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통합검색 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화면컨트롤메뉴
인쇄하기

여행

여행

충남넷 미디어 > 통통충남 > 여행

북접일기(北接日記)의 흔적을 ‘교장바위길’에서 찾다

동학혁명기념관에서 교장바위까지

2024.03.20(수) 00:32:49나드리(ouujuu@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길을 통해 교류를 하고, 새로운 세상을 개척하기 위해서 새로운 길을 만들지요. 길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새로운 세상으로 도전하는 희망이기도 합니다. 130년 전 조선시대 사람들의 길이 지금 우리들의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길의 소중함을 잘 알기에 지도를 만들어서 지형과 길을 만들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고산자(古山子) 김정호가 1861년 제작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입니다.   

동학혁명기념관 안 역사를 기록한 길
▲ 동학혁명기념관 안 역사를 기록한 길
 
태안에 ‘교장바위길’이 있습니다. 행정지도에는 없지만 백화산에 가면 만날 수 있는 길이지요. 사실, 목을 졸라 죽인다는 '교살(絞殺)'과 몽둥이로 때려죽인다는 '장살(杖殺)'을 줄여서 ‘교장(絞杖)바위’인지, 일제강점기 태안보통학교의 교장이었던 나카오 이타로(中尾猪太郞)에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한 ‘교장(校長)바위’인지는 의문입니다. 하지만, 동학혁명 때 혁명군과 일반인 수백 명이 일본군과 관군에게 잔인하게 죽은 것은 사실입니다. 바위에 대한 명칭의 사실여부보다 백화산이 내어준 ‘교장바위길’의 아픈 역사를 되짚어 봅니다.

백화산에만 존재하는 교장바위길 이정표
▲ 백화산에만 존재하는 교장바위길 이정표
 
태안지역의 동학혁명에 관한 내용은 조석헌이 쓴 ‘북접일기’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조석헌은 1862년 원북면 신두리(遠北面 薪斗里)에서 태어나 1894년 3월에 동학에 입교했습니다. 그해 5월에 접주가 됐으며 10월에는 태안에서 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하였습니다. 북접일기(北接日記)의 북접(北接)은 충청도, 경기도, 강원도 지역을,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을 남접(南接)으로 분류했습니다.

동학혁명기념관
▲ 동학혁명기념관

동학혁명기념관 이용 시간 안내표
▲ 동학혁명기념관 이용 시간 안내표
 
북접일기(北接日記)는 충청도 서북부 지역의 당시 시대상과 동학혁명 당시 태안지역의 상황을 상세하게 기록하여 역사적인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습니다. 다음은 태안에서 동학혁명이 시작되는 순간의 북접일기(北接日記) 내용입니다.
 
「갑오년에 태안군수는 신백희이며, 순무사(巡撫使)는 김경제이다. 그 사람이 태안군에 와서 동학교인을 모두 귀화하라고 설유(說諭)한 후에 수두령(首頭領) 21인을 잡아 가두었다. 10월 1일 사시(巳時)에 이 21인을 물고 처참하려고 순무사와 군수가 무사를 나열하며 장(帳)대에 좌기하고 교인을 모두 잡아와 참살하려 할 즈음에 일반 교인이 하룻밤 사이에 수만 명이 모였다. 10월 1일 아침에 운집하여 당시의 순무사와 군수를 묶어 놓고 마구 때려 상해가 된 까닭에 교인이 차차(次次) 단결되어 충남에서 모두 일어나 운동이 되었다.」

일본군과 대치하는 동학혁명군의 모습을 표현한 모형물
▲ 일본군과 대치하는 동학혁명군의 모습을 표현한 모형물
  
‘교장바위길’의 시작은 동학혁명기념관 뒤 동학혁명 추모탑이 있는 곳입니다. ‘태안동학농민혁명기념관’은 총 사업비 77억여 원을 2021년에 완공되었습니다. 연면적 1586㎡에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입니다. 기념관과 추모탑까지의 물리적인 거리는 100m이지만, 역사적인 시간으로는 130년 된 아득한 거리입니다. 1894년 갑오년에 시작된 동학농민혁명은 130년이 흐르면서 대한민국에 많은 변화를 주었습니다.

기념관 내부 원형마당
▲ 기념관 내부 원형마당

아득한 130년의 시간을 추스르기 위해서 1층에 마련된 동학혁명과 관련된 전시장을 둘러보아야 합니다. 아픈 역사를 둘려보는 것은 가슴이 답답하지만,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동학혁명에 관련된 정보를 똑똑히 읽어보았습니다.

동학혁명군을 진압하는 관군과 일본군의 무기
▲ 동학혁명군을 진압하는 관군과 일본군의 무기
  
130년 주년을 맞이한 ‘동학농민혁명’은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 같았습니다. 130년 전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고 설파했던 동학의 ‘인내천사상(人乃天思想)’은 주권재민(主權在民)을 꿈꾸는 지금 우리들의 마음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래서 동학사상과 민주주의 이념은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1층의 동학혁명 기념관을 나오면 곧바로 2층으로 향합니다. 지금은 태극기 모양의 바람개비를 만드는 체험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2층에서 바라보는 교장바위는 아득하고, 추모탑은 처연하기만 합니다. 3월의 바람은 교장바위길에 뿌연 황사를 뿌리면서 더욱더 처연하기만 합니다.

