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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민증 만들어준다더니…”

아산부역혐의사건’ 희생자들, 상당수 속아서 끌려가 총살 당해

2018.03.19(월) 11:24:11 | 관리자 (이메일주소:ionyang@hanmail.net
               	ionyang@hanmail.net)

희생자들, 상당수 속아서 끌려가 총살 당해

중리 민간인학상 유해발굴(3) 

한국전쟁기에 학살 당하고 암매장 됐던 유해를 발굴하는 작업이 지난 222일부터 현재 배방읍 중리에서 진행되고 있다. 이 작업은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 진행하는 작업으로 아산시가 일부 재정을 지원하고 있어 특히 의미가 있다

이에 온양신문은 이 발굴작업 및 한국전쟁기 아산 지역에서 전개된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는 차원에서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의 자료를 토대로 연재한다. <편집자

아산 부역혐의 희생사건 

세을금광 뒤 언덕에서 바라본 중리3구와 건너편 배방산(성재산). 성재산 방공호는 세일금광과 함께 민간인 학살이 가장 많이 이루어진 곳으로 꼽힌다.

▲ 세을금광 뒤 언덕에서 바라본 중리3구와 건너편 배방산(성재산). 성재산 방공호는 세일금광과 함께 민간인 학살이 가장 많이 이루어진 곳으로 꼽힌다.

이번 중리 폐금광에서 발굴되고 있는 학살 희생자들은 대부분 부역험의로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른 바 아산 부역혐의 희생사건으로 불리우는 이 사건은 1950926일 미군 기갑사단이 대전, 조치원을 차례로 수복하고 북진 중이며 천안을 통과해 서울로 진격할 것이라는 소식이 아산지역에 퍼지자 인민위원회 및 내무서 등은 사무를 중지하고, 반대로 지하활동을 하던 반공단체들이 공개적인 활동을 시작하면서 시작됐다

좌익 측 사무가 중단되자 아산군의 중심지인 온양읍을 비롯해 염치면, 탕정면 등 동북부지역에서 먼저 치안대가 조직돼 부역자 색출 및 체포가 시작됐다. 특히 929일 온양경찰이 복귀하면서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다음은 생존자 증언 등으로 수합한 사건 경위들이다

배방면 사건(사건번호 다-898)
온양읍 방축리3구의 김갑봉·김갑영·김갑만 형제는 집 뒤 방공호에서 은신 도중 1950103(김갑영·김갑만)104(김갑봉) 치안대원 10여 명에 의해 점촌(방축리1) 그릇 굽는 가마에 감금됐다. 이 지역을 인민군이 점령했을 때 김갑영은 동네 반장을, 김갑봉은 아산군인민위원회에서 서기, 김갑만은 온양호텔에서 근무했었다는 이유에서였다

김갑봉 형제가 연행된 후 김갑영의 처 오○○은 그릇 굽는 가마로 밥을 두 번 날랐는데, 처음 갔던 105일에는 김갑봉과 김갑영을 면회했지만 두 번째는 보초 서던 자들이 밥을 두고 가라고 해서 면회를 하지 못했다. 세 번째 갔을 때, 김갑봉 형제가 온양경찰서로 이송됐다는 말을 듣고 106일 온양경찰서에 면회를 갔지만 거절 당했다

며칠후 오○○은 온양경찰서에 근무했던 친척으로부터 이들 형제가 온양경찰서로 이송됐다는 것은 사실무근이며 온양 금광 구덩이에서 살해됐다는 소식을 접했다

신창면 사건(사건번호 다-8461)
195010월 초 신창면 실옥리의 이애기는 치안대에 두 번 연행됐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이애기는 해방되던 해에 남편을 잃고 떡 행상으로 생계를 이어갔는데 수복 후 대한청년단의 김○○에게 연행됐다

아들 김석희는 이애기가 감금됐던 청년단 사무실로 밥을 5번 나르면서 면회했으며, 이애기는 감금 10일 동안 고문에 의해 거짓 부역혐의를 자백하자 풀려났으나 바로 그날 저녁 다시 연행됐다가 살해됐다

이애기의 친정은 염치면 백암리 덕수이씨 집안으로 전쟁 당시 충무공 봉사손 이응렬이 사촌오빠였다. 이응렬은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돼 있었고 그 가족들은 좌익활동가가 많았다. 특히 이애기의 친오빠 이명렬은 염치면분주소장으로 활동했다가 수복 후 처형됐다

이와 같은 배경 때문에 이애기의 아들 김석희는 어머니가 좌익세력과 공모해 대한청년단원 김○○의 부 김상구를 해치려 했다는 혐의를 받고 대한청년단에 의해 살해된 것이라고 진술했다

