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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지속가능한 농업, 후계농 양성·농촌 복지가 필수”

[인터뷰] 우리나라 유기농 산증인, 이호열 아름드리영농조합 대표(전 푸른들영농조합 대표)

2018.07.04(수) 09:32:00 | 나비제인 (이메일주소:dooaium@hanmail.net
               	dooaium@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1974년부터다. 소비자는 물론 생산자조차 유기농이 무엇인지 몰랐을 시절 이호열(62) 아름드리영농조합 대표는 전국 최초로 유기농업을 시작했다. 이호열 대표는 지금까지 45년 넘게 유기농을 지속하며 농민과 소비자가 상생하는 농업, 협업과 협력으로 지속 가능한 농촌을 이끄는 일에 앞장서 왔다. 또한, 1996년 한살림아산생산자연합회를 시작으로 350여 농민 회원 100%가 40억을 출자해 현재 12개 사업장에서 연 400억의 매출을 달성하는 ‘푸른들영농조합법인(이하 푸른들)’을 키운 장본인이며, 푸른들과 함께 30년간 아산에서 한살림 운동의 핵심 역할을 해 온 그다.

힘들고 어려울 때가 왜 없었을까. 농민들을 조직하고 끌고 나가며 무언가를 이룩하는 것은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과업이 아니었다. 이호열 대표는 “힘에 부치고 좌절이 찾아올 때면 평생 생명 사상을 펼쳐온 장일순 선생의 말씀을 되새기며 정신을 가다듬었다”고 회고했다.

전국한살림생산자연합회 고문으로 활동하며 아름드리영농조합 대표직을 수행하고 있으며 평생 지역농업을 고민하고 지속 가능한 농업을 실천하는 농부의 길을 걸어온 이호열 대표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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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농, 그 험난한 시작
아산시 음봉면 산정리 일대는 이순신 장군의 14대손 이호열 대표가 살아온 이 씨 집성촌이다. 이순신 장군의 절개를 그대로 품으려 해서일까. 산정리 농민들은 관에서 주도하는 농업을 고집스럽게 거부했다. 전통방식으로 농사를 지으려 했다. 생산성을 향상하는 줄모 대신 막모를 심었고 통일벼 같은 신품종을 심지 않고 전통적인 벼를 계속 지었다. 면사무소 공무원이 못자리를 갈아엎어도 농민들은 심던 벼를 다시 심으며 전통 논을 고수했다. 


- 전국에서 유기농을 최초로 시작하셨죠. 동기는 무엇인가요.
"고교졸업 후 편찮으신 형님 대신 아버님 말씀을 따라 농사를 지어야 했어요. 어떤 농사를 지어야 할지 고민이 많았죠. 이순신 후손들이 모여 사는 지역 특성이 있었고 모태신앙인이었던 나는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농법을 하고 싶었거든요. 깊이 생각해보니 그게 유기농이더라고요. 이때부터 유기농을 공부하고 평생 유기농업을 하며 살아왔어요."

이런 마을에서 살던 이호열 대표가 유기농을 시작한 건 어쩌면 당연한지 모르겠다. 하지만 관행농을 하더라도 생산성 향상이 우선 목표였던 과거 농촌 현실에서 유기농을 지속한다는 것은 보통의 인내심과 철학으로는 지속할 수 없는 소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 생각만큼 농사가 잘 됐나요
"1974년부터 유기재배 쌀농사를 시작했는데 처음엔 소출이 형편없었어요. 당연하다고 생각했죠. 배운다는 자세로 물러서지 않고 유기재배 쌀을 계속 생산했어요. 초창기 음봉감리교회와 YMCA의 양곡사업으로 힘을 얻어 1982년 산정리 마을 전체가 1000가마 규모의 유기재배 쌀을 출하하는 집단재배지역으로 성장했지요. 청년 농민 40여 명이 생산에서 가공, 유통까지 책임지며 서울과 소비자 직거래를 열었어요."

 - 판로 개척이 힘들지 않았나요
"80년대 서울과 직거래를 연 것도 전국 최초이지 싶어요. 이익이 생기면 소를 사서 키웠어요. 근데 망했어요. 유기농답게 좋은 값을 받았지만, 유기농이 여전히 생소한 때라 소비가 늘지 않았고 지금처럼 교통이 원활하지 않았거든요. 서울 전체를 돌다 보니 물류비용이 많이 들고 생각보다 수금이 어렵더라고요. 급기야 1984년 솟값 파동이 나면서 지역 청년들이 하나둘 떠나고 지역농업은 무너지기 직전이었어요. 참담했어요. 너무 일찍 시작했나 봐요. (웃음) 그러다 1987년 한살림 운동에 뛰어들면서 생산에 전념할 수 있게 됐어요." 


-푸른들영농조합을 12년이나 이끌며 상당히 규모 있는 성장을 일궈냈는데 성공적인 조직으로 인정받는 비결은 무엇이었나요
"생산 가공 유통 소비가 순환되는 구조이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1996년 한살림이 지역순환농업정책을 발표했는데 덕분에 계획생산이 가능해졌죠.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한 농업이 내겐 화두였어요. 당시 아산에는 한살림 조합원이 19명이었는데 아산생산자연합회를 조직해서 지역순환농업에 참여했지요.
쌀과 콩나물 두부 등을 생산유통하는 푸른들의 부산물인 콩깍지 콩비지와 지역에서 재배하는 유기 쌀의 쌀겨 등을 유기 축산 사료로 활용해 지역 유기 축산농가에 공급했어요. 푸른들은 친환경농산물 생산과 가공, 유통을 담당하고, 한살림천안아산소비자생협이 판매를 책임지는 지역순환 경제체제가 된 것이지요. 소비자들이 안심하고 농축산물을 구매할 수 있는 구조가 형성된 거예요. 개인의 힘보다는 함께 가려는 전체의 힘으로 이룬 성과라고 생각해요. "

현재 푸른들은 푸른들축산(유기 사료) 한들식품(한우 가공유통) 면 단위 영농조합(제터먹이 송악골 어진고을 아름드리)에서 콩나물 사업 등으로 수익을 올리며 총 12개 사업장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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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일순 선생의 가르침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이호열 대표가 푸른들을 조직한 건 농업을 지속하는 농민들 삶의 복지를 설계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사람과 조직을 의지대로 관리하기란 그리 녹록지 않았다.  


