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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고택의 사계

추사고택에서 만나는 추사의 숨결

2018.02.27(화) 10:18:49이병헌(ichmount@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추사고택의 봄
▲ 추사고택의 봄 
  
예산을 여행하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추사 김정희와 관련된 유적지를 찾아 가서 그의 숨결을 느껴보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만큼 널리 알려져 있어 예산하면 ‘추사 김정희’가 떠오르게 된다. 추사 김정희는 경주 김씨의 후손으로 권력가에서 태어났다. 병조판서 김노경과 기계 유씨(杞溪兪氏)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으나 큰아버지 김노영의 양자가 되어 대를 이었고 그가 문과에 급제하였을 때 조정의 축하를 받을 정도였으니 그만 보아도 세도가 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추사고택
 
김정희는 순조 1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나 예조 참의 그리고 설서 등 많은 직책을 맡아서 일을 하
였는데 우리나라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렇듯 권력에는 늘 시기가 있었다. 본인의 생각과는 관계없이 문제가 발생하였는데 1830년 생부 김노경이 윤상도의 옥사에 배후 조종 혐의로 고금도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순조의 배려로 귀양에서 풀려나 판의금부사로 복직되었고, 김정희 또한 1836년에 병조참판과 성균관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헌종이 즉위하고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할 때 그는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1840년부터 1848년까지 9년간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제주도 대정 추사관과 유배지에서 그의 제주도에서의 유배 생활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유배에서 풀려나 예산 고택에 왔고 예산군 신양면 일산이수정 현판을 써 주기도 하였다.
 
추사고택사랑채
▲ 추사고택사랑채
     
그가 귀양이 풀려 돌아왔으나 영의정 권돈인의 일에 연루되어 또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고 2년 만에 귀양에서 풀려 돌아왔으나 정계에는 복귀하지 못하였다. 그는 말년을 그의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머물며 학문과 예술에 몰두하였고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추사 김정희는 과천에 안장되어 있던 것을 1937년이곳 예산 추사고택 옆으로 이장하였다.  
    
추사고택안채
▲ 추사고택안채
  
김정희의 삶이 23세까지가 학문과 인격을 닦은 성장기였다면 24세에서 54세까지는 왕성한 활동을 한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24세 때 아버지를 따라서 청나라에 갈 때 함께 가서 연경에 머물면서, 옹방강(翁方綱)과 완원(阮元) 같은 유명한 유학자를 만났는데 그의 학문이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55세 이후는 시련의 시기였고 세상을 떠날 때 까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추사고택 영당입구에 피어난 상사화
▲ 추사고택 영당입구에 피어난 상사화
    
그는 옹방강이나 완원의 영향을 받아 금석학 연구에 몰두하였고 금석 자료를 찾고 보호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의 추사체는 8년 동안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 완성한 글씨체인데 유배지의 외로운 유배 생활 중에서도 추사체를 완성하여 조선 서예사의 한 장을 완결하였다.

또한 제주도에서 완성한 「세한도 歲寒圖」는 김정희가 그의 제자 이상적의 의리에 보답하기 위해 그려 준 그림이다. ‘추운 계절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푸르게 남아 있음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라는 공자의 명언을 바탕으로 겨울 추위 속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고고하게 서 있는 모습을 화폭에 그려내었다.   
   
추사고택의 가을의 모습
▲ 추사고택의 가을의 모습
    
추사고택은 예산 10경으로 지정되어있는데 솟을대문을 통과해서 안으로 들어가면 아담한 집을 만나게 된다. 안에는 안채, 사랑채, 문간채, 사당채를 만날 수 있다. 사랑채는 ㄱ자로 되어있고 안채에는 여섯 칸 대청과 두 칸의 안방과 건넌방이 있고, 부엌과 안대문, 협문 광등을 갖춘 'ㅁ'자형 가옥이다. 안방과 건넌방에는 각각 툇마루가 있고 부엌 천장은 다락으로 되어 있었으며, 안방과 건넌방 사이의 대청이 있는 그리 흔하지 않은 규모이다. 사랑채 앞뜰의 한 무더기 모란 옆에는 석년(石年)이라 길게 음각된 석주가 서 있는데 추사가 직접 만들었다는 해시계다. 
         
추사고택영당
▲ 추사고택영당
    
좀 더 집을 살펴보면 남쪽에 사랑채가 한 칸, 동쪽엔 두 칸의 온돌방이 있고 나머지는 모두 대청과 마루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뒤편에는 사당이 있고 옆에는 오죽이 자라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추사고택의 맨 뒷 건물은 영당으로 김정희가 세상을 떠난 뒤 아들 김상무가 세운 영당이다.
   
     
추사고택 근처에 있는 추사묘
▲ 추사고택 근처에 있는 추사묘
    
  추사고택을 돌아본 후에는 추사기념관에서 추사의 향기를 느껴본 후 추사묘에 들려 묵념을 한 후에 추사고택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화순옹주홍문과 백송공원 그리고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있는 백송을 만나보는 것이 좋다. 좀 더 시간이 있다면 화암사에 들려 추사가 와의 인연을 알아본 후에 화암사 뒤의 바위에 새겨진 ‘천축고선생댁(天竺古先生宅)’과 ‘시경(詩境)’ 그리고 그곳에서 2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소봉래(小逢萊)’를 돌아보면 더 즐거운 여행이 될 것 이다.
            
화순옹주 홍문
▲ 화순옹주 홍문

□ 추사고택
주소 :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추사고택로 261
전화 : 041-339-8242

천연기념물로 정해진 백송
▲ 천연기념물로 정해진 백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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