온양읍 사건(사건번호 다-9576)
195010월 초 온양읍 좌부리의 성유봉은 인민군 점령시기 누이 성유분이 인민위원회에서 심부름을 했다는 이유로 연행되려 할 때 막아서다가 동생 대신 온양경찰서로 연행됐다고 성유봉의 아들 성기환이 진술했다

또한 성기환은 당시 총소리를 들었던 동네 어른들로부터 온양경찰서에 수감됐던 사람들은 성재산(지금의 배방산) 방공호에서 집단총살됐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성유봉의 연행을 목격했던 동생 성○○은 형이 인민군 점령기에 내무서에서 근무했다는 이유로 온양읍 치안대에 의해 두 번 연행됐다고 했다

첫번째는 무사 귀가했는데 두 번째는 누이 성유분과 함께 연행됐다가 성유분은 돌아오고 성유봉은 온양경찰서로 이송됐다. 곧 모친이 면회하러 갔으나 수백 명의 사람들이 갇혀 있었고 면회는 불가능했다. 얼마 후 성○○은 온양경찰서 수감자들이 성재산 방공호에서 살해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선장면 사건(사건번호 다-6985)
195010월 중순 선장면 궁평리의 최홍신은 도고면의 이모 집으로 피신했다가 치안대에 의해 체포돼 온양경찰서로 연행된 후 살해됐다. 최홍신은 전쟁 전부터 좌익활동을 했는데 수복 후 부역혐의로 체포된 것이었다

195010월 말(음력 9월경) 최홍신의 누이 최정숙은 오빠 최홍신의 사식을 넣어달라는 요청을 전해 듣고 경찰서에 갔다가 유치장에 있던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넘겨졌다고 해서 만나지 못했다

그 무렵 배방면 남리(당시 탕정면 구령리, 성재산 앞마을 돌장원 옆)에 살던 최정숙은 밭일을 하러 나갔다가 온양경찰서에서 트럭으로 실려 오는 사람들을 봤다고 증언했다. 목격장면은 다음과 같다

밭에 나가 김장배추 벌레를 잡으려고 하는데 온양경찰서로부터 사람들을 실은 트럭이 돌장원 입구(성재산 앞마을)로 왔다. 우리 집이 바로 길옆이니까 보았다. 차에 탄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사이에 서 있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호송하는 사람들로 보였다. 모자들을 쓰고 있었다

(트럭으로 사람들을 나르기를) 하루에 한 번도 하고 두 번도 하고 그랬는데 두 번 할 때는 아침과 저녁에 날랐다. 안 보려고 피해도 너무 가까워서 다 보였다

(트럭을 목격한 횟수는)못 갔어도 5~6번은 갔다. 차로 사람들을 나른 다음에는 돌장원 입구 교통호에서 총소리가 들렸고 만세소리도 들었다. 우리 집에서 거리가 200m 정도도 안 됐기 때문에 총소리는 굉장히 크게 들렸고 그 소리를 들으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루는 어두울 때인데 그날도 차에 사람을 싣고 지나가더니 총소리가 났었는데, 누군가 와서 삽을 달라고 해서 삽을 준 적이 있다” 

당시 온양경찰서 사찰계에 근무했던 이○○은 경찰서와 약 200~300m 거리인 양조장 앞에서 부역자들을 가득 태운 지무시(GMC)’가 배방면 돌장원(성재산 앞마을)’을 수차례 오갔다고 진술했다. 또한 성재산 방공호와 5리 거리의 좌부리에서 살던 성창봉도 수복 시기 매일 총성을 들을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1950년 수복 후 온양읍(좌부리, 방축리, 실옥리 및 아산군 일대에서 치안대에 의해 온양경찰서로 이송된 부역혐의자들은 그 수가 너무 많아 온양경찰서 유치장 뿐 아니라 경찰서 뒷마당에까지 구금됐다

당시 온양경찰서 수사계에 근무했던 임○○에 의하면 매일 밤 트럭으로 40~50명의 부역자들을 처형장소인 배방면 남리 성재산 방공호로 실어다 처형했다고 한다. 방공호는 인민군 점령기에 조성된 것으로 현재 그 자리에 들어선 신도리코 공장과 크라운제과 공장을 둘러 약 2km 정도 규모였다

위의 진술들을 종합해보면 9.28수복 시기 배방면 성재산에서 희생된 사람은 최소 200여 명에 이른다

배방면 사건(사건번호 다-117)
195012월 초 배방면 북수리 4구의 김석남은 온양경찰서에 수감됐다가 살해됐고 그 가족들은 경찰에 의해 배방면사무소 창고로 연행된 후 살해됐다

