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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윤봉길(尹奉吉) 의사(義士) 기념관

더 큰 뜻을 위해, 먼저 떠나신 독립투사, 윤봉길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19-1

2023.01.15(일) 17:21:58 | 상록수 (이메일주소:chulhwan01@naver.com
               	chulhwan01@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더 큰 뜻을 위해, 먼저 떠나신 독립투사, 윤봉길

 

윤봉길 의사 기념관 전경

▲ 윤봉길 의사 기념관 전경


충남 예산에 있는 <윤봉길 의사 기념관>을 방문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이봉창 의사>와 더불어 객관식 역사시험 문제로 자주 출제되던 분이었는데, 성인이 되어 이렇게 방문하니 기분이 새로웠다.
 

 

윤봉길 의사 사적비

▲ 윤봉길 의사 사적비



윤봉길 의사는 충남 덕산
(현 예산) 출신으로, 1932년 일본천황 생일(천장절)과 일본군의 상하이 점령 기념행사가 열리던 홍커우공원에 도시락 폭탄을 던져서 지역사령관 등 일본 고위직 다수를 타격하였다. 이때 다친 일본인 중 한명이 당시 주 중국공사 시께미쓰 마모루이다.

 

미주리호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시케미쓰 마모루

▲ 미주리호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시케미쓰 마모루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에게 패한 일본은 미국 항공모함 미주리호 함상에서 항복문서에 서명을 했다
. 미국 측이 제작·배포한 이때의 홍보영상에서 한쪽다리를 절뚝이며 지팡이를 짚고 배에 올라 천황을 대신하여 항복문서를 서명하는 일본 특사가 보이는데, 이자가 바로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의거로 한쪽 다리를 잃은 시케미쓰 마모루이다.

   
그렇다면 <의거(義擧)><테러(Terror)>의 차이는 뭘까?

 

  <의거(義擧)>라고 하면, 부당한 침략을 당한 약한 집단에 속한 자가, 정치적 항의를 대외적으로 알리기 위하여, 강한집단의 정치적 지도자를 골라서 , 폭탄 등 파괴적 폭력수단을 사용하여, 인명을 살상하는 행위로 정의될 수 있겠고,

 

  <테러(Terror)>, 정당한 폭력이라는 의거와 달리 “폭력을 써서 적이나 상대편을 위협하거나 공포에 빠뜨리는 행위라고 사전적으로 정의된다.

 

개념적으로는 구별이 되기도 하지만, 일본인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지도자를 폭사시킨 <테러> 라고 주장하겠고, 우리의 입장에서는 일제의 부당한 침략에 항의하고자 무고한 시민이 아닌 소수의 정치지도자의 제거를 목적했으므로, <의거> 라고 보는 게 당연한 것 같다.

 


신격호가 A급 전범 시케미쓰 마모루의 조카사위라는 설이 한때 퍼졌었다. 신격호 부인 이름이 시케미쓰 하츠코이고 신격호 일본 이름이 시케미쓰 다케오(重光武雄) 인데다가, 롯데가 외국인 배척이 심한 일본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시케미쓰 가문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신격호의 비밀(저자 정순태, 1998년 출간)> 이라는 책도 출간 되었었다.

하지만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 신격호 아버지 신진수의 창씨개명 성이 시케미쓰(重光)였고, 부인의 결혼 전 이름이 다케모리(竹森하츠코(初子였는데신격호와 결혼하면서 남편의 성을 따라 시케미쓰(重光하츠코가 된 것이기에풍문이 사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윤봉길 의사가 농촌계몽을 위해 쓴 농민독본 사진

▲ 윤봉길 의사가 농촌계몽을 위해 쓴 <농민독본> 사진


윤 의사는 보통학교 2학년 때 3.1운동을 목격했는데, 그 후 일본의 식민지 교육을 반대하여 다니던 학교를 자퇴하고 <오치서숙>이라는 서당에 들어가 한학을 공부했다. 크게 될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더니, 윤 의사는 어린 나이임에도 나라사랑 생각이 남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정부가 보내온 김구 회중시계

▲ 일본정부가 보내온 김구 회중시계


해방 후 일본정부는 윤봉길 의사의 유품을 유족들에게 보내왔는데
, 특이하게도 그 유품들 속에 김구 선생의 시계가 있다.

  
그 사연인즉, 1932년 윤의사가 상하이 거사를 앞두고 김구와 최후로 작별할 때 윤의사가 말하기를, “선생의 시계는 2원이고 자신의 시계는 6원인데 1시간 밖에 쓰지 못하니 바꾸자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광복 후 김구선생의 유품에 윤 의사 시계가, 윤 의사 유품에 김구선생 시계가 섞이게 되었다고 한다

 

윤봉길의사 기념관 1층 출입구 배경사진

▲ 윤봉길의사 기념관 1층 출입구 배경사진


1930년 윤 의사는 고국에서의 농촌계몽운동을 접고 중국으로 떠났다. 1908년생이니까 그때 윤 의사의 나이가 24세였다. 그는 우리에게 丈夫出家生不環(사내대장부는 집을 나가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결의에 찬 말을 남긴다.

 

윤봉길 의사 홍커우 공원 폭탄 투척후 연행되는 사진

▲ 윤봉길 의사 홍커우 공원 폭탄 투척후 연행되는 사진


1932년 일본천황 생일과 상하이 점령을 기념하는 행사가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열렸다. 이때 행사 참석자들에게 식사를 제공하지 않으니 도시락을 지참하라는 공지를 듣고, 윤 의사는 도시락과 물통으로 위장한 폭탄을 준비해 행사장에 입장하였고, 행사 참석자의 추도 묵념시간을 틈타 도시락폭탄을 행사장 단상에 투척했다. 이때 윤 의사의 나이가 겨우 26세였다.

윤봉길 의사 기념관 안내문

▲ 윤봉길 의사 기념관 안내문


당시 중국 장체스는 중국인민 100만군이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인 청년 윤봉길이 해냈다”며 기뻐했고, 이 사건을 계기로 상해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을 시작했으며, 후에는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지원하였다.

 

홍커우 공원 거사 후 윤 의사는 일본 가나자와 육군구금소에서 사형되었다. 그런데 사형을 집행할 때, 일본인들은 홍커우공원에서 죽은 사람들에게 사죄하도록 무릎꿇게 하고, 총살 후 붉은 피가 이마에 두른 흰 띠에 배어나와 일장기를 나타내도록 이마 가까이에 총구를 대고 총살했고, 시신을 공원관리사무소 가는 길 밑에 매장하여 관리소를 오가는 사람들이 밟고 다니게 했다. 참으로 야비한 일본인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윤봉길 의사는 고려 때 여진족이 살고 있던 동북9성을 공격한 파평 윤씨 <윤관(尹瓘) 장군>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조국을 위하여 목숨을 초개와 같이 헌신한 영원한 젊은 청년 <윤봉길>의사에게 다시 한번 존경과 경의를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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