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사(策士) : 남을 도와 꾀를 내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모사(謨士)라고도 한다.
▶ 권신(權臣) : 왕조시대에 신하로서 권력을 휘두르던 권력자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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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모사
상당부원군 한명회 선생의 묘역이
2024년 충청남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청주 한씨 충성공파에 문화재 지정서를 전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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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명회 묘
칠삭둥이 하면, 주저하지 않고 "아~! 한명회."라고 할 정도로 알려진 역사적 인물 한명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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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명등 속 세상
좋지 않았던 이미지로 기억되는 한명회 선생의 일생을 잠시 돌아보며, 세상을 마음껏 휘젓던 그의 머릿속 꾀주머니의 크기는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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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모사 전경 (한명회 묘역 입구)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은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병약하여 젊은 나이에 죽었고, 뒤를 이는 단종의 나이는 12세. 이 시기 단종의 삼촌인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죽이고 단종을 폐위시키며 왕에 오르니, 조선의 7대 세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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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당문 (충모사 외문)
이렇게 역사는 몇 줄을 기록하지만, 음서제도를 통해 궁궐 지기라는 한직으로 관직을 시작했고, 친구 권람을 통하여 수양과의 첫 만남에서 책사(策士)로 인정받았으며, 치밀하고 과감한 계략을 세워 불과 1년 만에 계유정난을 통해 수양을 왕의 자리에까지 올린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칠삭둥이 한명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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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모사 내부
외문이 잠겨 잠시 담장 너머로 단출한 내부의 모습을 바라보니, 막강한 권력을 쥐고 흔들며 한 시대를 풍미하던 최고의 권신(權臣), 권력가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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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부 한상질의 추원비
충모사 옆 산수유 꽃 아래로 한명회의 조부인 한상질의 추원비가 보인다.
청주 한씨는 고려 말부터 대대로 최고의 문신들이 배출된 명문가였는데,
이 집안에 칠삭둥이가 태어나 사람의 모습도 갖추질 못하였다고 하여 유모로 배정된 이에게 맡겨진 운명이었으나, 이를 가엾게 여긴 유모의 손길에서 사람의 모습을 갖추고 세상을 걸을 수 있게 된 한명회는 훗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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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명회 신도비
궁궐 지기에서 수양대군(세조)의 책사(策士)이자 최고의 권력을 휘두른 권신(權臣)으로 예종, 성종에게 딸을 시집보내어 두 임금의 장인까지 되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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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명회의 묘
연산군 때에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와 관련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무덤이 파 헤져지고 목이 베어지는 부관참시를 당하였고, 중종 때에 다시 신원(伸寃)이 되는, 죽어서까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1](http://www.chungnam.go.kr/export/media/article_image/20240322/IM0002070766.JPG)
▲ 한명회와 부인 민씨의 묘(뒤쪽)
간혹, 묘의 배치가 잘못 알려진 글이 있는데, 앞쪽이 한명회 선생의 묘이고, 뒤로는 부인 민씨의 묘이다.
이 묘의 특이한 점은 둘레에 반듯한 돌로 담이 둘러져 있는데, 묘를 쓴 후 조정에서 이곳이 지기(地氣)가 강한 명당임을 알고 어명으로 묘 주위에 무거운 돌을 쌓아서 지기를 눌러 가두어 놓은 것이라 한다. 살아생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한명회라는 인물이 이 세상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두려웠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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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명회 선생 신도비 안내문
혹시 방문할 기회가 있다면 신도비의 내용도 꼭 읽어보시라 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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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명회 선생 묘역
묘역을 내려와 입구에서 다시 선생의 흔적을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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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모사
충모사(忠慕祠)의 의미는 무엇일까?
임금을 위해, 나라를 위해, 아니면 백성을 위하여 충(忠)을 실천하는 마음 중 어느 마음을 담은 사당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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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꽃 (냉이꽃)
시대의 상황에 따라 충신도 되고 간신, 역적도 된다고 하지만, 결국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듯하다.
과연, 내가 그 시대의 상황에 처하여 선택을 해야 한다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백성만을 위한 충(忠)을 따를 수 있었을까?
그렇게 모든 것은 역사에 기록되고 후세로 전해지며 후인들이 그 시대를 기억하겠지...
조금은 씁쓸한 마음으로 돌아 본 한명회 선생의 묘역에서 봄을 맞이하며 글을 마친다.
상당부원군 한명회 선생 묘충남 천안시 동남구 수신면 속창리 산 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