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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신문뉴스

아산 각 지역의 3.1운동사(영인면)

유교의 영향 아래 있던 과거 양반층이 주도

2018.12.13(목) 17:33:30 | 온양신문 (이메일주소:ionyang@hanmail.net
               	ionyang@hanmail.net)

[편집자] 이 연재물은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아산기추진위원회에서 기획해 김일환 순천향대학교 교수와 천경석 온양문화원향토문화연구소 위원이 취재·집필해 아산지역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을 위한 학술조사용역 결과 보고서에 수록한 것을 일부 여약한 것입니다.


영인면에서는
314일에 처음 독립만세를 불렀다. 옛 아산의 구읍인 아산리 시장에서 약 15명이 태극기를 들고 나타나 시장에 있는 군중들에게 독립만세를 함께 부르자고 했다.

일제 헌병들이 출동해 일단 주동자를 체포해 독립만세운동은 잠시 진정됐다
. 그러나 그날 오후 6시경 읍 밖에서 수백 명이 집결해 아산리 읍내로 진입하면서 다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됐다.

온천리 헌병분견소에서 진압하기 위해 헌병
7명이 급히 출동했고 주동자 9명을 체포하고 해산시켰다. 이 독립만세운동은 신화리와 신운리 주민들의 중심으로 전개된 독립운동으로 보인다.

그런데 매일신보에는 공세리 예수교인 중에 불온한 운동이 있었으므로 헌병수비대는 이 지역에 주둔하고 목하 엄중 경계 중이라는 보도를 했다
. 이것은 영인면 만세운동의 주동자가 예수교인이라는 말이다.

두 번째는 영인면 영인산의 봉화시위였다
. 42일 오후 8시에 봉화를 피워 기독교인이 중심이 된 시위가 있었다. 아산리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구읍에서 횃불을 신호로 수많은 군중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상성리 뒷산 대흥당, 신운리 뒷산 형제봉, 백석포 뒷산 및 성내리 뒷산에서도 횃불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됐다 한다.

이에 대해서는
아산군지에서도 천주교 신자가 선두에 서서 수천명의 군중이 만세를 불렀다고 적고 있다. 앞의 314일 시위를 통해 볼 때 이들이 천주교인일 개연성이 높다.

한편 영인면의
43일 상황을 보여주는 증언이 있는데, 아산공립보통학교 학생 이세영과 김일수 등 학생 수십 명이 아산리 시장 장날을 기해 학교 교정에서 궐기해 장꾼이 모인 학다리까지 만세 행진을 했다고 한다. 만세에 참가한 주동자급 이세영과 김일수는 학생이므로 시장거리의 청소와 노역을 했다는 내용이다

이에 따르면 영인면의
43일 시위는 공보생이 중심이 된 시위였다. 온천리 헌병 분견대에서는 시위운동에 참여한 주민들을 붙잡아 약 1달 동안 갖은 고문을 가한 후에 비교적 온건하게 시위운동이 끝난지라 재판에 넘기지 않고 415일 즉결처분인 야만적인 태형으로 다스렸다.

다행이 영인면 사무소에 당시 태형을 당했던 주민들의 명단이 적힌 수형자 명부가 남아 있어 당시 참여자 중 일부를 알 수 있다
. 태형을 받은 주민은 신운리 주민 10, 신화리 주민 7명 합계 17명이었다.

영인면에서 전개된 일련의 시위를 살펴보면 김진호는 영인면의 수형자명부에 나오는 족칭을 통해 이 지역의 운동을 유교의 영향 아래 있던 과거 양반층이 이끈 운동이라고 본다
. 전체 17명의 수형자명부 중 양반 4명이 포함됐고 이들은 모두 신화리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의 연령은 103, 205, 304, 404, 501명이었고 양반 4명 외 다른 참가자들은 신화리와 신운리 주민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태형 60도를 선고받았다.

영인면 아산리 시장

▲ 영인면 아산리 시장


영인초등학교. 영인현 관아의 객사가 있던 자리

▲ 영인초등학교. 영인현 관아의 객사가 있던 자리


당시의 상황을 지금 다시 정확히 증언해 줄 사람은 없다. 다만 영인면 성내1리 안골 마을의 권종필(1938년생)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이 어릴 때 마을 뒤(북서쪽)에 있는 매방재(매봉재-필자)에서 망월 때 불 놨다.’고 말을 했다. 특별한 날에는 민속놀이로 달집 태우듯 봉화를 피우는 전통이 3.1운동기에도 봉화불을 피웠다고 보아도 무방하다고 보인다. 그러나 3.1운동과 관련하여 성내리에서 만세 불렀다는 이야기는 들은 바 없다고 한다.

 

* 고원상 관련 증언

영인면 신운2리 구르물 마을에 거주하는 고영걸(1933년생, 86)씨는 영인면 3.1만세운동에 참여하여 태형을 받은 고원상(高元相, 1872.6.20.~1934.6.29)의 증손이다. 장흥 고씨 집안이며, 필사한 가승보에 따르면 고원상의 본명(족보상의 이름)은 성주(性柱)이고 원상(元祥)은 자()이며 1872628일생으로 되어 있다. 3.1운동 당시 48세가 된다.

증손자인 고영걸씨 증언에 따르면 고원상
(성주)이 신운리 218번지로 이주해 자리잡은 뒤 지금까지 집 자리가 이어지고 있다. 직계 후손이 계속 거주하고 있다. 또 한 가지 의미 있는 증언은 고영걸씨의 작은 할아버지 고윤악(1912년생, 본명 광필)3.1운동 당시 주재소에 끌려가 갇혀 있게 됐는데 할아버지 고관흥(1892년생, 본명 광수)이 주재소에 가서 내 동생 내놔라!”고 소리쳤다는 이야기다. 명절 때 내려온 작은할아버지로부터 고영걸씨가 직접 들었다고 한다.(201845일 고영걸 증언)

그로 인해 고윤악이 풀려났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지만
, 이 말이 사실이라면 고윤악은 8세로 아산공립보통학교(현 영인초등학교) 학생일 수 있고 43일의 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 행진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산각지역의31운동사영인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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