김석남은 1949년 좌익활동을 했던 성낙구의 부친과 함께 북수리 이장 곽세영이 공출을 착복한 사실에 대해 소를 제기해 갈등이 생겼다. 이후 전쟁이 나고 수복이 되자 곽세영의 사위 정○○(청년방위대 소대장)가 김석남과 그 가족을 빨갱이로 몰았고 김석남은 이리저리 피해 다니다가 195011월 말 임○○의 집에 이틀 머문 후 온양경찰서에 자수했다

이후 12월 초 김석남의 아들 김장성은 온양경찰서 통신계에 근무하던 외삼촌 최만덕으로부터 부친의 희생 소식을 들었다

같은 시기 온양경찰서에 수감됐던 유○○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수감자 수십 명이 동시에 사라진 적이 있는데 모두 희생된 것이라고 했다. 김석남이 온양경찰서에서 살해됐던 12월 초, 김석남의 처 최일순과 김정희(), 김정순(), 김기성(아들)은 도민증을 발급해준다던 경찰에 의해 면사무소 창고로 연행됐다가 살해됐다

이와 함께 의용군으로 징집 나간 이장 방씨의 가족 몇 명, 역시 의용군으로 징집된 부친을 둔 성낙구 가족으로 그의 모, 조부 등 네다섯 명, 그리고 엄진섭과 그 처도 살해됐다

장재리 사건(사건번호 다-10527)
19511월 초 배방면 장재리에서는 양대운과 가족 이만순(), 양춘자(), 양구창(아들), 양춘호(아들), 양영순(), 그리고 임신 중이었던 양대운의 동생 양대록의 처 윤순희, 그의 자녀인 유아 2명등은 장재리 주민들과 함께 도민증을 받기 위해 배방면사무소로 갔다가 이후 살해됐다. 양대운과 양대록이 인민군 점령 시 부역을 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양대록·양대운 가족들의 연행을 목격했던 양대운의 장인 이종구는 1951년 음력 3월 조치원에서 신청인 양봉임의 모친에게 장재리 가족 희생 소식을 전했다

배방면 사건(사건번호 다-322)
195115일 배방면 세교리1구의 전달석과 모 유씨, 동생 전유, 형 전윤옥, 형수 박씨, 조카 전해달, 전해광, 형 전준옥, 형수 심씨, 조카 전해자, 전해종, 미작명 영아 1명등 가족은 도민증을 발급해주고 안전한 곳으로 피난시켜주겠다는 경찰의 지시를 받고 나갔다가 배방면사무소 창고에 감금됐다. 목격자들은 전달석의 형 전윤옥과 전준옥의 인민위원회 활동경력 때문에 가족들이 살해됐다고 했다

배방면 창고는 면사무소와 나란히 있던 지서 뒤 곡물창고 2개와 배방역전 창고 1개를 통칭하는 것으로 1.4후퇴 시기 배방면민들이 감금된 곳이었다. 부역혐의자 가족들은 별도로 관리, 도민증 발급을 이유로 은밀히 야간에 연행됐다.

감금기간은 보통 2~3일 정도였는데 195012월 창고 보초를 섰던 임○○은 면내 주민들이 밤에 연행돼 왔고 불복하면 맞거나 발가벗겨지는 것을 목격했다. ○○이 보초를 섰던 당시에는 40~50명의 주민들이 갇혀 있었으며 부녀자, 노인, 유아는 물론 영아까지 포함됐다.

참고인 전○○19511월 초 치안대원들이 도민증을 발급해줄 것이니 이장 집으로 모이라고 해서 배방면 주민 60~70명이 지서 뒤 창고로 연행돼 감금됐다고 증언했다.

배방면 창고에 감금됐던 주민들은 생존자와 목격자에 의하면 저녁 무렵 장날 소떼 엮듯이새끼줄로 묶인 채 끌려가 배방면 성재산 방공호에서 총살당했다.

195115일 저녁 세교리 전달석과 그 가족 및 세교리 주민 30여 명이 연행돼 총살됐다. 이때 전유, 전해천, 김병학 등 세교리 주민과 서울에서 피난 와 있던 이광수는 처형장소로 가던 중 도망 나와 생존했다.

195117~8일에는 배방면 향토방위대가 면내 10여 개 마을에서 도민증이 없는 사람은 도민증을 발급하고 시국이 시국인 만큼 안전한 곳으로 피난시켜주겠다며 남녀노소 300여 명을 면 곡물창고에 집합시킨 후 저녁에 뒷산(성재산)’으로 새끼줄로 묶어 끌고 가 총살했다고 생존자 맹석재는 증언했다.

당시 희생자들은 가족 단위로 살해됐기 때문에 유족이 없는 경우가 있었으며 유족이 있더라도 생존을 위해 곧 고향을 떠나버렸다. 그러므로 시신수습은 거의 이루어질 수 없었다.

