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무엇일까. 오래된 문헌에 기록된 사건이나 박물관 유리장 안에 놓인 유물만이 역사는 아닐 것이다. 사람들이 살아온 자리와 그곳에 남겨진 흔적, 누군가에게서 누군가에게로 전해진 이야기와 기억 역시 한 지역의 역사를 이룬다.
그래서 역사는 때로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매일 걷던 산길의 흙 둔덕이 옛 성벽의 흔적일 수도 있고, 무심코 지나쳤던 공간에도 오래전 사람들의 시간이 남아 있을 수 있다. 너무 익숙해서 미처 역사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뿐이다.

▲ 지난 13일 저녁 부춘산 산책로를 걷고 있는 일행들. 부춘산은 서산 시민들이 산책과 운동을 위해 즐겨 찾는 공간이다.
지난 13일 저녁, 서산 도심 한가운데 자리한 부춘산을 올랐다. 퇴근 뒤 산책을 나온 시민들이 오가고 곳곳에는 운동기구가 놓여 있었다. 높고 험한 산도 아니어서 서산 시민들에게는 운동과 산책을 위해 찾는 친숙한 공간이다. 그러나 산길을 따라 걷다 보니 평소 무심코 지나쳤던 풍경 속에 서산의 역사가 겹겹이 숨어 있었다.
옥녀가 산신이 됐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옥녀를 기리는 제의가 이어져 왔다. 옥녀봉 일대에는 북주산성의 흔적이 남아 있고 조선시대에는 서해안의 위급한 소식을 불과 연기로 전달하던 봉수의 역사도 남아 있다.
봉화대의 흔적을 따라, 기록과 기억 사이를 걷다

▲ 이날 일행이 과거 봉화대가 있던 곳으로 기억한 부춘산의 평평한 공간. 현재 사철나무와 운동시설 등이 자리하고 있다.
부춘산을 걷다 보면 '봉화대 700m'라고 적힌 이정표를 만난다. 서산 사람들은 이곳을 흔히 '봉화대'라고 부른다. 자료에서는 불과 연기를 이용해 신호를 전달하던 시설을 '봉수대'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 글에서는 현장에서 익숙하게 사용하는 명칭은 '봉화대'로, 산과 산을 이어 소식을 전달했던 통신체계는 '봉수'로 구분해 쓰기로 했다.
이날 가장 먼저 향한 곳도 일행이 봉화대가 있던 자리라고 알려준 평평한 터였다. 운동기구가 놓여 있었고 한쪽에는 사철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주변에는 돌들도 눈에 들어왔다. 함께 산을 오른 이들은 과거 이곳에 돌을 쌓은 시설이 있었고 태풍 곤파스 때 무너진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한 참석자는 주변에 놓인 돌을 가리키며 "그 돌을 옆으로 옮겨 담장처럼 쌓아놓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 평평한 공간 주변에 돌이 쌓여 있다. 함께 산을 오른 주민들은 과거 이곳에 있던 시설과 관련된 돌로 기억하고 있지만 정확한 연관성은 확인이 필요하다.
다만 취재 뒤 관련 자료를 살펴보니 이 부분은 조금 더 신중하게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서산시 자료에서는 부춘산을 동쪽 옥녀봉과 서쪽 봉화산으로 나누어 설명하면서 실제 봉수터는 옥녀봉 쪽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역시 북주산성 정상부 동쪽에 봉수와 관련한 석축 흔적이 남아 있다고 전한다.
따라서 이날 일행이 봉화대가 있던 곳으로 기억한 장소와 기록에 나타나는 봉수 유적이 정확히 같은 지점인지, 주민들이 기억하는 곤파스 당시의 훼손이 어떤 시설을 가리키는지는 추가 확인이 필요한 부분이다. 현장에서 전해 들은 기억은 주민들의 구술로 남겨두고, 기록으로 확인할 부분은 따로 살펴볼 필요가 있어 보였다.
그 역사를 알고 다시 산을 바라보니 평범해 보이던 공간이 전과 달리 오래된 시간을 품은 역사 현장으로 보였다.
"여기서 불을 올리면 서울까지 알게 되는 거예요"
봉수 이야기가 나오자 서산시민 최병렬씨가 산 너머를 가리키며 설명했다.
"여기서 불을 올리면 당진에서 받고, 거기서 또 어디로 가느냐면 서울 목멱산(현 남산), 남산까지 가는 거예요. 여기에서 적들이 쳐들어왔다고 서울에서 알게 되는 거죠."
최씨의 설명처럼 조선시대 봉수는 한 곳에 독립적으로 존재한 시설이 아니었다. 부춘산 일대의 봉수는 서쪽 태안 백화산과 동쪽 해미 안국산 방면 봉수와 연결돼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해안이나 국경에서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을 이용해 다음 봉수로 신호를 전달했다. 그렇게 산과 산을 거쳐 한양 목멱산, 오늘날 남산까지 소식이 이어졌다.
지금은 휴대전화 하나로 몇 초 만에 소식을 전하지만 옛사람들에게 산 위에서 피워 올린 불빛과 연기는 중요한 통신수단이었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부춘산의 봉화대 역시 서해안과 한양을 이어주던 옛 통신망의 한 지점으로 다가왔다.
착한 옥녀가 산을 지키는 존재가 되기까지
부춘산에는 봉수보다 더 오래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이어진 이야기도 있다. 옥녀봉의 옥녀 전설이다. 전설 속 옥녀는 새어머니의 구박 속에서도 착한 마음을 잃지 않았다. 한겨울 산에서 고사리를 구해 오라는 어려운 일을 맡았지만 선녀들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넘긴다. 반대로 욕심을 부린 새어머니와 딸은 벌을 받고 옥녀는 훗날 산을 지키는 존재가 됐다고 전해진다.

