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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양에서 만나는 옛사람 최익현이야기

2018.06.05(화) 14:42:43지민이의 식객(chdspeed@daum.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사람에게 생명이 부여되고 살아가게 된다. 그렇지만 사는 방법은 사람의 수만큼이나 다양하다. 많은 사람들이 살다가 죽고 흔적을 남기기도 하지만 대부분 그냥 삶을 살다가 끝을 낸다. 조선 말기의 유학자이며 일본에 항거하다가 세상을 떠난 면암 최익현 선생은 충청남도의 정신을 상징하는 사람이었다. 청양의 언저리와 공주의 인근에 자리한 모덕사는 면암 최익현 선생을 모신 곳이다.

청양에서 만나는 옛사람 최익현이야기 사진

청양의 끝자락에 있는 모덕사에  최익현 선생이 모셔진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최익현은 조선말의 학자인 이항로를 만나서 유학을 배우게 되는데 헌종을 거쳐 철종 1년에 최익현은 이항로를 모시고 설악산을 유람했고 23세 때는 병과로 급제해 주요 관직을 임명받게 된다. 

청양에서 만나는 옛사람 최익현이야기 사진

모덕사에는 최익현이 생전에 사용하였던 물건도 직접 볼 수 있는 작은 박물관도 운영되고 있다.

청양에서 만나는 옛사람 최익현이야기 사진


청양에서 만나는 옛사람 최익현이야기 사진

면암 최익현이 살았던 공간이 그대로 보존이 되어 있는데 일부는 다시 만들어진 것이다.
너른 마당에서 쉴 수 있는 공간도 있어 둘러볼만한 곳이 모덕사다.

청양에서 만나는 옛사람 최익현이야기 사진

송암리 장구(長久) 마을에 최익현이 와서 살았는데,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906년 청양군내 유림들이 발의, 1913년에 공덕사(恭德祠)라는 명칭으로 건립되었다. 고종의 밀지(密旨) 내용 중 ‘慕卿宿德(그대의 큰 덕을 사모함.)’에서 ‘慕’ 자와 ‘德’ 자를 따서 모덕사라 부르게 된다. 

청양에서 만나는 옛사람 최익현이야기 사진

면암 최익현을 보기 위해 사당으로 들어가 본다. 1982년부터 모덕사 관리사무소를 두어 관리하고 있는 곳이다. 1906년에 73세의 나이에 의병장으로 거병했던 최익현은  고종이 성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흥선 대원군이 계속 섭정하려고 하자 이를 탄핵하는 상소(계유 상소)를 올리고 강력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다 결국 제주도로 귀양을 갔으며 청토오적소와 창의토적소를 올려 의병 항일전을 펼치는데 자신의 동족과 전투를 하게 되자 포기하고 일본에 잡힌 후 대마도에서 세상을 떠난다. 

“신의 나이 74살이오니 죽어도 무엇이 애석하겠습니까. 다만 역적을 토벌하지 못하고 원수를 갚지 못하며,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강토를 다시 찾지 못하여 4천 년 화하 정도가 더럽혀져도 부지하지 못하고, 삼천리강토 선왕의 적자가 어육이 되어도 구원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신이 죽더라고 눈을 감지 못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청양에서 만나는 옛사람 최익현이야기 사진

모덕사의 시간은 이렇게 지나가지만 그가 남겼던 족적을 만나볼 수 있는 잠시의 시간이 주어진다. 면암 최익현을 생각하면 강직을 연상하게 하지만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월남 이상재 선생이 자연스럽게 생각난다. 비슷하지만 그 대응하는 방식이 달랐던 사람이다. 


을사오적의 주요 인물인 이완용, 송병준을 바라보며 이상재 선생은 이런 말을 한다. 
“대감들은 동경으로 이사 가시지요.”
“그게 무슨 말이오?”
“대감들은 망하게 하는 데는 천재니까 동경에 가면 일본이 망할 것 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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