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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성주사지의 비밀이 드러나다

보령문화의 전당 '숭엄산 성주사' 특별기획전

2017.08.21(월) 13:00:25지민이의 식객(chdspeed@daum.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인간의 평균수명이 늘어 이제 100세 시대를 코 앞에 두고 있다. 평균수명이 50세에 불과했던 한 세기 전과 비교하면 인간 수명의 많은 변화가 있었던 셈이다. 100세를 기준으로 인간의 수명은 더디게 늘어나다가 대체 장기의 획기적인 발전이 수명의 변화를 만들어 낼 듯하다. 살아있는 사람이 상상하지 못한 시간인 1,00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지금은 그 흔적의 일부만 남겨둔 채 비밀을 간직하고 있던 사찰이 보령의 산기슭에 있다. 사적 제307호로 지정된 성주사지는 '숭엄산 성주사'로 첫 기획전을 열어 그 속살을 드러냈다. 

천년 성주사지의 비밀이 드러나다 사진

성주사가 그 비밀스러운 모습을 처음 드러낸 것은 1968년으로 동국대학교 박물관을 시작으로 13차례에 걸친 발굴조사가 진행되면서 1,000여 년간의 역사가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성주사지에서 출토된 유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백제시대 말의 기와가 출토되었는데 이를 통해 성주사는 백제 오합사에서 출발된 것으로 보고 있다. 

천년 성주사지의 비밀이 드러나다 사진

성주사는 창건 이전에는 중문과 금당, 강당이 일직선으로 이어진 형태로 지어졌지만 통일 신라시기 때 일어난 김헌창의 난 (822)등의 전란으로 불타 없어지고 다시 창건하면서 대규모로 사역을 확대하여 많은 승려들을 받아들였고 다시 중건 과정을 거쳐 삼천불전을 비롯한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무려 2,000여 명의 승려가 머물기도 했었다.

천년 성주사지의 비밀이 드러나다 사진

과거에는 사찰 같은 건물을 건축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와이며 발굴시 가장 많이 나오기도 한다. 성주사지에서는 백제 수막새를 비롯하여 그 영향을 받아 통일 신라시기에 만들어진 초기 수막새가 발굴되었다. 성주사가 대사찰로 자리 잡게 된 것은 당의 선종의 법맥을 이은 무염 (800-888)이 창건하면서부터인데 40여 년간 성주사에서 주석하면서 선승들을 배출하였다. 

천년 성주사지의 비밀이 드러나다 사진

성주사지에는 석탑도 남아 있지만 대표적인 문화재는 최치원이 글을 짓고 최인연이 글씨를 쓴 남혜화상백월보광탑비다. 글자 수가 5,120자에 달하며 높이는 4.55m에 이르는 이 비는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비석으로 통일신라 말기에 무염 대사를 기리기 위해 진성여왕이 최치원에게 글을 짓도록 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천년 성주사지의 비밀이 드러나다 사진

5,120자의 글에는 탑비의 건립과정을 비롯하여 골품제, 통일신라시대 사회상과 무염의 생애와 업적이 빼곡히 담겨 있어 역사를 연구하는 중요한 연구자료로 알려져 있다.  예로부터 탁본은 비(碑) 등에 새겨진 명문이나 서체를 전파하는 데 쓰였는데 탁본으로 전시된 남혜화상비는 작품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천년 성주사지의 비밀이 드러나다 사진

지금은 비의 파편들만 남아 있지만 남혜화상비보다 앞서 세워진 성주사비는 역시 통일신라시대의 비석으로 발굴 과정에서 12개의 조각이 발견되어 원래의 크기와 전체 글자 수 2,100자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는 국립 부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비에는 백제 헌왕태자를 언급하고 있고 대각간 김인문과의 연관성, 성주사의 백제시대 사찰의 존재를 의미하는 기반 자료로 생각되고 있다.

천년 성주사지의 비밀이 드러나다 사진

탁본은 초등학교 때 잠시 실습해보는 그런 기술이라고 생각되지만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기술이 탁본이었다. 실물 크기의 정교한 복제물을 얻을 수 있어 사진술이 고도로 발달된 현대에도 고고학 등에서 널리 이용되고 있고 목판인쇄나 석판인쇄가 시작된 이후에도 탁본은 비문 등의 유생의 글을 재생하는 가장 흔한 방법으로 쓰였다. 탁본은 서양보다 동양이 먼저 시작되었고 발달되었다. 

천년 성주사지의 비밀이 드러나다 사진

비교적 가장 온전한 형태로 발굴된 소조보살좌상은 사찰 중심부에 있던 삼천불전에 봉안되었던 소조상 파편들이 대량으로 수습되었다. 
조선 초기까지 그 사세를 유지해오던 성주사는 조선이 건국되고 나서 조금씩 쇠하였지만 임진왜란 이후까지 사찰이 유지되었지만 이후 17세기 중반 경 폐사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천년 성주사지의 비밀이 드러나다 사진

성주사는 글자를 모르는 사람도 깨달음을 얻는 다면 부처가 될 수 있는 선종(禪宗) 불교 사상 위에 건립되었다. 백성들의 지지와 사랑을 받았던 거대한 절터에는 1,000년의 세월이 아로새겨져 있다. 

2017.08.10~10.22 보령박물관 기획전시실 1
(충청남도 보령시 대흥로 63) 입장시간 : 오전9시 ~ 오후 6시관람료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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