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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정신을 지켰던 충남 예산 이남규 선생의 이야기

2019.06.17(월) 10:01:46지민이의 식객(chdspeed@daum.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절대 권력자가 잘못한 것이나 판단을 잘못 내렸다면 분연하게 맞설 수 있는 사람이 군자라고 한다. 예산에 가면 수당 이남규 선생의 고택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수당 이남규는 고종의 결정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어명을 따르지 않고 부(否)를 말했던 사람이다. 벼슬길이라고 하면 지금의 정부나 지자체의 관료를 생각하면 된다. 비교적 최근까지도 장관의 후보에 오른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과연 국민을 위한 사람인지 알 수 없을 때가 많다. 

선비정신을 지켰던 충남 예산 이남규 선생의 이야기 사진

예산에 자리한 수당 이남규(1855~1907) 선생의 흔적은 기념관과 고택이다. 오래간만에 그의 흔적을 찾아가 본다. 이남규 선생의 경우 고려 말 목은 이색, 선조 때의 이산해, 이광임 등을 배출한 가문의 후손으로 보령에 있는 토정비결의 저자로 알려져 있는 이지함도 같은 피다.
  
선비정신을 지켰던 충남 예산 이남규 선생의 이야기 사진

단재 신채호 선생의 스승이기도 했으며 면암 최익현과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이었던 이남규 선생은 1893년 일본의 조선 내정간섭,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1905년 을사늑약 체결 등의 사건에 반대하여 의병 활동을 후원하였다.
  
선비정신을 지켰던 충남 예산 이남규 선생의 이야기 사진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있고 나서 일본은 고종에게 왕비를 폐서인한다는 공식 발표를 하기를 종용했다. 고종은 당시 왕비가 일본에 의해 비참하게 시해당하는 참변이 일어났는데도 협박을 이기지 못해 왕비를 폐서인한다. 
 
선비정신을 지켰던 충남 예산 이남규 선생의 이야기 사진

이남규 가문에서는 이남규 선생의 사후에도 독립운동을 위한 중추적인 활동도 했는데 평주(平洲) 이승복(李昇馥, 1895∼1978)은 1913∼1919년 러시아 연해주와 북만주에서 독립지사인 이동녕, 이회영, 이시영, 이상설 등과 교류하며 독립운동을 모색하였다고 한다. 
 
선비정신을 지켰던 충남 예산 이남규 선생의 이야기 사진

지금 이남규 선생의 고택에 가 보면 다양한 문구를 볼 수 있는데 대부분 논어 등에서 나온 것이다. 수당고택 옆 이 수당기념관에는 여섯 글자가 새겨져 있다.  ‘士可殺 不可辱(선비는 죽일 수 있으되 욕보일 수는 없다)'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선비정신을 지켰던 충남 예산 이남규 선생의 이야기 사진

이곳 별당이자 사랑채 역시 정면 6칸, 측면 3칸으로 충남도 유형문화재 68로 지정되었다가 2014년 2월 25일 국가 민속문화재 281호 승격되었다. 이남규 선생은 본관이 한산(韓山)이고, 1855년 서울 미동에서 태어나 1875년 향시와 사마시 양과에 급제하면서 관리의 길을 걷는다. 
 
선비정신을 지켰던 충남 예산 이남규 선생의 이야기 사진

1895년 영흥 부사 수당(修堂) 이남규(李南珪, 1855~1907)는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다시는 벼슬길에 오르지 않는다. 이때 이남규가 고종에게 올린 글의 일부는 아래와 같다. 

"이번에 내리신 칙명은 신하된 자로서 차마 들을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이를 참고 백성들에게 공포하라는 것입니까? 이제 신이 목숨을 바칠 때인 것 같습니다. 이 조칙을 선포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니 의리로 보아 신은 죽어야 마땅합니다. 이 조칙을 선포하지 않는 것 역시 어명을 거스르는 것이니 죄로 보아 죽어야 마땅합니다." 
 
선비정신을 지켰던 충남 예산 이남규 선생의 이야기 사진

그리고 10년이 흐른 뒤에 일본은 계획에 의해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한다. 일본에 의해 강제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남규는 분연히 나선다. ‘을사오적’을 처단하라고 주청했을 뿐 아니라, 을사늑약에 반대한 신하들도 꾸짖었다. “그 흉측한 문서를 찢어버리지 못하고 겨우 머리를 숙이고 붓으로 ‘부(否)’자를 써 내려가는 것만으로 할 도리를 다했다고 여길 수 있습니까?” 
 
선비정신을 지켰던 충남 예산 이남규 선생의 이야기 사진

공자는 군자와 소인배를 주와 불비로서 대비하였다. 군자는 마음이 넓으므로 타인의 성정과 입장 등에 두루 이해하며 동정과 이해의 마음을 품는데 이것이 주다. 소인은 생활과 관심이 자신의 육체와 이득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공정한 평가, 동정, 이해의 마음을 수용할 수 없다고 한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도 존중하지도 않기 때문에 극력 배척한다. 이것이 비다. 
 
이남규 생가는 남향집으로 모두 5량의 굴도리 집으로 홑처마에 팔작지붕이다. 안에 들어가서 보면 'ㄷ'자형 형태로 들어오는 사람을 감싸고 있는데 살짝 튼 느낌의 'ㅁ'자형이라고 보면 된다. 

자기가 한 말은 마땅히 지켜야 한다고 한다. 말과 행동에 믿음이 없는 사람은 동력원이 없으므로 아무 일도 진전시킬 수 없다. 그렇기에 어떤 일을 맡겨야 할지 모른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선비정신을 지켰던 충남 예산 이남규 선생의 이야기 사진

1906년 병오의병 당시 홍주에서 거의하였던 민종식(閔宗植)이 일본군에 패하여 은신을 요구하자 숨겨 주었으며, 이 일로 인하여 의병과 관련 있다 하여 1907년 공주옥에 투옥되었다가 며칠 뒤 온양 평촌 냇가에서 아들 이충구(李忠求)와 함께 피살되었다. 어떠한 힘 앞에도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말을 지키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 중 한 명이 이남규 선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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