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간량리 당간지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당간지주란, 절을 표시하는 깃발(당, 幢) 등을 올리는 막대의 아래를 지지해 주는 한 쌍의 석주를 칭합니다.>
한국의 종교 역사에서 불교는 고구려 시대를 시작으로 고려 시대에 번성하였다가 조선의 숭유억불정책으로 인하여 쇠퇴기를 맞이하였고, 조선 시대에 서양문물이 들어오면서 천주교라는 새로운 종교가 전해졌으며, 현재 한국에는 불교와 천주교 외에도 여러 종교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 간양리 본당이 신례원 천주교회의 뿌리가 되다.
예산 문화유적을 찾아보다, 간양리에 '간량리 당간지주'가 있다는 정보를 접하면서 이곳이 오래전 불교의 사찰이 있었던 터였으며, 훗날 천주교 본당이 있었던 곳이라는 사실에 관심을 갖게 되었지요.

▲ 신례원 천주교회에서 바라본 간양골
인터넷 검색을 통하여 위치를 확인하였으며 깊은 골짜기에 목적지가 있다 보니, 풀이 우거지는 계절에는 찾아가기 어렵다 판단되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12월에 방문하였으나 간양골 임도 및 하천 정비 공사가 막바지여서 목적지를 뒤로하고 주변 산간 임도를 따라 잠시 아쉬움을 달랬던 기억이 남았는데,
불교와 천주교의 문화가 함께 있다는 그곳을 찾아보고자 다시 길을 시작합니다.
신례원 천주교회 정문에서 바라보면 아산의 도고산과 예산의 덕봉산이 마주 보고 있는데, 그 사이 골짜기가 바로 오늘 찾아가려는 간양골입니다.
◆ 간양골 가는 길

▲ 간양골 가는 길
신례원 천주교회에서 차로 5분 정도의 거리에 위치한 간양 2리 마을회관을 지나 조금 더 진행하니 사회복지법인 수정원이 나오며,

▲ 사회복지법인 수정원 옆길
이곳에 잠시 주차를 부탁하고 간양골 깊숙하게 있을 간양사지를 찾아 걸음을 옮깁니다.

▲ 첫 이정표
출발하여 200m 정도 진행하니 첫 이정표가 오늘의 여정을 보여주는데, 1.6km의 같은 거리에 간양사지(불교)와 간양리 공소(천주교)가 함께 있음을 알 수 있더군요.
<이 글에서는 '간양사지=간양사터, 간량리 당간지주, 간양리 공소=간양리 본당 터'를 병행하여 사용합니다.>

▲ 갈림길
100m 정도 진행하자 산간 임도와 하천을 따라가는 임도가 나오는데, 왼쪽의 하천 임도를 따라갑니다.

▲ 하천 임도
2024년 12월 간선임도와 하천 정비 공사가 막바지였던 간양골이 기본적인 공사를 마친 모습입니다.
도로의 크기로 미루어 과거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을 법한 느낌을 주는데,

▲ 간양골 마지막 집
지금의 간양골에는 저렇게 집 두 채가 남아있지만, 집터와 넓은 공간의 주변 흔적에서 과거 많은 사람들이 살았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겠더군요.
출발하여 이곳까지 약 1.2km 정도의 거리였고, 집 쪽으로 이정표가 있으나, 현재는 우측의 산간 임도로 길을 이어가야 합니다.
<방문일 기준 이정표의 날개 3개가 모두 떨어져 있고, 안내 거리가 틀리며, 새로운 임도를 따라가야 합니다. 이정표 내용의 수정 및 위치를 옮겨야 할 듯합니다.>

▲ 간양사지 가는 길
마지막 집에서 산간 임도를 따라 100m 정도 진행하여 화살표처럼 산길로 향하고,

▲ 계곡을 건너서
200m 정도 산길을 걸어 만나게 되는 작은 이정표를 따라 계곡을 건너면 오늘의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 간양사지

▲ 간양사지
<간양사지(間良寺地)는 598년(백제 혜왕 1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며, 조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에 의하면 대웅전을 비롯하여 극락전, 시왕전, 동전, 승방, 후방, 일주문 등 다수의 건물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18세기 중반 상당히 큰 규모의 사찰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 안내문 중에서

