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금치 전적지 도로표지판
인터넷과 내비게이션의 도움을 받아서, 공주 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우금치전적지>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금치(牛禁峙)>는 예전 공주시와 <이인면>을 연결하던 <주미산>의 고개인데, 이 일대의 <이인면>이 공주시로 편입되면서 지금은 공주시 외곽이 되었다.
▲ 우금티전적 알림터
공주사찰 <원효사>를 보면서 왼편 도로를 따라 올라가니까, 주차장과 <우금티전적 알림터>가 나왔다. 공주시가 백제유적만을 강조해서 인지, 도심에서 떨어진 외곽에 위치해서 인지 몰라도 주차장은 무척 한산했다.
▲ 알림터 안쪽의 우금치전투 설명도
<우금티알림터> 안쪽으로 들어서면 <전시관>과 <영상실>이 있다. <전시관>에는 동학운동의 개요, 공주 우금치 전투의 배경, 1894년 당시의 전투상황을 날짜 순으로 전시하고 있고, 오른편에 있는 <영상실>에서는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개략적으로 보여주었다.
공주에서는 <우금치>를 <우금티>라고 발음하는 분들이 많아서, 전적지 곳곳에 두 단어가 혼재되어 있었다.
▲ 동학혁명군 위령탑
<우금티알림터> 앞쪽 길로 쭉 올라가면 <동학혁명군 위령탑>이 보인다. 어린 시절에 서울 수유리에서 본 <4·19 학생의거 위령탑>과 비슷한 형태로 보였다.
▲ 동학혁명 위령탑 안내문
위령탑 옆에는 <동학혁명위령탑 안내문>이 있었는데, 1985년 어떤 사회단체가 이념 갈등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일부 문구(5.16혁명, 10월 유신, 박정희 대통령 등)를 훼손하는 사건이 있었음이 적혀있다.
비문 훼손사건에 놀라 기억을 더듬어 보니, 내가 역사시간에 배울 때도 <동학난>, <동학혁명>, <동학농민전쟁> 등등으로 민주화 되면서 그 이름이 계속 바뀌었던 것이 떠올랐다.
▲ 무심한 우금치터널 위
<동학혁명군 위령탑> 옆으로 난 길을 따라 현재의 <우금치터널> 위로 올라 가봤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인지 온갖 산 벌레들이 얼굴과 팔에 달려들었다.
이곳이 바로 “총에 맞아도 안 죽는다”는 동학부적을 저고리 안쪽에 넣고선, 기관총과 대포로 무장한 관군과 일본군을 향해 수 천, 수 만의 농민들이 고함치며 죽창을 들고 뛰어 오르던 우금치 고개였다.
“그때 내가 그 현장에 있었다면?” 하는 상상을 하니, 마치 그때의 함성이 귀에 들리는 듯 했다.
▲ 우금치터널 장승들
<우금치터널> 위쪽의 공터에는 농민단체, 학교, 노동조합 등 여러 사회단체들이 세운 <장승>들이 있다. 구한말 우리의 할아버지들이 구별 없이 죽었건만, <장승>에 새겨진 글들을 살펴보면, 주로 진보이념의 모임들이 이곳에 장승을 세운 듯 보였고, 어떤 행사를 치르고 나서는 잘 관리가 되지 않아 수풀이 무성하고 새긴 글자는 흐릿해져 있었다.
▲ 공주 둘레길 표지판
<우금치전적지>는 <주미산 생태공원>에서 둘레 길로 연결되어 있어서, 맘만 먹으면 쉽게 접근이 가능하고 표지판도 곳곳에 잘 설치되어 있어 찾기도 쉽다.
▲ 우금치 전적지 안내도
동학농민전쟁(예전 내가 중고등학교 시절 때는 <동학 난(東學亂)>으로 배웠음)을 들으면서 외세에 우리나라가 망해가는 안타까움도 있었고, 동학군이 같은 조선 사람인 관군과 힘을 합쳐 일본군과 싸워야지 왜 동학군과 관군이 싸우는 지 이해를 못했었다
(
하지만 북부 월맹군의 승리 후 베트남 상황, 아프가니스탄 함락 후 탈레반에 의한 정부군과 그 가족들 처형소식을 들으니, 이제는 안타까움은 있지만 그때 상황이 이해는 갔다. 관군과 동학군은 글자 그대로 서로를 인정할 수 없는 적(敵)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겠지만, 만약 남북한 간에 전쟁이 발발하면, 본인들 가족과 지인이 남한과 북한에 있기에, 많은 경우 비슷한 일이 벌어질 것이 예상되고 또한 그게 자연스러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