤손유서(天順元年李允孫諭書)가 그것인데 유서내용은 다음과 같다.

                                 <천순원년 이윤손유서(天順元年李允孫諭書)>

평안도 도절제사 이윤손에게 유하노라(平安道 都節制使 李允孫에게 諭).

卿이 한 方面을 맡고 있으니, 맡은바 임무가 가볍지 않다. 무릇 發兵하여 변란에 응 한다던가 백성을 편안케 하고 적을 제압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보통의 일이니 ?章(이미있는 법전)에 있다. 그런데 혹 卿과 내가 독단으로 처치할 일이 있으면 密符가 아니면 시행할 수가 없다. 그럼으로 친히 押印한 第14密符를 내리니 卿은 받도록 하라. 그러므로 諭 하노라. 天順元年 三月 十二日(諭書之寶) 」

유서(諭書)는 왕이 군사권을 가진 관찰사. 도절제사. 병마절도사. 수군절도사 등에게 밀부(유수.감사. 병사. 수사 등에게 병란이 일어나면, 즉시 대응할 수 있도록 내리는 병부)를 내릴 때 함께 발급하는 명령서이다.

밀부는 산유자나무를 지름 약 10㎝정도의 원형으로 깎아 앞면에는 <제기부>라 새기고 뒷면에는 <어압>을 표시하였다. 나중에 둘로 나누어 왼쪽편은 청에 보관하고 오른쪽편은 지급받는 관리에게 주어 지니게 하였다.

이 유서는 천순(天順) 원년(元年) 즉 서기 1457년(세조(世祖) 3년 3월 12일)에 세조가 평안도(平安道) 도절제사(都節制使) 이윤손에게 친압(親押)의 제14밀부를 내리면서 준 것이다. 이윤손은 단종.세조때 활약한 무신으로 시호(諡號)는 장간(章簡)이다.

세종조에 무과(武科무관을 뽑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에 급제한 후, 경상좌도(慶尙左道)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절도사밑의 정3품으로 부윤이 겸임), 호조참의(戶曹參議;정3품),한성부윤(漢城府尹:종2품 서울시행정부시장)등을 역임하였다.

세조 원년(元年)인 1455년 8월에 평안도 도절제사(都節制使:정3품)에 임명되어, 그해 12월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1등에 녹훈(錄勳)되었고, 세조3년(1457) 3월12일 유서(諭書)를 받아 명을 충실히 받들어 변방이 무사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였다.

이미 지정된 유서로는 류성룡(柳成龍)(보물 제160호 류성룡 종손가문적(柳成龍宗孫家文籍)중 정원전교(政院傳敎),1596년), 권응수(權應銖)(보물 제668호,1604년), 정기룡(鄭起龍)(보물 제669호,1617년), 권벌(보물 제901호,1538년), 김성일(金誠一)(보물 제906호, 1592년), 권주(權柱)(보물 제1002호,1503년)의 것이 있다.

이윤손(李允孫)의 유서(諭書)는 선조(宣祖) 29년(1596) 2월 16일 4도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변란이나 국난이 있을때 정1품들이 맡던 임시군직) 영의정(領議政) 류성룡(柳成龍)에게 내린 유서(諭書)와는 거의 같다고 한다. 따라서 이윤손의 유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조선 초기 국왕이 내린 유서의 형식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 역사적. 학술적으로 가치가 매우 크다고 한다.

가평이씨(加平李氏)는 조선시대에 무과(武科:무관을 뽑기위하여 보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에 5명, 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9명등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인구조사에서 가평이씨는 1985년에는 총 4,066가구에 18,624명이었으며 2000년에는 5,108가구에 15,815명이었다.

가평(加平)은 서기1396년(태조 5)에 조종현을 폐합한 후, 1525년(중종 20)에 가평현에서 가평군으로 승격되었다. 1888년(고종 25)에는 춘성부(春城府)에 속하였다가 1894년(고종 31)에 경기도로 환속되면서 포천군(抱川郡)에 속하게 되었다. 1896년 가평군으로 독립하였다가 197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가평면이 가평군으로 승격되었다.

<글쓴이>김진우(金鎭宇)-충남 출생,공주고.고려대 경영학과 졸업
민주당 대전광역시 사무처장.지방언론사노조위원장.민주당보기자.(현)한국성씨연구소 대표.사단법인 뿌리문화 이사장
조선왕조실록반환추진위원.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회원 <지은책>-한국인 성씨의 역사 (한국인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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