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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짐

이정록 시인의 서랍

2022.04.18(월) 16:57:56도정신문(scottju@korea.kr)

짐 꾸리던 손이
작은 짐이 되어 등 뒤로 얹혔다
가장 소중한 것이 자신임을 
이제야 알았다는 듯, 끗발 조이던
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싸 안았다
세상을 거머쥐려 나돌던 손가락이
제 등을 넘어 스스로를 껴안았다
젊어서는 시린 게 가슴뿐인 줄 알았지
등 뒤에 두 손을 얹자 기댈 곳 없던 등허리가
아기처럼 다소곳해진다, 토닥토닥
어깨 위로 억새꽃이 흩날리고 있다
구멍 숭숭 뚫린 뼈마디로도 
아기를 잘 업을 수 있는 것은
허공 한 채 업고 다니는 저 뒷짐의
둥근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겠는가
밀쳐놓은 빈손 위에
무한 천공의 주춧돌이 가볍게 올라앉았다

『의자』 문학과지성사


뒷짐 사진


짐은 다른 곳으로 떠날 꾸러미다. 풍요로운 정착이 아니라, 어딘가로 떠나버릴 방랑과 체념의 꼬락서니다. 짐은 귀찮은 물건이거나, 수고로운 일이다. 그 짐을 꾸리거나 수고로움을 견뎌낸 것은 스물여섯 개 뼈마디를 감싸고 있는 손이다. 두 손 합하여 쉰둘의 뼈마디가 손은 안으로 굽는다며, 굽신거리며 마른 손을 비벼온 것이다. 손에 땀 차는 일만 해오다가 늦가을 햇살에 손바닥을 펼쳐본다. 운명선 어디쯤에서 손을 놓친 밭은 숨소리가 들리고, 재물선 어디쯤에서 빚보증 때문에 망치로 깨버린 인감도장이 떠 오른다. 손을 들여다보는 일은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다. “세상을 거머쥐려 나돌던 손가락”을 슬그머니 맞잡고 위로하는 일이다. 애쓰지 않는 우주가 어디 있으랴. 둥근 것들은 모두 매듭 자리가 손금처럼 복잡했던 과거가 있다. 주름 없는 햇살이 어디 있으랴. 뒷짐을 진다. 이놈 저놈에게 복불복을 내리려고 끗발 조이는 백발 하느님의 궁둥이를 토닥인다. “무한 천공의 주춧돌”을 놓으니, 내가 바로 햇살 쪽 명당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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