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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6그루가 하나로 합쳐진 천년의 나무

[도민리포터 기획] 충남의 나무들 ② : 금산 보석사 은행나무

2013.10.23(수) 10:48:25 | 탈론 (이메일주소:malgmywoo@naver.com
               	malgmywoo@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은행나무를 흔히 살아있는 화석이라고 한다. 약 3억5000년전인 고생대에 출현한 은행나무가 그 모습이 변치 않고 지금까지 생존해 왔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호모사피엔스라 불리는 인간도 지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겨우 10만년 정도에 불과하고 인류의 직접 조상인 직립보행 인간은 약 4백만년 전에 출현했으니 은행나무의 생존은 가히 불가사의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빙하기를 거치는 동안 세계 곳곳에서 서식하던 은행나무는 거의 다 멸종되고 우리나라를 비롯한 중국, 일본 등에만 살아남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서원이나 향교 또는 마을 어귀, 절, 집 근처 등에 심어 길렀다. 공기 오염이 많은 곳에서도 잘 자라 요즘은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그래서 은행나무는 느티나무와 더불어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나무다. 은행나무는 사시사철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주고 수형이 예쁘며 생명력이 강하다. 또 스스로를 유지하는 힘도 센데다가 병해충에 강하고 추운지방에서도 잘 자란다.
 

살아있는 화석이라 불리는 은행나무는 우리에게 친숙한 나무다.

▲ 살아있는 화석이라 불리는 은행나무는 우리에게 친숙한 나무다.

 
은행나무는 열매가 살구 비슷하게 생겨서 살구 행(杏)자를 썼고 속 열매가 희어서 은(銀)자를 썼다. 행자목(杏子木)이라고도 한다. 영문이름 또한 은빛 살구를 뜻하는 'Silver apricot'이다. 잎의 모양이 오리발을 닮았다 하여 압각수(鴨脚樹)라고 부른다. 나무를 심은 뒤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시기는 대략 80년 내지 150년이라고 하는데, 열매를 손자 대에나 얻을 수 있다고 해서 공손수(公孫樹)라고도 한다. 공(公)은 남을 높이는 말이고 손(孫)은 손자를 뜻한다.

열매가 살구 비슷해서 행자목이라고도 하고 잎 모양이 오리발을 닮았다 하여 압각수라고도 한다.

▲ 열매가 살구 비슷해서 행자목이라고도 하고 잎 모양이 오리발을 닮았다 하여 압각수라고도 한다.

오늘은 금산 보석사(寶石寺)의 은행나무를 소개한다. 보석사는 금산에서 진안방향으로 10km정도의 거리 진악산 산자락에 있다. 넓게 조성된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몇 발자국 걸어가면 일주문이다. 일주문에 들어서자마자 펼쳐지는 200m 남짓의 전나무 길이 장관이다. 쭉쭉 뻗은 전나무 사이로 햇살이 눈이 부시게 부서져 들어온다. 내소사, 월정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전나무 숲길중 하나다. 영화배우 한석규가 이 숲길을 걷는 장면의 광고가 방영돼 유명세를 탔다.
 
 

보석사 전나무 숲길은 내소사, 월정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전나무 숲길중 하나다.

▲ 보석사 전나무 숲길은 내소사, 월정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전나무 숲길중 하나다.


아름드리 전나무가 하늘을 향해 쭉쭉 솟아있다.

▲ 아름드리 전나무가 하늘을 향해 쭉쭉 솟아있다.

 
천천히 여유있게 걸어 전나무 길이 끝나는 지점에 이르자 갑자기 하늘 높이 솟은 오늘의 주인공 보석사 은행나무가 우뚝 서 있었다. 충남 금산의 대표적 자연유산이자, 수령이 무려 1100살이 넘는다. 노랑으로 물들기 시작한 이 거대한 은행나무를 보면서 문득 가을이 보석사에 내려앉았음을 깨달았다.
 

