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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조선조 충신 만전당 홍가신 선생 기념관을 둘러보고

2014.01.03(금) 15:13:55 | 소중한 벗 (이메일주소:djlsk77@hanmail.net
               	djlsk77@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충무공 이순신, 백야 김좌진, 유관순 열사, 매헌 윤봉길 의사...
이루 다 헤아릴수 없는 구국의 충신들이자 애국자이며 우리 한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인물들이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름 석자만 대도 알수 있는 분들만 계신게 아니랍니다. 어른들은 물론이고 아이들도 잘 모르는 학자 겸 정치가이자 충신인 분들이 충청남도에는 많이 계십니다.
그중 한분이 아산의 만전당 홍가신 선생 아니실까 생각합니다.
 
며칠전 홍가신선생의 유허, 묘소, 기념관과 영당, 그리고 신도비가 있는 아산시 염치읍 대동리에 찾아갔습니다.

홍가신 선생 기념관

▲ 홍가신 선생 기념관


영당

▲ 영당


기일에 제사 지내는 사당

▲ 기일에 제사 지내는 사당(기념관에서 산자락 하나를 건너뛰어 있음)


홍가신 선생과 다른 일가친척이 함께 자리잡고 있는 묘소(기념관 뒷편)

▲ 홍가신 선생과 다른 일가친척이 함께 자리잡고 있는 묘소(기념관 뒷편)


홍가신 선생 신도비(기념관에서 직선거리로 800m쯤 거리에)

▲ 홍가신 선생 신도비(기념관에서 직선거리로 800m쯤 거리에)


시도비를 가까이서 봄

▲ 신도비를 가까이서 봄


신도비와 아산시

▲ 신도비에서 멀리 보이는 아산시 염치읍


홍가신 선생 영정

▲ 홍가신 선생 영정


마침 기념관에는 홍가신 선생의 후손이자 기념관 관리인 한분이 계셔서 기념관 내부를 함께 관람할수 있었습니다.

홍가신 선생은 중종 36년(1541)에 태어나 광해군 7년(1615)에 세상을 떠난 조선조의 문신이요 학자, 그리고 정치가였습니다.
 
<1> 홍가신 선생에 대한 대표적인 특징이라면 이몽학의 난을 평정하여 1604년 '청난공신' 1등에 책록 되셨고,
<2> 임진왜란 때 52세에 의병을 규합해 왜적을 토벌했고
<3> 임란 뒤 53세 왕에게 올린 ‘적패퇴봉사(賊敗退封事)’라는 상소는 당시에 왜군이 남쪽으로 물러간 상황에서 앞으로 국가를 어떻게 이끌어야 하는지에 대해 시급한 일부터 빈틈없이 제대로 수행해 나가야 함을 조목조목 논한 명문으로 인정받고 있고,
<4> 우리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는 사돈지간이고,
<5> 부여 현감으로 재직중 계백 등 백제 충신들을 위한 사당인 부여 의열사를 건립했다는 사실입니다.

 

홍가신 선생 안내

▲ 홍가신 선생 유허 안내


16자 상소문. 이는 홍가신 선생이 낙향하여 지병을 치료중 임금이 연회에 초대했으나 병으로 인해 참석치 못하고 그 대신 16자의 상소를 올린것.

▲ 16자 상소문. 이는 홍가신 선생이 낙향하여 지병을 치료중 임금이 연회에 초대했으나 병으로 인해 참석치 못하고 그 대신 16자의 상소를 올린것.


만전당 홍가신 선생의 본관은 남양(南陽)이고 1567년(명종 22) 진사시에 합격해 안산군수와 부여 현감, 수원부사를 거쳐 파주목사, 홍주목사에 이어 형조참판, ·강원도관찰사, 한성부우윤 겸 의금부지사 등을 거쳐 형조판서를 지내신 정치가이자 행정관료였습니다.
 