-푸른들이라는 거대한 조직을 이끌려면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요
"사람과 조직 관리가 어떻게 쉬울 수 있겠어요. 특히 제 이익만을 챙기려는 농사꾼을 보면 얄미웠죠. 학생운동과 농민운동을 해봤던 터라 강경하다면 강경한 성격이었던 거지요. 뜻대로 안 되는 일 때문에 평정을 찾지 못할 때면 장일순 선생은 ‘니가 그 사람 속에 들어가 보았냐, 엎드리고 살아야 한다’ 며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게끔 가르치셨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혜와 용기를 주셨어요. 선생은 남을 배려하는 행동을 실천한 분이어서 말씀 하나하나가 허투루 들리지 않았어요." 


- 이 대표의 제안으로 제터먹이가 사회적협동조합으로 출발했는데. 순익을 배당하지 않는 사회적협동조합에 대해 조합원들의 불만은 없었나요  
"설득하기 쉽지 않았죠. 찾아가고 또 찾아가고 조합원의 자녀까지 만나서 설득하고…. 결국 조합원들은 제터먹이의 ‘사회적 의미’에 동참해 주었어요.  농업소득만으로 삶의 질을 높이긴 어려워요. 넉넉함을 떠나 베풀고 나누는 일에 익숙해야 해요. 사회적협동조합은 이익을 지역에 봉사하고 인재를 키우는 일에 쓸 수 있어요. 더불어 살 수 있는 바탕을 만드는 거지요. 지역을 이끄는 건강한 조직이 많아지고 협업 협력이 잘되면 농촌이 지속 가능할 수 있어요. "


후계농 육성과 농촌 복지, 현재 농촌이 당면한 필수해결 문제
지속 가능한 농업을 위해 푸른들은 파격적인 준비를 해왔다. 조합원 자녀가 농업 관련 대학에 진학하면 4년 동안 전액 장학금을 주고 있다. 푸른들 직원들이 대학원을 진학할 때도 장학금을 지원한다. 이유는 후계농 육성을 위해서다. 이호열 대표는 지금 농촌의 가장 시급한 문제로 후계농 부족을 꼽는다.


-지속 가능한 농업을 위해 푸른들은 어떤 준비를 하고 있나요
"현재 농사짓는 사람들은 대부분 고령층이에요. 이분들이 돌아가시고 나면 농촌이 유지될 수 있을까요. 농촌의 마을공동체가 남아있게 하려면 후계농을 육성해야 해요. 푸른들은 조합원 자녀가 농업 관련 대학에 진학하면 4년 동안 전액 장학금을 주고 있어요. 금액이 적지 않아요. 푸른들 직원들이 대학원을 진학할 때도 장학금을 지원하고요. 하지만 농업관련학과에 진학하는 자녀들은 거의 없어요. 안타까워요."

이런 현실은 이 대표에게 많은 고민을 안겨주었다. 실상 농민들은 노후를 스스로 챙기지 않으면 보장받기 어려운 사회구조에 놓여 있었다. 이 대표는 농부로서 현장에서 깨달은 경험들을 토대로 냉철하고 절실한 분석을 내놓았다.  

-지속적인 농업이 가능해지려면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요
"농업을 하겠다고 들어오는 청년들이 있어도 잘 버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이상적으로 배운 농업과 실제는 다른 데다 기존세대들은 청년들을 위해 양보하려는 마음가짐이 부족하더라고요. 평생 농사만 짓고 살며 딱 먹고 살 만큼만 벌기 때문에 농사만으로 노후를 보장받지 못하는 농촌 현실이기에 더욱 그래요. 농민들의 노후 복지까지 책임지는 농업의 필요성이 매우 절실해졌어요. 중요한 건, 농촌의 복지는 농민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특히 유기농업이 도태되면 도시민들도 안전한 먹거리를 취하기 어려워져요. 지속 가능한 농업은 농민과 소비자, 정부가 함께 책임져야 할 구가의 우선 과제라고요. 이게 바로 생명 운동이죠. 특히 국가는 목숨을 걸고 후계농 육성정책을 펼쳐야 해요. 그래야 농민과 농업이 살며 국민 전체가 살 수 있어요. "


<장일순 선생은>
무위당 장일순 선생(1928~1994)은 생명 사상을 몸으로 실천한 교육자이며 실천 운동가이다. 무위당의 생명 사상은 그가 남긴 ‘좁쌀 한 알에 우주가 있다’는 말로 압축된다. 모든 생명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것을 생명 운동의 근간으로 삼았으며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공존이 가능한 공생과 살림의 문명을 주창했다. 그의 근본 화두는 생명이었으며 산업 문명의 위기에 대한 극복 논리로 생명 사상을 남겼다.
원주를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본거지로 만든 지도자인 장일순은 교육활동 정치활동 협동조합 운동 등을 전개하면서 평생 무위(無爲)를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장일순의 사상과 활동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에서 현재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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