수령 1100년의 보석사 은행나무 위용

▲ 수령 1100년의 보석사 은행나무 위용

지난해 가을, 노랑으로 물들었던 보석사 은행나무의 모습

▲ 지난해 가을, 노랑으로 물들었던 보석사 은행나무의 모습


보석사는 통일신라 때 활동하던 조구대사(祖丘大師)가 885년(헌강왕 11)에 처음 지은 천년고찰이다. 보석사 은행나무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금산 지역에 큰 가뭄이 들어 백성들의 고통이 심해지자, 대사는 가뭄을 해갈할 샘을 찾아 진악산(鎭樂山)에 올랐다. 대사는 산기슭에서 커다란 바위를 찾아내고는 지팡이로 바위를 내리쳤다. 그러자 바위 아래에서 맑은 샘이 콸콸 솟아나왔고 이내 샘물은 금산 지방의 논과 밭으로 흘러들어 가뭄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한다. 대사는 그 바위를 지키고자 바위 옆에 암자를 짓고, 영원한 샘이 있는 암자라는 뜻으로 ‘영천암’(永泉庵)이라고 했다. 이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수행하던 대사는 얼마 뒤, 암자 앞을 흐르는 개울 건너편 산기슭에서 금을 캐내어 불상을 만들고, 절을 세웠다. 그게 바로 보석사다.
 
보석사를 지은 조구대사는 나무도 심었다. 그는 다섯 제자와 함께 각각 한 그루씩, 모두 여섯 그루의 은행나무를 절집 앞의 언덕에 심었다. 여섯 그루는 불가에서 수행해야 하는 여섯 가지 덕목인 육바라밀을 상징한다. 무럭무럭 자라난 여섯 그루의 은행나무는 세월이 지나자 한데 모여 한 그루의 나무로 합쳐졌다고 한다.
 

여섯그루가 하나로 합쳐졌다는 은행나무의 밑둥이 거대하다.

▲ 여섯그루가 하나로 합쳐졌다는 은행나무의 밑둥이 거대하다.


이는 굵게 자란 나무의 줄기를 놓고 사람들이 나중에 지어낸 이야기인 듯 싶다. 실제로 두 그루의 나무가 한 그루의 나무로 붙어서 자라는 경우가 없는 건 아니지만 여섯 그루가 한 그루로 합쳐졌다는 건 믿기 어렵다. 다만 천년의 세월 동안 살면서 지켜본 사람이 없기에 그 전설을 믿을 수밖에…
 
흔히 오래된 은행나무에 붙는 전설 중 하나가 사람처럼 운다는 것이다. 이 은행나무 역시 나라에 큰일이 일어날 때마다 울음소리를 낸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8·15 광복 때도 그랬고 한국전쟁 때도 그랬단다. 이 은행나무의 나라사랑이 참으로 갸륵해서 천연기념물(제365호)로 지정됐는지 모르겠다.
 
 

지난해 노란 은행잎들이 떨어져 완연한 가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 지난해 노란 은행잎들이 떨어져 완연한 가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우리나라에서 1000년 이상 된 은행나무는 용문사 은행나무, 영월 내성군 은행나무, 영국사 은행나무, 부여 주암리 은행나무, 금산 요광리 은행나무 등이다. 그 중 용문사 은행나무(천연기념물 30호)가 1100년~1300년으로 가장 오래됐다고 하는데, 유래를 따져보면 보석사 은행나무도 이에 못지않다.
 
이 은행나무의 키는 34m나 되는데, 이는 양평 용문사의 은행나무 다음으로 가장 큰 키다. 말이 34m이지, 하나의 생명체가 이리 크게 자라났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고층건물 11층과 맞먹는 크기다.
 
