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방학인데도 날씨가 추워서인지 인적이 거의 없었다.
만해 한용운은 1919년 3·1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으며, 일제에 체포되어 3년형을 받았다. 출옥 후인 1922~23년 민립대학 설립운동과 물산장려운동 등의 민족운동에 참여했다.
1924년 조선불교청년회 회장에 취임했고, 1927년 신간회 결성에 적극 참여해 중앙집행위원과 경성지회장에 피선되어 활동했으며, 1931년 잡지 〈불교〉를 인수하여 사장으로 취임했다.
같은 해 김법린·최범술·김상호 등이 조직한 청년법려비밀결사인 만당(卍黨)의 당수로 추대되었으며, 1936년 신채호의 묘비건립과 정약용 서세100년기념회 개최에 참여했다.
1940년 창씨개명 반대운동과 1943년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일제의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비타협적인 독립사상을 견지하다가,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기 싫다며 북향으로 지은 성북동 집에서 중풍으로 66세의 나이로 죽었다.
한용운 문학은 저항문학으로 일제 강점기에 독립을 염원하며 간절하게 쓴 글들이다.
생가는 두 칸으로 된 초라한 한옥이다.
앞 마루에는 한용운시인의 대표적인 시 '님의 침묵'이 액자에 걸려있었다.
집의 오른 쪽에 있는 헛간의 모습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들이 방명록에 서명을 하고 있었다. 나도 마지막 칸에 이름을 기록하고 왔다.
방문객들은 서울과 경기도 부산, 대전, 아산등 초등학교 자녀를 동반한 가족들이 대부분이었다.
계단 위에 있는 사당으로 올라 가봤다.
한용운 시인의 영정 사진
어록비는 생가 아래에 조성된 '만해 시비 공원' 입구에 있었다.
작품 '알 수 없어요' 시비
공약 3장
一. 금일 우리의 차거는 정의 인도 생존 존영을 위하는 민족적 요구니, 오직 자유적 정신을 발휘할 것이오,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일주하지 말라.
一. 최후의 1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
一. 일체의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의 주장과 태도로 하여금, 어디가지든지 광명정대하게 하라.
생가를 견학하고 다시 내려와서 입구에 있는 '만해 한용운 기념관'에 갔다.
기념관 한 쪽에는 만해 한용운 시인의 일대기를 보여주는 동영상이 계속 나오고 있었다.
전시관에는 한용운시인의 작품과 서적들이 전시돼 있었다.
한용운 시인의 친필이 전시된 액자
체험관 입구에 "홍성을 빛낸 위인들"이 소개 돼 있다. 최영, 성삼문, 한원진,깁복한, 한성준, 한용운, 김좌진, 이응로 모두 교과서에서 배운 분들이다.
기념관 입구에서 보이는 생가와 시비공원의 모습이다.
내가 만약 학창시절에 만해 한용운 시인의 생가를 다녀갔다면 민족시인 한용운의 시를 이해하는데 많이 도움이 됐을 것이다. 생가를 둘러보며 나는 크게 느낀 것이 있다.
앞으로 손주가 생기면 고향집에서 가까운 한용운 생가나 김좌진 장군의 생가에 자주 데리고 다닐 생각이다. 봄, 여름, 가을 , 겨울 계절마다 다르게 보이는 모습을 보여주러 해마다 한 번씩 데리고 오고 싶다. 애국심이나 자존심은 말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역사의 현장에 직접 데리고 다니면서 스스로 깨닫게 해주는 방법이 좋을 것 같아서이다.
나는 올 해부터 남편과 고향집에서 가까운 생가나 유적지 사찰부터 여행을 다닐 생각이다. 홍성과 예산에는 자랑할 만한 곳이 많아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