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서산지역 진실규명 결정 희생자 1,064명의 이름이 읍·면별로 적힌 현수막.
가을 햇살이 눈부시던 9월 15일, 서산시문화회관을 찾았습니다.
맑고 환한 날씨와 달리 문화회관 안에는 차분하고 숙연한 분위기가 감돌았습니다. 이날 이곳에서는 ‘제10회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제76주기 서산합동추모제’가 열렸습니다.
행사장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시선을 붙잡은 것은 무대 뒤편을 가득 채운 수많은 이름이었습니다.
‘진실규명 결정 희생자 1,064영위’
검은 바탕 위에 빼곡히 적힌 이름 하나하나를 바라보니, 역사 속에서 ‘희생자’라는 하나의 단어로 불리던 이들이 비로소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으로 다가왔습니다. 누군가의 아버지였고 어머니였으며, 형제이자 이웃이었던 사람들입니다. 76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지만, 이들의 이름을 기억하기 위한 자리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추모

▲ 행사장을 찾은 유족과 참석자들이 객석에 앉아 추모행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올해로 10회를 맞은 서산합동추모제에는 연로한 유족들과 자녀 세대가 함께 자리했습니다.
행사 자료집에는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의 글과 함께 서산유족회가 걸어온 길, 진실규명 과정, 서산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에 관한 기록이 담겨 있었습니다. 한 장씩 넘겨보니 유족들이 걸어온 시간이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
진실화해위원회를 찾아가고, 간담회와 회의에 참석하고, 각 지역 추모제를 함께하며 가족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히기 위해 이어온 발걸음이었습니다. 행사장에 적힌 한 문구도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우리 유족의 인생 마지막 완성은 희생자의 명예회복이다.”
가족을 잃고도 그 이유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긴 세월을 살아온 유족들에게 추모는 과거를 회상하는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희생자의 이름을 되찾고, 억울함을 풀고, 그 삶을 온전히 기억하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서산·태안에 남겨진 아픈 역사

▲ 행사장에서는 서산 부역혐의 희생사건 유가족의 증언을 담은 영상이 상영됐습니다.
한국전쟁 전후 서산과 태안 지역에서도 많은 민간인이 희생됐습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서산·태안 부역혐의 희생 사건’을 조사해 977명을 희생자로 확인하고 888명을 희생 추정자로 판단했습니다. 위원회는 1950년 10월 초순부터 12월 말까지 당시 서산·태안 지역 최소 30여 곳에서 민간인들이 적법한 절차 없이 집단 희생된 사건으로 규정했습니다.
자료집에 실린 서산지역 읍·면별 현황과 사건 개요를 살펴보면,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지명마다 당시의 아픔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팔봉면, 지곡면, 해미면, 고북면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희생자가 확인됐고, 아직도 조사와 확인이 필요한 사례가 남아 있습니다.
숫자로만 보면 수백 명, 수천 명이지만 그 숫자 하나하나 뒤에는 돌아오지 못한 가족을 기다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날 유족을 대표한 인사말에서는 고령이 된 유족들의 절박한 마음도 전해졌습니다.

▲ 정명호 서산유족회장님
정명호 서산유족회장은 유족 대부분이 이제 80~90대에 접어들었다며 더 이상 마냥 기다릴 수 없는 상황이라고 호소했습니다. 가족을 잃은 뒤에도 일부 유족들은 연좌제와 사회적 낙인 속에서 취업과 생계에 어려움을 겪으며 살아왔다고 전했습니다.
“우리 유족들은 힘이 없습니다.”
짧은 말이었지만 현장에서 들으니 그 무게가 크게 다가왔습니다.
유족들이 바라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가족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인하고,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의 명예가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이날 여러 차례 언급된 ‘진실규명’이라는 말도 단순한 행정 절차 이상으로 느껴졌습니다. 사라진 한 사람의 삶을 공식 기록 속에 되돌려 놓고, 그 가족이 오랫동안 품어온 질문에 답을 찾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이어지는 진실규명의 과정

▲ 추모행사에 참석한 유족들이 객석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행사를 함께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날 추모제에서는 지난 8월 7일 청와대에서 열린 ‘진실화해위 3기 출범 계기 국가폭력 피해자 위로오찬’ 당시 대통령 발언 영상도 상영됐습니다.
영상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국가의 책임에는 유효기간이 없다”는 취지로 과거사 진실규명과 피해자 명예회복의 필요성을 언급하고, 기존의 신청 중심 조사에서 나아가 국가가 적극적으로 피해자를 찾아가는 조사 필요성도 밝혔습니다.
영상이 상영되는 동안 객석에는 바로 그 답을 오랫동안 기다려 온 유족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과거의 아픔을 기억하는 추모제이면서도, 아직 끝나지 않은 진실규명의 현재를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숫자가 아닌, 한 사람의 이름으로

▲ 희생자들의 이름이 적힌 추모 현수막 앞에서 유족 대표들이 제례를 올리며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있습니다.
이날 가장 오래 기억에 남은 장면은 역시 무대 뒤편에 적힌 희생자들의 이름이었습니다.
1,064영위.
그러나 그 숫자를 조금만 오래 바라보면 어느 순간 숫자가 아니라 이름이 보입니다. 한 사람에게는 한 번뿐이었던 삶이 있었고, 그를 기다린 가족이 있었으며, 가족들이 76년 동안 품어온 기억이 있었습니다.

▲ 희생자 1,064명의 이름이 적힌 추모 현수막을 배경으로 합창단이 무대에 올라 추모 공연을 펼치고 있는 모습입니다.
추모는 슬픔을 되풀이하는 데서 끝나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확인하고 기록하며, 희생자의 이름과 삶을 우리 사회가 함께 기억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역사를 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가을 햇살이 환하게 내려앉았던 그날. 서산시문화회관 안에서는 오래전 세상을 떠난 이들의 이름이 다시 불렸습니다.
잊지 않는 것,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
제76주기 서산합동추모제는 우리가 과거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와, 아직 남아 있는 진실을 함께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 희생자들의 이름이 적힌 추모 현수막 앞에서 전통의상을 입은 이애리 충청남도 무형유산 보유자가 추모의 뜻을 담은 공연을 펼치고 있는 모습입니다.
※ 취재일: 2026년 9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