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큰 뜻을 위해, 먼저 떠나신 독립투사, 윤봉길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19-1
▲ 윤봉길 의사 기념관 전경
충남 예산에 있는 <윤봉길 의사 기념관>을 방문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이봉창 의사>와 더불어 객관식 역사시험 문제로 자주 출제되던 분이었는데, 성인이 되어 이렇게 방문하니 기분이 새로웠다.
▲ 윤봉길 의사 사적비
▲ 미주리호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시케미쓰 마모루
그렇다면 <의거(義擧)>와 <테러(Terror)>의 차이는 뭘까?
<의거(義擧)>라고 하면, ① 부당한 침략을 당한 약한 집단에 속한 자가, ② 정치적 항의를 대외적으로 알리기 위하여, ③ 강한집단의 정치적 지도자를 골라서 ④ 총, 폭탄 등 파괴적 폭력수단을 사용하여, ⑤ 인명을 살상하는 행위로 정의될 수 있겠고,
<테러(Terror)>란, 정당한 폭력이라는 의거와 달리 “폭력을 써서 적이나 상대편을 위협하거나 공포에 빠뜨리는 행위”라고 사전적으로 정의된다.
개념적으로는 구별이 되기도 하지만, 일본인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지도자를 폭사시킨 <테러> 라고 주장하겠고, 우리의 입장에서는 일제의 부당한 침략에 항의하고자 무고한 시민이 아닌 소수의 정치지도자의 제거를 목적했으므로, <의거> 라고 보는 게 당연한 것 같다.
신격호가 A급 전범 시케미쓰 마모루의 조카사위라는 설이 한때 퍼졌었다. 신격호 부인 이름이 시케미쓰 하츠코이고 신격호 일본 이름이 시케미쓰 다케오(重光武雄) 인데다가, 롯데가 외국인 배척이 심한 일본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시케미쓰 가문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신격호의 비밀(저자 정순태, 1998년 출간)> 이라는 책도 출간 되었었다.
하지만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 신격호 아버지 신진수의 창씨개명 성이 시케미쓰(重光)였고, 부인의 결혼 전 이름이 다케모리(竹森) 하츠코(初子) 였는데, 신격호와 결혼하면서 남편의 성을 따라 시케미쓰(重光) 하츠코가 된 것이기에, 풍문이 사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윤봉길 의사가 농촌계몽을 위해 쓴 <농민독본> 사진
윤 의사는 보통학교 2학년 때 3.1운동을 목격했는데, 그 후 일본의 식민지 교육을 반대하여 다니던 학교를 자퇴하고 <오치서숙>이라는 서당에 들어가 한학을 공부했다. 크게 될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더니, 윤 의사는 어린 나이임에도 나라사랑 생각이 남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 일본정부가 보내온 김구 회중시계
그 사연인즉, 1932년 윤의사가 상하이 거사를 앞두고 김구와 최후로 작별할 때 윤의사가 말하기를, “선생의 시계는 2원이고 자신의 시계는 6원인데 1시간 밖에 쓰지 못하니 바꾸자”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광복 후 김구선생의 유품에 윤 의사 시계가, 윤 의사 유품에 김구선생 시계가 섞이게 되었다고 한다.
▲ 윤봉길의사 기념관 1층 출입구 배경사진
▲ 윤봉길 의사 홍커우 공원 폭탄 투척후 연행되는 사진
▲ 윤봉길 의사 기념관 안내문
당시 중국 장체스는 “중국인민 100만군이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인 청년 윤봉길이 해냈다”며 기뻐했고, 이 사건을 계기로 상해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을 시작했으며, 후에는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지원하였다.
홍커우 공원 거사 후 윤 의사는 일본 가나자와 육군구금소에서 사형되었다. 그런데 사형을 집행할 때, 일본인들은 홍커우공원에서 죽은 사람들에게 사죄하도록 무릎꿇게 하고, 총살 후 붉은 피가 이마에 두른 흰 띠에 배어나와 일장기를 나타내도록 이마 가까이에 총구를 대고 총살했고, 시신을 공원관리사무소 가는 길 밑에 매장하여 관리소를 오가는 사람들이 밟고 다니게 했다. 참으로 야비한 일본인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윤봉길 의사는 고려 때 여진족이 살고 있던 동북9성을 공격한 파평 윤씨 <윤관(尹瓘) 장군>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조국을 위하여 목숨을 초개와 같이 헌신한 영원한 젊은 청년 <윤봉길>의사에게 다시 한번 존경과 경의를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