▲ 2022년 서산 부춘산 옥녀봉에서 열린 산신대제 모습. 옥녀봉에서는 해마다 지역의 평안과 안녕을 기원하는 제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이야기에는 착한 마음과 선행은 복으로 이어지고 욕심은 결국 화를 부른다는 옛사람들의 가치관이 담겨 있다. 옥녀 이야기는 전설로만 끝나지 않았다. 서산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열나흗날 옥녀봉에서 지역의 평안과 안녕을 기원하는 옥녀제를 지내는 전통이 이어져 왔다. 지역 유림을 중심으로 모경회가 조직돼 유교식 절차로 제를 올렸으며, 옥녀봉 산신당을 중심으로 산신을 기리는 전통도 계속됐다. 가을이면 열리는 옥녀봉 산신대제 역시 이러한 지역 민속문화의 연장선에 있다.
2022년 직접 찾았던 산신대제 현장에서도 제를 올리며 지역의 안녕을 기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전설 속 옥녀 이야기가 옛이야기로만 머무르지 않고 오늘의 제의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산길에서 만나는 산신당과 제단에는 서산 사람들이 무엇을 기원하고 어떤 마음으로 공동체의 안녕을 빌어왔는지가 담겨 있다.
산길과 하나가 된 북주산성
옥녀봉 일대에는 북주산성도 자리하고 있다. 북주산성은 북고산성이라고도 불린다. 둘레 약 764m로 알려진 산성으로, 대부분 자연 지형을 이용해 흙으로 성벽을 쌓았고 일부 구간에는 석축 흔적도 남아 있다. 성안에서는 삼국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토기와 고려·조선시대의 청자와 백자 조각 등이 확인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처음 이곳을 찾은 사람의 눈에는 어디가 평범한 산길이고 어디부터가 성벽의 흔적인지 쉽게 구분되지 않았다. 돌로 높게 쌓은 성곽과 달리 대부분 흙으로 만들어진 토성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산길을 걸으면서 유적의 위치와 구조, 이곳에 얽힌 이야기를 조금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면 부춘산을 찾는 재미도 달라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옥녀 전설과 산신당, 북주산성, 봉수를 차례로 만나고 나니 각각 떨어져 있던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졌다.

▲ 부춘산에서 바라본 서산 도심.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찾는 도심 속 산이지만 곳곳에 다양한 역사와 이야기가 남아 있다.
하산길에서도 끝나지 않은 이야기
부춘산의 매력은 이런 역사와 문화가 시민들의 일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데 있다. 매일 걷는 산길에 성곽의 흔적이 있고 봉수의 기억이 있으며, 옥녀의 전설과 사람들이 제를 올리며 이어온 마음이 있다.
하산길에서도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산 중턱에는 옥천암이 자리하고 있었고, 능선을 따라 걷다 중간 지점에서 내려서면 서광사도 만날 수 있다. 서산시립도서관 방향으로 하산하면 산자락에는 단군전이 자리한다. 옥녀의 전설과 산신 신앙, 봉수와 산성에 이어 불교문화와 단군을 기리는 공간까지 한 산을 따라 이어지고 있었다.
함께 산을 오른 갯벌산악회 한 회원도 부춘산에 남아 있는 역사와 문화가 시민들에게 더 많이 알려지고 관심으로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처음에는 운동기구가 놓인 평범한 산책길로 보였다. 그러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을 찾아본 뒤 바라본 부춘산은 달랐다. 옥녀의 전설이 있고 산성을 쌓았던 사람들의 흔적이 있으며, 서해안에서 올라온 소식을 불과 연기로 이어 보내던 봉수의 기억도 있다. 산길에는 옥천암과 서광사가 자리하고 산자락에서는 단군전도 만난다.
멀리 찾아가야 만날 수 있는 역사가 아니었다. 시민들이 매일 오르내리는 산길에 서산의 오래된 시간이 함께 걷고 있었다.
부춘산
충남 서산시 읍내동 562-9
※ 취재일: 2026년 8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