동문수학했던 일송 심희수(좌의정 역임)는 “근세 사대부 가운데 흠이 없는 이로 의당 공이 으뜸이다(近世士大夫 保全名節 終始無瑕 當以公爲首)”라고 높이 평가했다고 합니다.

홍가신 선생의 연표

▲ 홍가신 선생의 연표


선조가 백성을 잘 보살폈다는 구황어사 이성임의 보고에 따라 안삼군수였던 홍가신을 수원부사로 승진시킨다고 기록한 선조 17년(1584) 5월7일자 실록

▲ 안산군수 홍가신이 고을 백성들을 잘 보살폈다는 구황어사 이성임의 보고에 따라 홍가신을 수원부사로 승진시킨다고 기록한 선조 17년(1584) 5월7일자 실록


홍가신이 친구인 조원이 일을 겅명정대하게 처리하지 않는다고 왕에게 보고한 '대사편년'

▲ 홍가신이 친구인 조원이 일을 공명정대하게 처리하지 않는다고 왕에게 보고한 '대사편년'


적퇴후 봉사. 왜적이 남쪽으로 물러난 뒤 백성을 다스릴 일을 올린 상소

▲ 적퇴후 봉사. 왜적이 남쪽으로 물러난 뒤 백성을 다스릴 일을 올린 상소


홍가신 선생이 이몽학의 난을 평정할 당시를 상상한 디오라마

▲ 홍가신 선생이 이몽학의 난을 평정할 당시를 상상한 디오라마


이밖에도 조선왕조실록에는 홍가신에 대해 “높은 관직에 있으면서도 행실이 청렴결백하다는 것으로 한 세상에 이름이 났다.” “홍가신은 청간(淸簡)하고 욕심이 적으며 직분을 다하려고 힘써 가는 곳마다 모두 치적이 있었다.” “홍가신은 젊어서부터 글 잘한다는 명성이 있었다.” 는 등의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홍가신의 넷째아들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딸(이순신은 3남 1녀를 두었음)을 맞아 4남 1녀를 두었다고 하네요.
의기와 충절의 고장 충청남도가 낳은 위대한 선조들 사이에 이런 사돈지간을 맺었다는 사실도 재미있네요.
 
홍가신과 관련해서 충청남도의 역사적 의미는 중요한 한가지가 더 있습니다.
홍가신이 부여현감으로 재직중 백제의 충신들을 위한 사당을 지어 그들을 역사적으로 복권시켰다는 사실입니다.
 
현재 부여에는 의열사(義烈祠. 충남 문화재자료 제114호))라는 사당이 있는데 이것을 당시 부여 현감이었던 홍가신이 건립한 것이죠.
 
‘만고 충신’이라는 말이 있죠. 즉 충신은 왕조가 바뀌어도 영원한 이름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34살의 신임 부여 사또는 ‘만고 충신’을 알아 본 것입니다.
 
백제의 고도에서 망국의 역사를 읽다가 백제의 충신들을 만났고 그들을 추모하기 위해 이듬해인 조정의 공인을 받기에 이른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지방자치단체의 어떤 사업을 위해 정부로부터 국비를 보조받거나 허가를 얻는 일입니다.
 
그렇게 지어진 사당이 의열사인데 이후 서애 류성룡은 의열사 기문에 “나의 벗 홍흥도(洪興道, 홍가신의 자)이 명을 받아 고을에 부임해 사당을 건립했다”고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홍가신 선생의 제향

▲ 홍가신 선생의 제향


홍가신 선생의 제향때 위패를 모신 교지

▲ 홍가신 선생의 제향때 위패를 모신 교의


그때 홍가신이 지은 의열사에는 현재 백제의 충신이었던 성충, 흥수, 계백과 고려 후기의 충신 이존오, 조선 선조때 선비 정택뢰, 인조때 문신 황일호까지 6명을 모시고 있는데, 해마다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충청남도가 낳은 또 한분의 충신이자 위대한 선조인 만전당 홍가신 선생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 홍가신선생 유허, 신도비, 묘소, 기념관, 영당 (충남 아산시 염치읍 대동리 산1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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