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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힙플레이스로 삼고 싶은 '종학당"

논산의 11경이지만 나에게는 힙플레이스 ^^~

2023.09.14(목) 17:03:49모닝스타(gkgk2023@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모닝스타가 논산에 갑니다.
안 가본 길은 항상 설레임과 두근거림이 동반합니다.

논산을 향하는 가면서 차안에서 본 이정표
▲ 논산을 향하여~~~ 차 안에서 본 이정표

산넘고 들건너 가는 길은 모두가 구경거리다. 
 
딸기마을을 지나고~
▲ 딸기마을을 지나고~

충청의 유학타운에서 찾은 가문의 정취, 선비의 품격, 파평 윤씨!!!

종학당 입구
▲ 종학당 입구

파평 윤씨 가문은 지금의 논산시 노성면 일대를 세거지로 호서지방을 대표하는 명문가로 성장하였다.
청빈한 삶을 지향하면서 세거지의 촌민들을 보호하는 규약을 가문의 종약으로 정하여 구휼 활동에 앞장서며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파평 윤씨의 대표적 인물은 백의정승이라 불리는 명재 윤증(1629~1714)이다.  
윤증은 허례허식을 비난하며 한 점의 부끄럼 없이 당당함으로 평생을 살았다.
이는 파평 윤씨 후손들에게 막중한 책임감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조선 후기까지 학문적 사상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끼쳤으나 일제 강점기에 파평 윤씨 가문에서는 단 한 명도 관직에 나서지 않고 청렴한 삶을 이어왔다. 성품과 행실이 맑고 높으며 탐욕이 없음을 보여주는 가문의 품격은 바로 파평 윤씨 가문의 또 다른 수식어일 것이다. 

너무 예쁜 하늘과 어울리어 넋 놓고 봅니다.
▲ 너무 예쁜 하늘과 어울리어 넋 놓고 봅니다.

자녀 교육의 깊은 의지와 품격 종학당은 최적의 학습환경을 이룬 정수루가 있다.

정수루
▲ 정수루

종학당은 파평 윤씨가 과거 급제를 40명 넘게 배출하였는데 한 장소에서 이렇게 많은 숫자가 과거에 급제한 것은 조선시대 유례없는 일이었다. 

종학당의 체계적인 커리큘럼과 철저한 규율에 따라 교육이 이루어진 점이 가장 큰 이유겠지만, 학생들이 학문을 토론하던 정수루에 오르면 또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신선한 바람과 함께 아래에는 연꽃이 수놓은 연못이 있고, 멀리 마을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정수루는 자연의 운치와 함께 학문을 즐겼을 조선 선비들의 '공부를 대하는 품격'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나만의 힙플레이스로 삼고 싶은 '종학당" 사진
▲ 정수루에서 본 풍광

1997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종학당은(인조21) 윤순거(尹舜擧)가 문중의 자녀교육을 위해 건립한 교육도장으로서, 1910년 경술국치 전까지 교육이 이루어졌으나 신교육의 도입으로 폐쇄되고 말았다.

호암산을 배산(背山)으로 두고 앞쪽에 종학당을, 뒤쪽에 정수루와 숙사를 두고 있다. 종학당은 동향에 가까운 동남향으로 서 있으며 주변은 담을 둘러 구획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평면은 가운데 1칸통은 대청마루로 하고, 양측에는 각각 온돌방을 두었다.

서측 온돌방 후면 벽은 아래를 띄운 반침을 달았다. 전면 열은 툇간으로 처리하여 1고주 5량집 구조가 되었다. 양 측면의 온돌방 앞마루는 가운데 대청마루보다 1자 정도 높여 단의 차를 두고 있다.

전면의 기단(基壇)은 자연석 바른층쌓기를 3자 정도로 높이고, 가운데 계단을 두었다. 초석은 커다란 막돌 덤벙주초를 놓고 기둥은 방주를 썼으며, 기둥 부재는 약 6치 각으로 그리 견실하지는 않다.

대청마루 전면에는 창호를 달지 않고 온돌방 전면에는 띠살분합문을 달았다. 온돌방 측면과 툇마루 측면, 그리고 대청 후면에는 골판분합문을 달았다. 대청과 온돌방 사이에는 3분합 들어열개를 달아 필요에 따라 방과 대청을 터서 큰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정수루는 살림집 앞에 인접시켜 마치 살림집의 부속채와 같다. 종학당과는 달리 좌향(坐向)이 남향에 가까운 동남향이다. 급한 구릉을 이용하여 정수루를 2층 누각으로 만듦으로써 숙사와 누각 바닥이 같은 높이가 되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인데 2층에서는 숙사 쪽으로 1칸을 내달아 ㄱ자가 되었다. 이런 평면으로 계획한 것은 숙사와 쉽게 연결하려는 의도인 것 같다.

2층 바닥은 모두 우물마루로 하고 홑처마에 맞배지붕이다. 초석은 막돌 덤벙주초(자연석을 그대로 쌓은 주춧돌)이고 모두 원주를 썼는데, 누하주는 거칠게 초벌 다듬기만 하고, 누상주는 재벌다듬한 것을 사용하였다.

중층 바닥 주위에는 교살문 난간을 설치하였다. 정수루와 인접한 숙사는 윤순거와 그 후손들이 살던 살림집으로 정면 4칸, 측면 3칸이다. 지금은 많이 개조 되어 원형이 변형되었으며, 앞에는 작은 연못이 남아 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보인당
▲ 보인당에서는 서재를 갖추어 교육과 학문연구

나만의 힙플레이스로 삼고 싶은 '종학당" 사진
▲ 보인당

나만의 힙플레이스로 삼고 싶은 '종학당" 사진
▲ 보인당

정수루 창

▲ 정수루에서 창으로 본 그림 
 

정수루에 누워본다.

▲ 정수루에 누워본다.


30도 웃도는 날씨인데 바람이 땀을 닦아 주는 것 같았다. 
정수루에 누워보니 멀리 학동들의 글 읽는 소리가 간간이 들리는 듯 ~~ 
상급과정의 유생들이 강학을 하던 곳에 감히 누웠습니다. 

종학당

▲ 종학당


초급과정 서당이다. 

나만의 힙플레이스로 삼고 싶은 '종학당" 사진


나만의 힙플레이스로 삼고 싶은 '종학당" 사진

 

배롱나무

▲ 배롱나무


2022년 10월에 수령 200년으로 보호수로 지정 되었다. 

나만의 힙플레이스로 삼고 싶은 '종학당" 사진


사방에 배롱나무가 있어 배롱나무 만발할 적에 사진으로 담기 좋을 것 같다. 

종학당은 문중 서당이지만 문중의 자녀뿐만 아니라 인근의 청소년들도 입학할 수 있어 지역의 교육기관으로 인재 양성의 역할을 담당했다.

이곳에서 윤증은 자손들을 직접 가르쳤고 16세기 중반 이 일대에 터를 잡은 파평윤씨 일가가 빠른 시일 내에 조선의 명문가로 두각을 나타낸 것도 종학당의 교육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종학당 근처에는 명재고택, 돈암서원, 죽림서원, 노성향교 등이 있어 돌아 볼 수 있다.


종학당
충남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 산4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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