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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시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는 유적공원

2019.07.21(일) 13:02:24맛난음식(linecplan@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한몸 누워 살 수 있는 한 평의 집을 꿈꾸며 사는 현대인들이 있듯이 오래 전에도 자신의 집을 꿈꾸며 살았습니다. 신석기와 청동기시대에 전통적인 주거지의 형태는 움집이었다고 합니다.
 
계룡시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는 유적공원 사진
 
움집은 원형이나 사각형으로 땅을 파고 둘레에 기둥을 세운 뒤 비바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풀이나 나뭇가지, 갈대 등으로 이엉을 덮어 만들었습니다. 중앙에는 취사와 난방을 위해 화덕을 설치하고 음식 등을 저장하는 저장구덩이를 두었다고 합니다.
 
계룡시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는 유적공원 사진
대전의 지근거리에 있으면서 2년여간 살아본 적도 있는 계룡시에 이런 유적 공간이 있었던가요. 충남 계룡시 두마면 입암리에는 청동기에서 조선시대에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발굴되어 유적공원으로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청동기시대 주거지와 백제시대, 조선시대의 유구가 확인되었으며 다수의 토기를 비롯하여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합니다. 
 
계룡시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는 유적공원 사진

집의 형태는 점차 지상으로 올라가는 모양으로 진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둥그런 모양의 움집에서 후기로 가면 규모가 커지고 평면은 사각형으로 변하고 있으며, 화덕은 중앙이 아닌 가장자리에 설치되고 땅의 깊이도 30~50cm로 점차 지상 가옥에 가까운 형태로 변화해간 것입니다. 
 
계룡시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는 유적공원 사진 
계룡시는 작은 농촌 마을에 불과한 곳이었지만 지금의 시로 승격된 것은 1989년부터 1993년까지 대한민국 육군·해군·공군 3군 본부가 이곳의 계룡대로 이전하면서 도시화가 진행되었습니다. 2003년 9월에 충청남도 논산시에서 분리되어 신설된 도시입니다. 
 
계룡시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는 유적공원 사진

'계룡(鷄龍)'의 '용(龍)'은 조화가 무쌍해 끊임없이 움직여 풍우를 몰고 오는 것으로 이것은 굽이쳐 흐르는 금강(錦江)을 두고 한 말이라 해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계룡(鷄龍)'이라고 하는 명칭은 어떤 의미에서는 금강(錦江)까지 합쳐진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금강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에 자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곳 주거지 역시 금강과 아주 가까운 곳에 있어서 주거지로서 최적의 환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계룡시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는 유적공원 사진

이곳에 자리한 주거지의 내부 시설에는 부뚜막과 다수의 기둥 구멍이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부뚜막은 북벽에 설치되어 있으며 소형의 경우 주로 벽면에 인접하여 확인이 됩니다. 
 
계룡시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는 유적공원 사진 
계룡시라는 지역명은 남과 여의 관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청동기, 철기시대에 사람이 살던 이곳은 삼한 때는 마한에, 백제 때는 황등야산군(黃等也山郡)에 속하다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황산군(黃山郡) 소속이 되었습니다. 
 
계룡시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는 유적공원 사진
 
계룡시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는 유적공원 사진
 
계룡시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는 유적공원 사진
 
유적공원이 만들어져 있는 계룡시 두마면에는 규모에 비해 지역문화재가 많습니다. 사계 김장생의 고택인 은농재, 김장생 선생의 9번째 아들 김비를 모신 신원재, 세종대 문과에 급제한 광산 부원군 김국광의 재실인 모원재 등이 있으며 지역에 계승되어 내려오는 민속놀이 왕대 백중놀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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