▲ 간양사 옛 터
번성했던 사찰이 어떤 이유로 인하여 폐사(廢寺)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 간양사 옛 터
무너진 건물 옆으로 세워진 당간지주로 보아 과거 규모가 있던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었고, 조심스레 무너진 흔적을 따라 걷다 보니 쉽게 기와 조각들도 만날 수 있었답니다.
<30 여 년 전 간양골 마지막 집 주변에 살던 주민들에 따르면 300년 전에 절은 폐사되어 마곡사로 갔다고 하고 작은 암자만이 남았다고 전합니다> 디지털 예산문화대전 중

▲ 샘터
오랫동안 사찰이 있던 곳이었고, 폐사 후 사람들이 살았으며, 후에 천주교의 내포지역 본당 중 하나였던 간양리 본당 터가 있었던 곳~!
◆ 간양리 본당 터

▲ 간양리 본당 터 이정표
샘터 앞으로 이정표가 가리키는 곳은 '간양리 본당 터' 라 적혀 있는데, 그렇다면 이곳에 천주교의 신앙이 전해지고 있었단 사실을 말하는 것이겠죠?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박해 때 많은 천주교인들이 간양사로 피신하였다고 전합니다.> 디지털 예산문화대전 중

▲ 간양리 본당 터
간양사가 1000년 세월을 넘겨 뿌리내렸던 곳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 천주교가 다시 흔적을 남겼고, 그 흔적을 찾아가는 30m의 길은 생각보다 험했는데, 사진의 화살표대로 따라서 산 경사면을 약간 오르면,

▲ 조릿대 막힌 길
헉~!
꽉 막힌 조릿대 벽이 나오는데, 여기서 그치지 말고 조릿대를 4~5m 정도 헤쳐 지나가면,

▲ 간양리 본당 터
억새 가득한 작은 터가 나옵니다.
인터넷 검색 정보로는 나무로 묶은 십자가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지금은 저 안쪽에 안내판 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더군요.

▲ 안내판
과거 천주교 박해를 피하여 모여든 천주교인들이 살던 이곳에 1886년 내포지역에 천주교 '간양리 본당'을 설립하여 신창, 온양, 아산 공세리, 천안, 직산, 목천, 진천, 안성, 평택 등 충청도 북동부와 경기 남부까지를 관할하여 포교하였습니다.
하지만, 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인해 내포지역 천주교회는 큰 타격을 받게 되었고, 설립 5년 만에 양촌 본당으로 흡수되었으며, 간양리 본당은 공소가 되었지요.
이후, 간양리 공소는 주변의 다른 공소들과 순교 신앙의 전통을 간직한 채 충실한 신앙의 보금자리 역할을 하였는데, 1950년 한국전쟁 후 빨치산들의 은신처가 되어 간양리 공소 인근으로 군경의 토벌 작전이 이루어졌고, 미군의 폭격을 당하기도 하여 점차 폐허가 되었답니다.
그런 상황에도 명맥을 이어가던 중 1962년 공소가 신례원 창소리로 옮겨졌고, 1977년 신례원 본당으로 승격되어 지금에 이어져 오고 있답니다.
◆ 불교와 천주교 문화유적이 함께 있는 곳

▲ 간양골 (간양사지 위에서)
'불교와 천주교의 문화유적이 공존하는 곳이라는 특별함이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찾아 본 간양골의 간양사 옛 터와 간양리 본당 터에는 자연만이 세월을 보내며 지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사람이 살았고 신앙이 싹텄으며, 서로 의지하고 믿고 나누며 함께 행복해하였을 그들의 터전이었던 간양골...
안타까움과 쓸쓸함이 남는 탐방이었지만, 여러분께 소개 드리기에 충분한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하며 간양골 이야기를 마칩니다.
다른 신앙과 교리를 가진 불교와 천주교의 문화유적이 함께 있는 곳이지만, 이념을 떠나 종교인들과 관·민의 작은 관심이 간양골의 역사 유적지에 쌓여서 이곳을 찾아 역사를 배우며 나누는 때가 왔으면 참 좋겠습니다.
간양사지, 간양리 본당 터, 간량리 당간지주
○ 주소 : 충남 예산군 예산읍 간양리 18
○ 주차 : 사단법인 수정원 주차장 인근
○ 거리 : 왕복 약 3.5km
○ 걷기 난이도 : 하
○ 관람 : 상시 개방
○ 주의 : 차량 진입은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 방문일 : 2025년 2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