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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무령왕

특별기고

2021.07.05(월) 11:11:57도정신문(scottju@korea.kr)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무령왕 사진


백제의 여러 왕 중에서 무령왕(461~523) 만큼 드라마틱한 삶을 살다간 인물도 없다. 무령왕은 그의 아버지가 백제와 왜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일본으로 가던 도중 큐슈앞 작은 섬에서 태어났다. 백제왕이 일본 땅에서 태어났으니 탄생부터가 예사롭지 않은 셈이다.

그러한 무령왕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은 더 극적이다. 사실 무령왕은 동생이 먼저 왕위에 올라 왕이 되는 것이 물 건너 간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러한 동생이 백가라는 인물에 의해 피살됨으로써 백가를 제거하고 말 그대로 극적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왕위에 오른 후 천수를 누린 것도 극적인 사건(?)이었다. 사실 한성기 마지막 왕이었던 개로왕은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 개로왕을 뒤이은 문주왕이 공주로 천도하면서 혼란을 수습해 보고자하였지만, 그 자신도 2년 만에 시해되고 말았다. 그의 아들 삼근왕 또한 15세라는 어린 나이에 원인 모르게 죽고 말았다. 뒤이어 무령왕의 동생 동성왕이 등장하였지만, 앞서 설명한 대로 백가에게 피살되는 비운을 맞이하였다. 백제왕이 천수를 누리지 못하는 것은 이제 운명처럼 보였다. 바로 그럴 때 혜성같이 등장한 인물이 무령왕이다. 그리고 그 자신은 이러한 혼란을 종식시키고 천수를 누린 웅진기 첫 번째 왕이 되었다.
 
가장 많은 국보가 배출된 무령왕릉
 
삶만 극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무령왕릉의 발굴 또한 드라마틱하기는 마찬가지다. 원래 공주지역에는 1000여 기 이상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 대부분이 봉분이 없어 무덤인지 조차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반면에 무령왕릉은 지표상에 큰 봉분을 남기고 있었다. 그런데 봉분이 없던 무덤이 모두 도굴된데 비해 뚜렷한 흔적을 남기고 있던 무령왕릉은 도굴을 피할 수 있었으니,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무령왕은 죽어서도 계속해서 극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무령왕릉은 도굴되지 않은 채 발견되어서 그런지5300여 점에 이르는 많은 양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더구나 그 하나하나가 백제가 갖고 있던 세련된 디자인과 최고의 기술 수준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 중 자그마치 12건이나 국보로 지정되었다. 실로 공주, 부여, 익산에 있는 백제유적이 세계유산에 등재될 수 있었던 것은 무령왕릉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령왕릉, 충남 도약의 구심체

무령왕은 얼굴이 그림처럼 아름답고, 키가 8척에 이르렀으며, 성품이 인자관후 해서 백성들이 잘 따랐다고 한다. 그야말로 ‘엄친아’요, ‘사기 캐릭’이었던 셈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러한 무령왕을 주목한 것은 무령왕릉이 발굴되고 나서부터였다. 무령왕릉 발굴을 계기로 전문가나 일반시민 할 것 없이 모두가 화들짝 놀라 백제문화를 다시 보게 되었다.

무령왕릉은 공주에 있지만 공주만의 것은아니다. 무령왕릉으로 대변되는 백제 문화가 충남문화의 원류라고 할 때 그것은 충남 도민 전체의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마침 금년은 무령왕릉 발굴 50주년이 되는 해이고, 백제가 중국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갱위강국(更爲强國)’, 다시 말해서 백제가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선언한 지 15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무령왕이 그랬듯이 혼란을 종식시키고, 주변국들과 소통하면서 충청남도가 한 단계 도약하는 한 해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서정석 공주대학교 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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