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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백제의 슬픔, 공산성

- 의자왕이 포로가 된 슬픈 역사를 기억하면서

2022.08.24(수) 11:00:37 | 상록수 (이메일주소:chulhwan01@naver.com
               	chulhwan01@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공산성 입구

▲ 공산성 입구


충남 공주에 있는 대표적인 백제 유적은 뭐니뭐니해도
<공산성(公山城)>이다. 공산성에 오르면, 죽은 자들의 왕릉이나 고분과 달리, 당시의 백제인이 되어 나당연합군과 싸우는 기분을 주기 때문인 것 같다.

공산성 출입문 앞에서 <금서루>를 올려 다 보면, 성벽을 따라 줄지어 있는 황색 깃발로 인해 마치 백제시대로 시간여행을 온 듯한 기분이 든다.

금서루 앞에는 47개의 비석군(碑石群)이 있는데, 예전에 이곳 공주관아에서 관리를 지냈던 사람들을 칭송하는 선정비나 공덕비가 대부분이고, 홍수로 무너진 <제의천 다리> 건립을 기념하는 비석이 특이하다.

 

공산성 둘레길 모습

▲ 공산성 둘레길 모습


공산성 투어는 나무 우거진
내부 산책로를 걷거나 성벽 둘레 길을 걷는 방법이 있는데, 이날은 운동도 할 겸해서 둘레 길을 택했다. 길이는 2.6km이고 소요시간은 성인 남자 걸음으로 40분 정도가 걸렸다.

 

공주 금강철교 전경

▲ 공주 금강철교 전경


공산성에서 금강이 흐르는 북쪽을 바라보면 왜 이곳이 역사적으로 군사요충지이었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 남쪽은 해발 110m의 가파른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북쪽은 금강이 천연 해자(垓字) 역할을 하면서도 금강을 통해 해상물자 수송도 가능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웅진의 <공산성>은 군사적으로는 우수했지만, 백제 전역을 통치하기에는 너무 좁았고 남쪽의 <사비(지금의 부여 부소산성)>는 넓은 곡창지대를 접하고 있으나 주변에 이렇다 할 산이 없어서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에는 부적절했다.

이런 약점을 보완하려, 백제의 역대 왕들은 평화 시에 <사비>에 있다가, 전쟁이 나면 <공산성>으로 이동하여 전투하려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거리가 너무 멀어서 660년 나당연합군이 빠르게 공격하자 군대와 물자를 산성 내로 들여오기 전에 포위되는 바람에 백제는 멸망하였다.

백제 역사에 조예가 깊은 대전대 김갑동 교수의 말에 따르면, 이때 의자왕과 측근 예식진이 함께 항복하였다고 하지만, 의자왕은 포로가 되어 당나라로 끌려가고 예식진과 그의 후손은 출세한 거로 보아, 부하의 배신으로 백제가 조기에 멸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공산성 왕궁지 발굴조사 푯말

▲ 공산성 왕궁지 발굴조사 푯말


백제가 멸망하고 나서도
, 천연의 요새라는 <공산성>의 강점 때문에 통일신라 때 <김헌창의 난>, 조선 인조 때 <이괄의 난> 등 대규모 반란 사건이 있을 때마다 왕의 임시 피난 장소로 이용되어 왔다.

그 후로도 오랜 세월 동안 군영(軍營)터로 쓰였던 이 공산성 땅은 일제 치하에서 당시 <공주갑부 김갑순>이라는 사람에게 팔렸고, 그가 공북루 앞에 커다란 쌀 창고를 지어 공주 각지로 쌀을 내다 팔면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안 마을이 생겨났다(출처 : 위키백과 <공주갑부 김갑순>)

당시 성안마을 주민은 53세대 350명 정도였고 그중 토지를 소유했던 세대는 5가구에 불과해서, 지금은 당연히 여겨지는 백제 유적 복원사업을 위해 대부분 소액의 토지보상금만을 받고 모두 철거되어 쫓겨났었다고 한다(출처 : 1990년 대전MBC 다큐). 공익(公益)을 위해 개인이 희생되는 건 이때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공산성 영은사 전경

▲ 공산성 영은사 전경


성안마을 철거 당시 사진과 비교해 보니까
, 배가 드나들던 공북루 앞 공터와 나루터 주변에 주로 사람들이 살았었는데, 지금은 그 자리에 <영은사>라는 절과 부속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뜻밖의 종교시설이라서 웬 절이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배다리와 금강철교

▲ 배다리와 금강철교


공산성
<공북루>에서 금강 쪽을 바라보면 <금강철교>가 보인다. 이 철교는 당초 <공주>에 있던 충남도청을 1932년 당시로는 불모지였던 <대전>으로 옮기는 대신 건설해준 다리다.

 

공산성 약도

▲ 공산성 약도


64
년간 백제의 왕도였고, 백제의 마지막 왕이었던 <의자왕>이 믿었던 부하의 배신으로 나당연합군에게 포로가 된 슬픔 가득한 <공산성>, 지금은 <공주>를 대표하는 문화 관광지로 한몫을 하는 것도 역사의 아이러니인 거 같다.

<의자왕>이 포로가 된 역사, 백제유적 복원사업을 위해 강제 철거된 <성안마을>, <공주갑부 김갑순>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공산성>을 둘러보니, 예전에 핸드폰으로 사진 찍으며 히죽거리던 <공산성>이 사라지고, 완전히 새로운 <공산성>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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