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통합검색 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화면컨트롤메뉴
인쇄하기

여행

윤봉길의사기념관과 유적, 조국을 위한 애국심을 느끼다

2023.08.29(화) 14:29:35 | 하얀나비 (이메일주소:skygirl211@naver.com
               	skygirl211@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는 윤봉길의사의 업적과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기념관과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 유적이 있어요. 유적에는 윤봉길의사유적은 기념관, 윤봉길 의사의 영정을 봉안한 충의사(사당), 태어나서 4세까지 성장했던 광현당, 4세부터 중국으로 망명할 때 까지 민족운동을 하던 저한당, 농촌부흥을운동을 위해 설립했던 부흥원이 있어 천천히 산책하기 좋아요. 

윤봉길의사기념관과유적조국을위한애국심을느끼다 1

먼저 윤봉길의사기념관을 둘러봅니다. 길 양옆으로 태극기가 걸려 있고 무궁화가 자라고 있는데 우리나라 국기와 국화를 보니 우리나라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윤봉길의사기념관과유적조국을위한애국심을느끼다 2

기념관 안쪽으로 들어가면 로비에 윤봉길의사의 사진과 함께 '사내대장부는 집을 나가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는데 그 당시의 굳은 의지가 느껴지고 기념관 전시는 윤봉길 의사 연보부터 농민운동, 독립운동의 발자취, 상하이 의거 등 시대별로 16가지의 테마로 이루어져 있어요.

윤봉길의사기념관과유적조국을위한애국심을느끼다 3

윤봉길의사는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태어났고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일제의 식민지 교육에 흥미을 느끼지 못하다 12세에 3ㆍ1독립운동을 겪으며 학교를 자퇴하고 한학을 익혔어요. 동학사상과 새로운 문물을 접하며 자연스레 민족의식에 눈을 뜨게 되었고 이후 야학, 부흥원, 월진회등을 조직하고 운영하며 농민운동에 힘썼어요.

윤봉길의사기념관과유적조국을위한애국심을느끼다 4

윤의사는 문맹퇴치를 위한 농민운동과 마음의 부흥운동을 추진하며 야학 교재로 사용하기 위한 <농민독본> 3권을 편저했어요. <기사년일기>에서는 일제 식민지하 조국의 현실을 뼈저리게 느끼며 울분을 표현했고 그가 추구한 농민운동은 단순히 농민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잘살게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한걸음 나아가 민족의식과 민족의 정체성, 독립사상의 교육까지 포함된 것이었어요. 전시관에는 윤봉길의사가 사용하던 연적, 벼루, 붓통, 사기그릇, 주발대접, 놋대야 등의 물건들과 함께 그가 지은 한시를 모은 시집, 친필 예문집, 그리고 농민운동과 관련된 자료들을 볼 수 있어요.

윤봉길의사기념관과유적조국을위한애국심을느끼다 5

윤의사가 문맹퇴치운동과 농민운동을 하던 중 일제 강점기하의 농촌 실태와 잔혹한 일제의 통치를 풍자한 내용의 연극을 공연했고 그 후 일제의 감시와 조사를 받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조국의 현실과 농촌운동의 한계를 절감한 윤의사는 오랜 고민 끝에 조국 독립을 위해 망명을 결심했고 '장부출가생불환(사내대장부는 집을 나가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를 남긴 후 중국으로 망명했어요. 중국에서 백범 김구를 만나게 되어 함께 독립운동에 힘썼으며 김구에게 남긴 이력서, 중국제 수첩등 다양한 자료를 볼 수 있습니다.

