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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유, 싸' '비싸유, 비싸'…흥정소리 정겨운 '시골장터'

전통 장터엔 언제나 넉넉한 인심이 있다

2020.02.13(목) 07:37:22홍주신문(uytn24@hanmail.net)

'싸유, 싸' '비싸유, 비싸'…흥정소리 정겨운 '시골장터' 사진 

사람들이 살아가는 냄새가 짙게 풍기고 인간미가 물씬 묻어나는 시골 장터. 소를 팔러 가는 농부들의 기대감 속에 산나물과 친환경 과일, 무공해 채소, 곡식 등 잡곡을 싼 봇짐을 풀어헤치고 앉아 있는 아낙네들과 주름진 노인들의 모습하며, 풍성한 농악장단에 약장수가 손님을 부르는 소리, 엿장수 가위소리, 순댓국집 냄새 등으로 인정이 풍성했던 지난날 우리의 장날 풍경은 사람들의 넉넉한 마음까지 살갑게 녹아 있어 정겨웠다.


장날이면 할머니는 손자의 손을 잡고 손녀딸의 빨간 코고무신을 골랐으며, 어머니가 딸의 혼수를 장만하던 우리네의 옛 장터였다. '앞마을 누구 네는 소가 송아지를 두 마리나 낳았고, 뒷동네 누구 네는 옥동자를 얻었다'며 동네 사람들의 기쁨과 덕담을 나누며 '한턱내라'는 주위의 짓궂은 등쌀이 싫지만은 않은 듯 막걸리를 한 사발씩 돌리곤 했던 시골장터의 정겨운 풍경이 그리워지는 이유다. 이렇게 정겹고 풍요로운 인심이 오가던 우리네 시골장터는 서로의 기별을 알리는 만남과 모임의 장소이기도 했다. 또 장터 길모퉁이에 자리 잡은 주막은 오고가는 나그네들의 쉼터로 정겹기는 마찬가지였다. 물건을 흥정하면서 '싸유, 싸' '비싸유, 비싸'다는 에누리 흥정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던 정겨운 '시골장터'의 모습이 자꾸 그리워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장날은 바로 사람들의 희로애락이 얹혀있는 인간시장으로 삶의 감동을 담은 파노라마였던 셈이다. 조선시대 장터에서는 이야기책을 전문적으로 읽어 주던 전기수라는 직업까지 있었다고 하니 가히 세상살이의 중심무대라 할 만 곳이 옛 시골장터였던 것이다.


또한 장이 서지 않는 날일지라도 사람들에게는 그곳이 언제나 그렇게 그리운 것은 고향 같은 아늑한 정취와 추억을 불러오는 까닭이다. 하지만 산업의 발달과 함께 복잡한 도시문명의 한 가운데에 정형화된 상설시장과 대형마트, 할인점 등이 생겨나고, 급기야 등장한 홈쇼핑 등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구수한 인심이 살아 숨 쉬는 우리의 장터를 사라지게 하고 있어 안타까운 일이다. 훈훈한 인정과 문물이 오가던 시골장터는 지금은 지역 특산물을 중심으로 겨우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처지가 됐다. 전통은 어제와 오늘을 이어주고 내일을 새롭게 만드는 디딤돌이다. 우리 곁에서 사라져가는 우리의 전통문화유산이 어찌 이뿐이겠는가.

