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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소정방 군대의 배가 정박했다는 ‘배맨나무’

이야기가 있는 충남의 나무 ⑭예산 대흥 상중리 느티나무

2014.06.23(월) 00:03:18 | 탈론 (이메일주소:malgmywoo@naver.com
               	malgmywoo@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교과서에 실린 ‘의좋은 형제’의 이야기로 유명한 슬로시티 충남 예산군 대흥면.
 
형은 새살림을 차린 동생의 양식이 많이 필요하다 하여 동생 몰래 밤마다 지게로 벼를 져다가 동생 집에 가져다 놓고, 동생은 식구가 많은데다 제사를 모시는 형의 양식이 더 필요하다 하여 역시 형 몰래 벼를 형 집에 갖다 놓았다 한다. 어느 날 밤 벼를 지고 가던 형제가 다리에서 만나는 바람에 시일이 지나도 자신의 집에 있는 벼의 양이 변하지 않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는 이 이야기는 고려 말 대흥면에 살던 이성만, 이순 형제의 실제 이야기다.

예산군 대흥면은 '의좋은 형제'의 이야기로 유명한 곳이다.

▲ 예산군 대흥면은 '의좋은 형제'의 이야기로 유명한 곳이다.

 
대흥면사무소 옆에 있는 효제비에는 이러한 이야기가 상세히 적혀있다. 원래 이 효제비는 예산군 광시면 월송리 ‘개뱅이다리’ 옆에 있었는데, 1972년 예당저수지 공사 중에 발견되어 대흥면사무소 옆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대흥면사무소 옆에 의좋은 형제 효제비가 있다.

▲ 대흥면사무소 옆에 의좋은 형제 효제비가 있다.

 
효제비에 따르면 형은 윗들거리(상중리)에 살고 동생은 오리골(월송리)에 살았다고 하는데, 형이 살았다는 상중리 마을의 고풍스러운 느티나무가 오늘의 주인공이다. 봉수산 자락에서 흘러내려오는 개천가에 자리 잡은 이 느티나무의 수령은 무려 1,050년으로 충남도가 공인한 도내 최고목이다.

충남도내 가장 오래된 나무로 공인된 상중리 느티나무의 웅장한 모습

▲ 충남도내 가장 오래된 나무로 공인된 상중리 느티나무의 웅장한 모습

 
지난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된 이 나무의 높이는 19m이며 가슴높이 둘레는 약 10m로 한눈에 보기에도 그 자태가 웅장하다. 마을에서는 이 느티나무를 매우 신성시해서 2월 초하룻날 제를 지내고, 칠월 칠석날에는 두레먹이를 하면서 간단하게 잔을 붓고 고사를 지내왔다.

가슴높이 둘레가 10m에 이르는 웅장한 나무이다.

▲ 가슴높이 둘레가 10m에 이르는 웅장한 나무이다.

제를 지낸 뒤 마을 사람들이 소원을 적은 종이를 꽂아 놓았다.

▲ 제를 지낸 뒤 마을 사람들이 소원을 적은 종이를 꽂아 놓았다.

 
두레먹이란 두레를 구성한 마을에서 행하는 것으로 온 마을 사람들이 시원한 느티나무 아래나 공터에 모여서 품값을 결산하는 일이다. 소유한 논이 적어 일을 더 한 사람은 품값을 찾아가고, 반대로 넓은 땅을 소유한 농가에서는 품값을 낸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은 봄철에 나뭇잎이 피는 것을 보고 농사의 풍흉을 점치기도 했다고 한다. 이 나무는 동네에서 ‘배맨나무’로 불리고 있다. 소정방이 이끄는 나당연합군이 백제 부흥군의 마지막 거점인 임존성을 공격할 때 이 나무에 배를 맸다는 전설에서 비롯됐다.
 

소정방이 이끄는 나당연합군의 배를 이 나무에 맸다는 전설이 있다.

▲ 소정방이 이끄는 나당연합군의 배를 이 나무에 맸다는 전설이 있다.

주민들은 봄에는 이 나무의 잎을 보고 한해의 풍흉을 점쳤다고 한다.

▲ 주민들은 봄에는 이 나무의 잎을 보고 한해의 풍흉을 점쳤다고 한다.


이 마을의 뒤에 솟아있는 봉수산(대흥산·484m) 자락엔 백제 부흥운동군의 최후 격전지였던 임존성이 있다. 백제 유민의 한과 투혼, 그리고 배신과 좌절이 겹겹이 서리고 맺힌 성이다.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에 항복하고 난 뒤, 흑치상지와 의자왕의 사촌 복신, 승려 도침이 이 임존성에 백제 유민을 이끌고 모여 3년 반에 걸쳐 결사항전을 벌였던 곳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당나라 소정방 군대도 신라 김유신 군대도 군사가 많고 지세가 험해 함락시킬 수 없었던 성이다. 그러나 내부 분열로 어이없이 성은 함락(663년) 되고 백제 부흥운동은 그것으로 끝이 났다.

망국의 현장을 지켜본 상중리 느티나무

▲ 망국의 현장을 지켜본 상중리 느티나무

 
이 때 소정방 군대가 서해 뱃길을 타고 와 벼룩 부리란 곳에 배를 댔는데, 임존성 공격 때 이 나무에 배를 묶었다고 전해온다. 나라가 망하는 현장을 지켜보면서 맺힌 한이 얼마나 컸을까? 당시 배를 묶었던 상처가 아직도 남아 있는 것처럼 나무 밑동은 매끄럽지 못하고 둥글게 부풀어 올라있다.
 

배를 묶었던 상처가 아직도 남아있는 것처럼 밑둥이 울퉁불퉁하다.

▲ 배를 묶었던 상처가 아직도 남아있는 것처럼 밑둥이 울퉁불퉁하다.

 
이러한 전설을 뒷받침하듯 지금도 땅을 깊게 파면 곳곳에서 갯벌의 시커먼 흙이 짠물과 섞여 나온다고 한다. 수백 년 전엔 이곳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교촌리 강골이란 마을 지명도 물골을 이루던 곳을 말한다.
 
임존성은 부흥운동 이후에도 후백제의 견훤과 고려 왕건이 패권을 다투고, 몽고 침입 땐 대몽항쟁의 거점으로 격전을 치렀던 곳이다. 이 느티나무는 그 숱한 전란을 겪고도 1,000여 년을 굳건하게 살아남아 오늘의 우리에게 역사의 교훈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숱한 전란을 겪고도 1000년을 굳건하게 살아온 느티나무

▲ 숱한 전란을 겪고도 1,000년을 굳건하게 살아온 느티나무

 
‘배맨나무’에 얽힌 전설을 들으며 더불어 임존성 성곽을 둘러보는 역사탐방을 추천해본다. 임존성은 주류성과 함께 백제 부흥운동의 거점지이자, 백제 역사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석성이었다. 임존성 성곽 탐방을 마치고 옛 대흥현의 동헌과 동헌 뒤뜰에 있는 영조 옹주(추정)의 태실, 척화비, 이성만 형제 효제비, 백제시대 고찰 대련사, 조선말 학자이자 의병장 면암 최익현 선생 묘소, 고부군수 조병갑이 동학군에 쫓겨 숨어 있었다는 200년 된 이한직 가옥, 예당저수지 수변생태공원 등 이 일대에 있는 문화유적들을 둘러본다면 더욱 좋겠다. 

마을 한가운데 있는 달팽이 미술관

▲ 마을 한가운데 있는 달팽이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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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을 안내해주는 슬로시티 사무국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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