윤봉길의사기념관과유적조국을위한애국심을느끼다 6

천지를 뒤흔든 상하이 홍커우공원의거, 윤의사가 김구와 함께 거행했던 일로 일본군 사령관과 일제의 군부와 정계 주요 인사 7명이 있던 곳에 수통형 폭탄을 던졌고 상하이의거 홍커우공원에서 의거 결행에 사용했던 도시락, 물통폭탄과 함께 회중시계, 손수건, 윤봉길의사의 도장 등을 볼 수 있어요. 홍커우공원의거는 국내뿐만 중국 등 해외 여러나라에 보도되어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알렸어요. 또한 중국인들의 항일투지를 고무시키며 한중연합전선 결성의 분위기가 조성되는 등 중국 내에서의 새로운 독립여건을 마련했고 미주지역 한인교포들의 재정지원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이 새로운 활로를 마련하게 되었어요.

윤봉길의사기념관과유적조국을위한애국심을느끼다 7

상하이의거 후 일본군에게 잡혀 갔던 윤봉길의사는 사형선고를 받았고 일본으로 압송되어 가나자와 육군공병작업장에서 순국하였어요.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윤의사는1932년 25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였고 1945년 광복 후 유해발굴 및 조국봉환하며 다시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어요. 기념관에는 사형당시 묶였던 사형틀, 순국 직후의 윤봉길의사 모습, 조국의 품으로 돌아올 때의 자료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윤봉길의사기념관과유적조국을위한애국심을느끼다 8

전시관 끝에는 매화꽃 작은도서관이 있어요. 비치되어 있는 책을 읽을 수 있고 윤봉길의사에게 메모도 남길 수 있어요. 벽면에 가득 채워진 메모장을 보니 관람객들의 마음이 전해지기도 합니다. 또한 매헌 윤봉길의사의 흉상도 있는데 역사 속 인물을 마주하니 마음이 경건해졌고 표정에서도 조국 해방을 위한 굳은 의지가 느껴졌어요.

윤봉길의사기념관과유적조국을위한애국심을느끼다 9

윤봉길의사기념관과유적조국을위한애국심을느끼다 10

전시를 둘러 보고 나오면 윤봉길의사를 기리는 공간을 마주합니다. 포토존이 있어서 윤봉길의사가 되어 사진을 남길 수 있고 VR가상체험도 할 수 있어요. 관광상품 판매장에서는 윤봉길의사와 관련된 기념품도 구입할 수 있고 안내데스크에서는 가이드형 체험프로그램도 준비되어 있으니 자녀들과 함께 한다면 체험프로그램을 이용해도 좋을 것 같아요.

윤봉길의사기념관과유적조국을위한애국심을느끼다 11

전시관 옆에는 윤봉길의사 어록탑이 있는데 그나 남긴 어록들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윤봉길의사기념관과유적조국을위한애국심을느끼다 12

기념관에서 조금 걸어가면 저한당과 관현당, 부흥원을 볼 수 있어요. 저한당은 '어려운 한국을 건져낼 집'이란 뜻으로 윤봉길 의사가 4세부터 중국으로 망명할 때 까지 민족운동을 했던 곳이에요.

윤봉길의사기념관과유적조국을위한애국심을느끼다 13

작은 다리를 건너면 윤봉길의사가 태어나 4세까지 성장했던 광현당(빛이 나타나는 곳)과 농촌부흥운동을 위해 설립했던 부흥원(마을을 부흥시킨다는 뜻)을 둘러볼 수 있습니다.

더위가 한풀 꺾이면서 야외활동도 조금 수월해진 요즘, 실내전시관과 함께 천천히 산책하기 좋은 윤봉길의사유적에서 윤봉길의사가 나라와 겨레에 바친 사랑을 느껴보세요.


예산 윤봉길의사 기념관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덕산온천로 183-5

 

하얀나비님의 다른 기사 보기

제4유형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4유형:출처표시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하얀나비님의 SNS]
댓글 작성 폼

댓글작성

충남넷 카카오톡 네이버

* 충청남도 홈페이지 또는 SNS사이트에 로그인 후 작성이 가능합니다.

불건전 댓글에 대해서 사전통보없이 관리자에 의해 삭제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