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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출신 이삼평, 일본 도자기의 시조가 되다-이삼평공원

2024.06.21(금) 02:49:17젊은태양(claudi00@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공주 출신 이삼평, 일본 도자기의 시조가 되다-이삼평공원 사진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에는 이삼평공원이 있습니다. 
조선 사람으로 일본 아리타 자기의 시조가 된, 공주 사람 이삼평 선생을 기리는 공원인데요.
원래 1990년에 일본 아리타 시민들이 기금을 모아 박정자삼거리에 세웠던 것을 수년 전 도로 확장 공사로 인해 이곳으로 옮겨 이삼평공원을 조성했습니다.

공주 출신 이삼평, 일본 도자기의 시조가 되다-이삼평공원 사진

이삼평공원 표지를 보고 길을 따라 들어가면 30대 정도 주차가 가능한 공간이 있고 길게 조성한 곳이 이삼평공원입니다.

공주 출신 이삼평, 일본 도자기의 시조가 되다-이삼평공원 사진

이삼평공원에는 지금 초여름 들꽃이 가득 피어서 잔잔하게 화사하고, 곳곳에 도자기와 관련있는 조형물이 있습니다. 

공주 출신 이삼평, 일본 도자기의 시조가 되다-이삼평공원 사진

공주 출신 이삼평, 일본 도자기의 시조가 되다-이삼평공원 사진

이삼평공원에는 기념비가 있고 기념비 앞에는 이삼평공원을 조성하고 기념비를 세운 안내문이 있습니다.
기념비 안내문은 오른쪽부터 영어, 일본어, 한국어로 되어 있습니다.
살짝 기분이 이상하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쓸 때에는 우선되는 것이 왼쪽인데, 한국어가 가장 오른쪽에 있어서요. 

공주 출신 이삼평, 일본 도자기의 시조가 되다-이삼평공원 사진

이삼평 기념비 안내문의 내용을 읽어보니, 아리타 시민들이 1990년에 세운 탑이긴 하지만, 내용은 일본의 뜻을 담아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아리타 백자 개발 400주년을 기념해서 공주시가 2016년 10월에 기념비를 이곳으로 이전했다고 하는데, 내용을 보면 임진, 정유왜란 때 이삼평이 '일본으로 건너가'라는 표현으로 되어 있습니다.

공주 출신 이삼평, 일본 도자기의 시조가 되다-이삼평공원 사진

'건너갔다'는 표현에는 의문 부호가 생깁니다.
아무리 도자기를 만들어도 제대로 된 자기를 만들 수 없었던 일본이 임진년과 정유년에 조선을 침략해서 조선의 도공들을 어마어마하게 '끌고갔다'는 내용을 왜곡했다는 점과 그것에 '문화교류'라는 명목하에 그대로 한국 땅에 세웠다는 점이 안타깝습니다.

공주 출신 이삼평, 일본 도자기의 시조가 되다-이삼평공원 사진

기념비에는 아리타 시민들이 이삼평 선생에 대한 감사와 보은의 뜻과 국제친선과 문화교류의 소망을 담아 기획했고 공주시와 (사)한국도자문화진흥협회(현재 한국도자문화협회)의 지원을 받아 건립했다고 되어 있으니 기분이 이상합니다.

공주 출신 이삼평, 일본 도자기의 시조가 되다-이삼평공원 사진

기념비 주변에는 4면에 기념비 건설에 기부한 일본 도자기 관련 업체의 명단을 빼곡하게 써놓았습니다.

공주 출신 이삼평, 일본 도자기의 시조가 되다-이삼평공원 사진

공주 출신 이삼평, 일본 도자기의 시조가 되다-이삼평공원 사진

공주시에서는 2020년 10월에 이삼평을 이달의 공주 역사 인물로 선정하고 기념비를 세운 것도 있습니다.
공주시에서 세운 기념비인데도 '일본으로 건너가'라는 표현을 사용했네요.

공주 출신 이삼평, 일본 도자기의 시조가 되다-이삼평공원 사진

이삼평이 일본 자기의 시조로 추앙을 받게 된 것은 일본에서 1616년에 백자를 만들 수 있는 고령토를 찾아내어 백자를 만드는 데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 일본 도자기는 크게 발전했지요. 그래서 이삼평이 일본에서는 '도조'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공주 출신 이삼평, 일본 도자기의 시조가 되다-이삼평공원 사진

이삼평공원에는 행사를 할 수 있는 얕은 단을 조촐하게 만들어 놓은 것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공주 출신 이삼평, 일본 도자기의 시조가 되다-이삼평공원 사진

이삼평 기념비에서 멀리 떨어져서 풀숲에 세워놓은은색 안내판은 2001년 7월 28일 날짜로 되어 있습니다.
박정자삼거리에 있을 당시에 세웠던 안내문을 이곳으로 옮겼을 것입니다.

은색 안내판에는 이삼평 도조비의 비문에 역사적 왜곡이 있다는 점에 유감을 표하고 있어서 그나마 좀 위로가 됩니다. 
이 안내문에 의하면 이삼평은 다른 도공, 부녀자, 농민 등 십만 명이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중의 한 명이고, 29세 쯤(1601년) 백자를 만들어 이름을 떨치고 44세(1616) 경에도자기의 원조가 되어 83세(1655)에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공주 출신 이삼평, 일본 도자기의 시조가 되다-이삼평공원 사진

이삼평은 타국에 끌려가 살면서 일본식 이름을 만들 때 본인이 살던 고장에서 비롯한 '金江(錦江)'(일본 발음은 가나가에)로 성을 삼았다고 합니다.

공주 출신 이삼평, 일본 도자기의 시조가 되다-이삼평공원 사진

공주 출신 이삼평, 일본 도자기의 시조가 되다-이삼평공원 사진

수년 전에 일본에서 한글로 시를 써넣은 도자기가 발견됐는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내용이라고 합니다. 끌려간 수많은 도공 중 한 명이 쓴 것이겠지요. 그 도자기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고 합니다.

공주 출신 도공에서 일본 자기의 신이 되어 추앙받는 이삼평,
모든 역사의 기록에는 왜곡이 없기를 바랍니다. 

공주 출신 이삼평, 일본 도자기의 시조가 되다-이삼평공원 사진


이삼평공원
충남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79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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