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 김일손, 김우향을 봉안한 부여의 부풍사
2020.02.06(목) 11:05:15지민이의 식객(chdspeed@daum.net)
그중에 김일손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당시 유력자였던 유자광(柳子光)·이극돈(李克墩) 등 훈구파(勳舊派) 학자들의 부패와 비행을 앞장서서 비판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부여읍에서 다리를 건너서 빠져나오는 길목에 쉽게 지나쳐갈 수 있는 곳에 부풍사라는 사우가 나온다. 1954년에 세워지고 1966년에 중건한 사우로 김유신과 김일손, 김우향 등 3인의 위패를 봉안하여 행사하는 곳이다. 김유신이야 진천군에서 많은 흔적을 남기고 있지만 김일손은 위패를 봉안하는 곳이 많지가 않다.
훈구파가 일으킨 무오사화 때 죽임을 당했던 것은 춘추관 기사관으로 있을 때는 세조찬위(世祖纂位)의 부당성을 풍자하여 스승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이씨 왕조 정권의 정당성은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었다.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을 절의를 지킨 인물로 평가하고, 숙의 권씨(淑儀權氏)의 노비와 토지를 권람이 가로챘다고 비판한 것은 세조와 계유정난 공신인 훈구파를 간접적으로 부정하는 일이었다.
즉, 연산군의 정당성을 희석시키는 일이기도 했다. 그의 현실 대응 자세는 매우 과감하고 진취적이었다.
오래된 곳은 아니지만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인물을 배향한 곳이기에 잠시 머물러 본다. 김일손은 자신의 소신을 밝힌 글을 쓴 것 때문에 1498년(연산군 4) 유자광·이극돈 등 훈구파가 일으킨 무오사화 때 권오복·권경유(權景裕)·이목(李穆) 등 사림파 여러 인물들과 함께 처형당했다.
한적하기에 더욱 생각할 것이 많아지는 곳이다. 조의제문(弔義帝文)은 조선 시대 성리학자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지은 제사문으로 항우에게 살해당하여 물에 던져진 회왕 즉, 초 의제를 추모하는 글이다. 실록을 열어보고 이 내용을 확인한 연산군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며 사관들에게 따졌고, 이는 그대로 사화로 발전하게 되었다.
김일손은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 후에 신원되어 중종 때 홍문관 직제학, 현종 때 도승지, 순조 때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부여의 부풍사를 비롯하여 목천 도동서원, 청도 자계서원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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