여섯 그루의 나무가 하나로 합쳐졌다는 줄기 또한 엄청난 규모다. 사람 가슴 높이에서 잰 줄기의 둘레는 무려 10.7m. 어른 여섯 명이 팔을 펼쳐야 겨우 맞잡을 수 있을 만큼 큰 것이다. 게다가 사방으로 펼친 가지는 동서 방향으로 24m, 남북으로는 21m나 된다. 이제는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가지마다 받침대를 대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나무 둘레는 어른 여섯명이 팔을 뻗어야 서로 맞잡을 수 있을만큼 크다.

▲ 나무 둘레는 어른 여섯명이 팔을 뻗어야 서로 맞잡을 수 있을만큼 크다.

 
천년의 세월을 넘는 동안 나무는 모진 바람과 눈보라를 다 이겨냈다. 더 믿어지지 않는 건 왕성한 생식력이다. 암나무인 보석사 은행나무는 여전히 엄청난 양의 열매를 맺는다. 천년에 걸쳐 그는 이 세상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명의 씨앗을 남겼고, 지금도 여전히 엄청난 양의 씨앗을 맺으며 생명체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이 천년 은행나무의 열매를 몸에 지니면, 무병장수의 덕을 얻게 된다고도 한다.
 

지금도 여전히 엄청난 양의 씨앗을 맺고 있다.

▲ 지금도 여전히 엄청난 양의 씨앗을 맺고 있다.


금산군에서는 해마다 이 은행나무 아래에서 대신제를 지낸다. ‘천년의 바람, 천년의 울림’이란 주제로 열리는 은행나무 대신제는 산신제, 목신제, 당산굿으로 펼쳐진다. 산신제와 목신제는 물론이고, 원형을 재현하여 보여주는 당산굿은 볼거리일 뿐 아니라, 오래도록 지켰으면 하는 우리의 전통 문화유산이다.
 
처음에는 음력 2월 경칩에 대신제를 열었는데, 요즘은 오월 단오 즈음에 날을 잡아 금산군의 축제로 행사를 벌이고 있다. 이 대신제에 참가해 소원을 빌면 반드시 효험이 있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사람들의 간절한 소원은 제가끔 정성껏 적어 넣은 소원지가 되어 나무줄기에 맨 금줄에 매달린다. 이 형형색색의 소원지는 이듬해 다시 대신제를 올릴 때까지 금줄에 매달려 휘날리며 나무의 영험함을 나타내는 표지가 된다.
 
 

매년 열리는 대신제에 많은 사람들이 소원지를 만들어 은행나무 금줄에 매단다.

▲ 매년 열리는 대신제에 많은 사람들이 소원지를 만들어 은행나무 금줄에 매단다.

 
은행나무를 지나 오른쪽으로 발길을 돌려 대웅전으로 올라섰다. 소박하고 아담한 절의 규모가 오히려 사랑스러웠다. 신라시대 때 지어진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현 건물은 조선후기에 다시 지어졌다고 한다.
 
대웅전 옆에는 영규대사 영정을 모신 진영각(眞影閣)이, 그 맞은편에는 영규 대사가 거처하던 의선각(毅禪閣)이 자리 잡고 있다. 기허당(騎虛堂) 영규(靈圭)대사는 휴정(休靜)의 제자로써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00여 명의 승병을 모아 조헌(趙憲)과 함께 왜군에 맞서 싸운 인물이다. 청주를 수복하고 금산에 이르렀으나, 8월 18일 격전 끝에 700명의 의사(義兵)와 함께 순절하였다.
 
 

소박하고 아담한 규모의 절이 오히려 사랑스럽다.

▲ 소박하고 아담한 규모의 절이 오히려 사랑스럽다.

 

원래의 대웅전은 임진왜란때 소실되고 지금의 건물은 조선후기에 지어진 것이다.

▲ 원래의 대웅전은 임진왜란때 소실되고 지금의 건물은 조선후기에 지어진 것이다.


보석사의 진정한 보석은 바로 이러한 영규대사의 나라사랑과 은행나무의 나라걱정이 아닐까 싶다. 충남 금산 남쪽에 보석과 같이 아름답게 자리하고 있는 보석사로 가을맞이를 하러 나가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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