동학혁명기념관에서 바라 본 추모탑 전경
▲ 동학혁명기념관에서 바라 본 추모탑 전경
 
동학혁명기념관에서 추모탑까지 가는 거리에 앙증맞은 포토존을 만났습니다. 추모탑과 교장바위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우리의 아픈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서라고 다독여 봅니다. 잠시 후 만나는 ‘갑오동학혁명군추모탑_교장바위’라는 이정표가 아쉽습니다. ‘갑오동학농민혁명군추모탑’이 맞는 표기일 듯합니다. 훈련받지 않은 농민들이 무기를 들었다는 이유로 군인으로 인정하고, 적군을 죽이듯이 죽였다는 것이 슬프기만 합니다. 추모탑 옆으로 흐르는 3월의 냇물에 비릿한 피 냄새가 느껴집니다.

갑오동학혁명군추모탑_교장바위 안내판
▲ 갑오동학혁명군추모탑_교장바위 안내판

동학혁명 기념관에서 추모탑으로 가는 길의 포토존
▲ 동학혁명 기념관에서 추모탑으로 가는 길의 포토존
 
이곳의 동학혁명추모탑은 일본군에게 교장바위에서 떨어져 죽거나, 교장바위에서 총이나 칼 그리고 죽창으로 죽은 영혼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지어진 것입니다. 당시의 일본군인들은 조선의 동학혁명군뿐만 아니라 주변의 민간인들까지 이곳에서 죽였습니다. 시체가 썩어서 진동을 했으며, 핏물이 교장바위에서 흘러내려 냇물이 붉은색으로 흘렀다고 합니다. 일본군들은 임산부의 배에 칼을 꽂고, 아녀자의 가슴을 베는 등 잔혹하게 죽였다고 합니다.

추모탑 주변으로 흐르는 냇물에 비릿함이 가득하다
▲ 추모탑 주변으로 흐르는 냇물에 비릿함이 가득하다
 
1892년 말 탐관오리 조병갑이 고부군수로 부임하면서 농민들의 재산을 강제로 수탈(收奪)하고, 갖가지 세금을 수세(收稅)하였습니다. 농민들은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게 되어도 억울함을 호소할 수 없자 결국 전봉준을 중심으로 궐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고종황제는 농민들의 봉기가 점차 확대되자 두려워하여, 일본군에게 진압을 요청하게 된 것입니다. 일제강점기의 시작을 알리는 뼈아픈 역사의 교훈입니다.

농민들의 봉기를 알리는 전봉준의 모습
▲ 농민들의 봉기를 알리는 전봉준의 모습
 
지금도 우리나라의 안보를 미국 같은 강대국에게 의지하려는 아둔한 정치인들이 있습니다. 역사의 교훈을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는 법입니다. 강대국들은 약소국을 절대로 돕지 않습니다. 집어삼키려고 혈안이 되어있지요. 특히 일본이나 중국은 우리 민족의 천적과 다름이 없습니다. 경제력이나 국방력이 이들에게 밀리게 되면, 우리의 미래가 이들에게 잠식당하게 됩니다. 정치는 부유한 경제와 강력한 국방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교장바위 바로 아래에서 본 태안시내
▲ 교장바위 바로 아래에서 본 태안시내
 
동학혁명추모탑에서 바라본 교장바위는 위태롭기만 합니다. 교장바위 정상부근에서 붉게 피어나는 진달래를 보니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고 합니다. 이곳의 진달래는 동학농민혁명군의 피를 머금고 그들의 혼을 이토록 아름답게 꽃 피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3월의 황사가 몰고 온 비릿한 흙냄새가 교장바위 정상에서 슬금슬금 내려오는 듯합니다.

교장바위 정상 바로 아래에서 3월의 진달래꽃이 피었다
▲ 교장바위 정상 바로 아래에서 3월의 진달래꽃이 피었다
 
지금의 민주주의는 얼마나 많은 대중들의 피를 먹으면서 자라고 있는 것일까? 교장바위에 새겨진 황금빛 이끼들의 모습, 이것은 동학농민혁명군의 피가 바위에 스며들어 생긴 자국입니다. 130년이 흐른 교장바위의 핏물은, 금빛으로 변하여 햇빛을 반짝이며 주권재민(主權在民)을 꿈꾸는 원혼들이 자글거리고 있습니다.

교장바위 정상의 금빛 바위들
▲ 교장바위 정상의 금빛 바위들

교장바위 정상에서 바라 본 추모탑이 까마득하다
▲ 교장바위 정상에서 바라 본 추모탑이 까마득하다
 
교장바위에서 바라본 추모탑은 까마득한 절벽입니다. 이곳에서 일본군의 죽창과 칼에 밀려 떨어진 수많은 조선의 백성들.... ‘교장바위길’은 생의 길이 아니라 죽음의 길인 듯싶습니다. 교장바위 정상은 피를 먹고 자라는 민주주의의 악마가 살고 있는 것일까요.

이곳에서 많은 시민들이 떨어져서 죽었다
▲ 이곳에서 많은 시민들이 떨어져서 죽었다

고장바위에서 바라보는 태안시내가 황사에 가려져 한 폭의 수채화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교장바위길’에서 찾은 북접일기(北接日記)의 흔적은 황사 속의 태안시내처럼 답답하기만 합니다.

추모탑 아래 문원덕 선생의 공덕비가 있다
▲ 추모탑 아래 문원덕 선생의 공덕비가 있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충남 태안군 태안읍 성안1길 28-23

제4유형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4유형:출처표시+상업적 이용금지+변경금지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댓글 작성 폼

댓글작성

충남넷 카카오톡 네이버

* 충청남도 홈페이지 또는 SNS사이트에 로그인 후 작성이 가능합니다.

불건전 댓글에 대해서 사전통보없이 관리자에 의해 삭제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