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자왕이 포로가 된 슬픈 역사를 기억하면서
▲ 공산성 입구
공산성 출입문 앞에서 <금서루>를 올려 다 보면, 성벽을 따라 줄지어 있는 황색 깃발로 인해 마치 백제시대로 시간여행을 온 듯한 기분이 든다.
금서루 앞에는 47개의 비석군(碑石群)이 있는데, 예전에 이곳 공주관아에서 관리를 지냈던 사람들을 칭송하는 선정비나 공덕비가 대부분이고, 홍수로 무너진 <제의천 다리> 건립을 기념하는 비석이 특이하다.
▲ 공산성 둘레길 모습
▲ 공주 금강철교 전경
하지만, 웅진의 <공산성>은 군사적으로는 우수했지만, 백제 전역을 통치하기에는 너무 좁았고 남쪽의 <사비(지금의 부여 부소산성)>는 넓은 곡창지대를 접하고 있으나 주변에 이렇다 할 산이 없어서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에는 부적절했다.
이런 약점을 보완하려, 백제의 역대 왕들은 평화 시에 <사비>에 있다가, 전쟁이 나면 <공산성>으로 이동하여 전투하려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거리가 너무 멀어서 660년 나당연합군이 빠르게 공격하자 군대와 물자를 산성 내로 들여오기 전에 포위되는 바람에 백제는 멸망하였다.
백제 역사에 조예가 깊은 대전대 김갑동 교수의 말에 따르면, 이때 의자왕과 측근 예식진이 함께 항복하였다고 하지만, 의자왕은 포로가 되어 당나라로 끌려가고 예식진과 그의 후손은 출세한 거로 보아, 부하의 배신으로 백제가 조기에 멸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 공산성 왕궁지 발굴조사 푯말
그 후로도 오랜 세월 동안 군영(軍營)터로 쓰였던 이 공산성 땅은 일제 치하에서 당시 <공주갑부 김갑순>이라는 사람에게 팔렸고, 그가 공북루 앞에 커다란 쌀 창고를 지어 공주 각지로 쌀을 내다 팔면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성(城)안 마을』이 생겨났다(출처 : 위키백과 <공주갑부 김갑순>)
당시 성안마을 주민은 53세대 350명 정도였고 그중 토지를 소유했던 세대는 5가구에 불과해서, 지금은 당연히 여겨지는 백제 유적 복원사업을 위해 대부분 소액의 토지보상금만을 받고 모두 철거되어 쫓겨났었다고 한다(출처 : 『1990년 대전MBC 다큐』). 공익(公益)을 위해 개인이 희생되는 건 이때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 공산성 영은사 전경
▲ 배다리와 금강철교
▲ 공산성 약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