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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계백 이곳에서 최후를 맞이했던가

2015.12.14(월) 21:26:49 | 맛난음식 (이메일주소:linecplan@naver.com
               	linecplan@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황산벌 전투의 승자는 김유신인데요.

승장인 김유신보다 더 유명한 사람이 계백장군입니다. 5,000의 결사대로 김유신(金庾信)과 흠춘(欽春)·품일(品日) 등이 거느린 5만 명의 신라군을 막아 선 장군이 바로 계백이었죠. 그런데 그 최후의 전투를 한 곳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은데 논산의 양촌을 지나 연산으로 나가는 길에 황산벌 계백장군 최후 전적지가 보이더라구요. 그래서 궁금했습니다. 얼마나 넓은 곳에서 신라군을 맞이 했던 것인지 말이에요.

 

황산벌 계백장군 최후 전적지로 가는길

▲ 황산벌 계백장군 최후 전적지로 가는길


왠만한 곳에서도 그 흔적이 드러나지 않는 그 최후의 전적지가 궁금했던 것 같습니다. 김유신이 이끄는 5만 명의 신라군은 7월 9일 이미 탄현을 넘어 황산벌로 진군해 오고 있을때 탄현을 막지 못한 의자왕이 계백을 이곳에 보냈습니다.
 

이곳에서 최후를 맞이했던가요.

▲ 이곳에서 최후를 맞이했던가요.


아까 그곳에서 조금 들어오니까 이렇게 큰 돌에 황산벌 계백장군 최후 전적지라고 새겨져 있었습니다. 의자왕의 방심에 의해 계백장군이 이곳에서 장렬히 전사했던 것이 맞는건가요. 원래 계백장군은 삼국 사기에 기록이 거의 없는데요. 그나마 나온 것은 바로 황산벌 전투외에는 언급이 안되었다고 합니다.
 

2008년 12월 12일 12시

▲ 2008년 12월 12일 12시


이곳을 언제 발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에 이 돌이 위치하게 된 것은 2008년 12월 12일 12시라고 씌여져 있습니다. 좀 묘하군요. 왜 12월 12일 12시였을까요. 백제의 방어 전략은 적당하게 당나라를 이끌어 들이고 신라군은 탄현 부근에서 공격하려고 했는데 너무 빨리 진격을 해서 제대로 방어전략을 세우기도 전에 패했던 거라고 볼 수 있어요.

 

황산벌의 험준한 공간

▲ 황산벌의 험준한 공간


주변을 살펴보니까 황산벌에 먼저 이른 계백은 험준한 곳을 가려 3개의 영채를 세우고 신라군을 기다렸다는 느낌도 나는 것 같고 감은 안오더라구요. 이곳에서  죽기로 싸우는 백제의 5,000결사대는 신라군과 네 번 싸워 네 번 모두 승리하였다고 합니다. 김유신으로는 참 체면이 안섰을 것 같았습니다.

 

어둠이 내려 앉은 공간

▲ 어둠이 내려 앉은 공간


날이 어두워져서 그런지 마치 계백과 5,000결사대의 혼이 어둠과 함께 내려 앉는 느낌이 듭니다. 출진 전에 아내와 지식을 자기 손으로 죽이기까지 하고 전장으로 나아갔던 계백은 이곳에서 최후를 맞이했던 모양입니다. 계백 장군의 패배 이후로 의자왕은 지금의 공주인 웅진성으로 피했지만 얼마 되지 않아 함락되고 멸망을 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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