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팔경(扶餘八景)의 수북정의 인물 김흥국
2019.07.20(토) 08:30:56지민이의 식객(chdspeed@daum.net)
두보의 시를 생각하며 부여의 부여 팔경(扶餘八景) 중 한 곳이라는 수북정을 찾았다. 옛 부여는 화려한 곳이었지만 패망한 이후로 부여의 모든 건물은 신라와 당에 의해 불타버렸다.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지만 충청도에서 알려져 있지 않은 여행지도 많은 곳이다. 백마강을 내려다보는 곳에 수북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수북정은 조선 광해군(1608∼1623) 때 양주(楊州) 목사(牧使) 김흥국(1557∼1623)이 건립하였다 하며, 그의 호를 따서 수북정이라 부르고 있다.
다리가 만들어져 있어서 옛 풍경을 그대로 감상할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광해군도 초기에는 선정을 베풀고 어진 정치를 했지만 점차 좁아지는 자신의 입지로 궁지에 몰리지 않았을까. 당시 벼슬을 하던 김흥국은 인조반정을 같이 하자는 사람들의 말에 이미 광해군의 녹을 먹었으니 어찌 가담할 수 있겠는가, 라며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살았다.
자신의 호를 따서 이름을 지은 정자가 있는 이곳이 바로 낙향하여 살던 곳이다. 날마다 동지(同志)와 더불어 글과 술로 소일하였으며, 스스로를 강상풍월주인(江上風月主人)이라 칭하였다. 그와 친하던 사람이 바로 유학의 거목이며 유네스코 문화유산 돈암서원에 모셔진 김장생이다.
김장생은 그의 생각에 교유하며 살았다고 한다. 외직으로 여러 곳의 수령을 역임하면서 모두 선정을 베풀어 훌륭한 치적을 남겼던 사람이다.
수북정을 짓고 이곳에서 살면서 백마강을 바라보면서 자신을 추슬렀을 김흥국에 대해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는 많지가 않다. 수북정의 바닥은 모두 우물마루로 깔았고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천정도 가운데 기둥 부분의 서까래를 감춘 우물천정이고, 주변은 서까래가 노출된 연등천정으로 만들어져 있다.
인조반정이 성공한 이후에도 벼슬길을 열어 주었으나 광해군 때 양주목사를 지냈던 것을 남기며, 그냥 여생을 보냈다. 목사(牧使)는 동반 외직으로서 정3품 당상관의 관직으로 경기도에 3명, 충청도 4명, 경상도 3명, 전라도 4명, 황해도 2명, 강원도 1명, 함경도 1명, 평안도 2명 총 20곳에 목에 목사를 두었다.
수북정(水北亭) 정면에 붙어 있는 예서체의 기품 있으며 시선을 끄는 현판 글씨는 명필로 이름 날렸던 기원(綺園) 유한지(兪漢芝, 1760~1834)가 쓴 글씨라고 한다.
이 건물은 1644년(인조22)에 1차 중건하고, 165년이 지나 1809년(순조9)에 2차로 다시 중건하고, 다시 160년이 지나 당시 전준기 부여군수가 1969년 7월에 3차 중건을 하게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절개를 지키는 것도 절개를 지키지 않는 것도 사람의 몫이다. 그렇지만 그걸로 인해 자신의 인생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온전히 자신이 책임지어야 될 몫이기도 하다. 적어도 거짓을 진실이라고 말하지만 않으면 되지 않을까. 양주에 가면 그의 묘가 있는데 인조 때 받은 ‘부제학’이라 하지 않고 유언에 따라 광해군 때의 마지막 벼슬인 ‘양주목사’라 표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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