참고인 임○○1951년 봄 성재산 아래 자신의 논으로 농사지으러 갔을 때, 방공호에 시신이 가득한 것을 목격했다. 설 묻어서 손, 옷가지 등이 나와 있었고 어린애가 하루, 이틀 울다가 죽었다. ○○은 당시 시체 썩는 냄새가 지독해 일을 하지 못했고 결국 그 땅을 팔아버렸다.

그런데 1.4후퇴 시기에는 성재산 방공호 뿐 아니라 성재산과 마주한 설화산 아래 세일 폐금광 또한 집단 살해장소로 사용됐고 희생규모도 대단히 컸다.

195116일 저녁 8시 배방지서 순경 한정우는 향토방위대장 한상익과 공모해 좌익분자 및 동가족’ 183명을 창고에 예비검속해 두고 전원 총살 후 부근 금광굴혈에 사체를 유기했다.

처형하기 전 각 가구당 10세 미만 남아는 살려 보내졌다. 돌려보내진 남아 중 확인된 자는 북수리의 김무일과 성낙구이다. 당시 방공호에 주민들을 묻고 석유를 뿌려 불을 질렀다는 소문을 듣기도 했다. 김무일은 당시의 기억을 거의 하지 못했고 성낙구는 현재 소재불명이다.

금광굴혈은 배방면 세일 폐금광을 가리키는 것으로 금을 채굴하던 시기 금방앗간이 있었던 중리3구에서는 뒷산에 있다 하여 뒷터골이라고 불렀다

폐금광의 희생자들은 주로 온양, 배방, 신창 등 주민들이었고 사체를 매장할 때에는 중리3구 청년들이 동원됐다. 당시 배방면사무소에 근무했던 맹○○에 의하면 14후퇴 시기 온양경찰서로부터 배방지서와 면사무소 및 각 이장에게 부역자와 그 가족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고 한다.

그러므로 1.4후퇴 시기 배방면 창고에 감금됐던 주민들은 성재산 방공호에서 살해되기도 했고 중리3구 정미소(구 금방앗간)로 옮겨져 살해된 후 폐금광에 매장되거나 폐금광에서 살해되기도 랬다. 위에서 언급한 참고인들의 진술을 종합하면, 희생된 주민들의 수는 200~3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증언들
신청인 성기환은 부 성유봉의 유해매장지는 찾을 수 없었지만 1955년 성재산 방공호에 간 적이 있어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산에 칡뿌리를 캐러 갔었는데 신발과 옷가지가 방공호를 따라 일렬로 쭉 약 50m가량 있었다. 묻었던 것이 일부 드러난 것이다.”

신청인 최정숙도 집단희생장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내가 거두어 키우던 피난 온 머슴아이를 시켜 나무를 해오라고 했는데, 그 아이가 나무를 해오면서 그곳(성재산 방공호)에는 가기가 무섭다고 했다. 몇 년 동안 같이 살았는데 거기에 가면 삐져나온 해골바가지가 대단히 많다고 늘 말하곤 했다.”

이와 같은 민간인 희생의 가해자는 온양경찰 및 경찰의 지시를 받은 의용경찰, 대한청년단, 청년방위대 등 치안대였다. 온양경찰은 사찰계에서 주도해 부역혐의자를 체포. 구금. 조사. 처벌했다.

각 지서에서는 본서로부터 파견된 사찰경찰이 지서주임 및 소속 순경 등과 함께 부역자를 분류. 처벌했다. 부역혐의자 체포는 주민들의 증언 혹은 밀고로써 이루어졌고 조사과정에서는 구타, 전기고문 등이 따랐다.

그런데 체포된 사람들 중 부역과 무관한 사람들도 적지 않아 억울하게 휩쓸려 죽은 사람들도 많았다. 부역혐의자들의 처형은 상부의 지시가 있기도 했지만 경찰서장의 재량으로 이루어지는 부분이 적지 않았고 희생규모도 온양경찰서장 및 해당 지서주임의 재량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부분이었다.

처형이 집행될 때에는 경찰 1명의 인솔 하에 치안대원들이 부역혐의자들을 처형지로 끌고 가 총살했다. 이러한 부역자 체포.살해는 1951년까지 계속됐다.

세을금광 뒤 언덕에서 바라본 넙티고개 방향. 좌측 태화산, 우측 망경산 방향이다.

▲ 세을금광 뒤 언덕에서 바라본 넙티고개 방향. 좌측 태화산, 우측 망경산 방향이다.

세일금광 유해발굴 현장.

▲ 세일금광 유해발굴 현장.

 

세일금광 유해발굴 현장. 특히 나무 주변 뿌리에 휘감긴채 발굴되는 유해가 많이 보였다.

▲ 세일금광 유해발굴 현장. 특히 나무 주변 뿌리에 휘감긴채 발굴되는 유해가 많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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