서기 490년, 시장 생기면서 상인들 활발한 활동
시장이란 여러 가지 물건의 교환과 거래가 이루어지는 장소로, 보통 교통이 편리하고 눈에 띄기 쉬운 곳을 차지하곤 한다. 시장은 사람들의 사회생활 속에서 남고 모자라는 물자를 수요에 따라 서로 바꾸는 필요성 때문에 자연스레 형상을 이뤘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전통시장이 생겨난 역사도 자못 오래다. 신라 소지마립간(照知麻立干) 12년인 서기 490년에 처음으로 "수도에 시장을 개설하여 사방의 화물을 통하게 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해온다. 또한 '삼국사기' '증보문헌비고', '시적고'에도 신라 소지왕 12년(490) 경주에 처음으로 시사(市肆 : 시장)를 열어 사방의 상품을 유통하게 하였고, 지증왕 10년(509)에는 동시(東市)를 두고 관리를 파견하여 감독케 하였다고 기록된 것으로 전한다. 이후 효소왕 4년(695)에는 서시와 남시를 두어 동시와 더불어 3시(市)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로 보아 우리나라에는 이미 통일신라 이전에 시장이 형성되었고, 삼국통일 이후에는 중앙시장의 규모가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장시의 활성화와 더불어 상인들의 활발한 활동도 이루어 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보문헌비고'에는 부녀자들이 교역하고 장사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또한 지방에도 행상이 존재하였고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는 사실은 고려시대까지 전라북도 정읍지역에서 전해지는 '정읍사'라는 가요를 통해서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따라서 부보상과 장시의 등장은 직접적인 관련을 가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우선, 행상은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행상?앙상?담부상 또는 '등에 잡화를 지고 파는 무리'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렇지만 당시 돌아다니는 모든 상인이 부보상은 아니었다. 상업거래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상인층도 보다 세분화될 무렵인 19세기 초엽에 이르게 되어 다수의 행상들은 동료를 규합하여 과거와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계(契)의 형태로 일정지역 단위로 자율적 조직체계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이러한 조직이 일반화되는 시기에 '부상(負商)'과 '보상(褓商)'이라는 용어도 생성된 것으로 보인다. 부보상은 이 두 상인의 복합명사로 각지를 순회하면서 상행위를 하는 자로서 일정지역에 정착하여 점포를 가지고 상업 활동을 하는 일반상인, 다시 말해 정주상(定住商)과는 구별된다. 그리고 부보상은 조합의 형태로 전국 규모의 카르텔을 조직하여 장시와 포구에서 일정한 권리를 행사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당시 홍주에는 부보상의 근거지로 '육군상무사(六郡商務社)'가 있었고, 지금까지 맥을 잇고 있다.


홍성지역에 장시(場市)가 발생한 구체적 사료는 없다. 다만 16세기 말 청양과 대흥에 장시가 열린 점으로 미뤄볼 때 임진왜란 이전에 홍주와 결성에는 장시가 개설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8세기 중엽에는 홍주에 7개소, 결성현에 3개소의 장시가 존재했고, 대표적인 장시는 홍주장과 광천장이다. 특히 1900년경 홍주장은 인구 1500명의 대읍이었고, 광천장은 충청도에서 강경 다음 가는 상업중심지였다. 이들은 모두 5일장이었는데 홍주장에서 거래된 대표적인 상품으로는 쌀을 비롯한 소와 전복 등의 농산물로 당시에도 축산과 함께 바다에 인접해 생선과 소금 등이 풍부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홍주장은 일제강점기시절 3.1만세운동의 시발지로, 장시가 단순한 상업적 기능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적 기능과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장시는 서울 종로의 육의전이다. 지방의 장시는 대부분 5일장인데,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모이는 길목과 중심가에 위치해 왔다. 오래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장시가 시장으로 변하게 된 것은, 상품경제의 발달과 연관이 있다. 1914년 조선총독부는 장시에 대한 관리, 통제를 위해 '시장 규칙'을 반포하는데, 홍성에서도 본격적으로 장이 열리게 된 것은 이 '시장 규칙' 이후로 추정된다. 홍성 장시의 특징은 농산물과 신선한 수산물 등을 들 수 있다. 서해바다와 인접한 탓이지만 1970년대 간척지가 막히면서 해산물 생산도 줄어 들였다. 현재는 대기업의 자본이 투입된 대형마트들의 지역상권 경제 잠식에 힘겹게 맞서고 있는 형국이다.

출처 : 홍주일보(http://www.hjn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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