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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 선생 통해 한국문화 우수성 알리자"

[서산] 최치원 인문관광 도시연합 협의회 열려

2016.07.27(수) 23:58:57충남농어민신문(sambongsan8549@hanmail.net)

"최치원 선생 통해 한국문화 우수성 알리자" 사진



21일 시청 대회의실에서 ▲경주시 ▲창원시 ▲합천군 ▲함양군 ▲군산시 ▲문경시 ▲보령시와 함께 ‘고운 최치원 인문관광 도시연합 협의회’가 개최됐다.<사진>

이들 시·군은 고운 최치원 선생 관련 유적을 보유하고 있는 지자체로 작년 7월 경주시에서 출범식을 가진 후 두 번째 정기회의다.

이 협의회는 전국에 산재된 최치원 선생의 유적을 토대로 지자체간 상호 교류를 통한 미래 지향적인 협력방안을 모색하고 최치원 선생에 대한 역사적 유적과 정신을 집대성해 문화융성 도시로 상생 발전하고자 조직됐다.

이날 협의회는 이완섭 서산시장을 비롯한 7개 자치단체장 및 관계공무원 등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지자체 간 상호업무 교류, 협의회 규약 개정 및 최치원 인문관광 관련 용역경과 보고 순으로 진행됐다.

아울러 이 시장이 최치원 인문관광 도시연합 협의회 회장으로 선임되기도 했다.

회의를 마친 후에 이 시장과 자치단체장들은 사적 제116호이자 우리나라 3대 읍성 중 하나인 해미읍성을 관람했다.

특히 이시장이 해미읍성의 역사적 중요성과 10월에 개최 되는 제15회 해미읍성 역사체험 축제를 직접 홍보해 눈길을 끌었다.

서산시는 내년 서산 대산항과 중국 롱청시 롱얜항간 국제여객선 취항에 발맞춰 중국인에게도 친숙한 최치원 관련 관광상품을 꾸준히 개발할 계획이다.

이완섭 서산시장은 “중국인도 칭송하는 고운 최치원 선생의 유적유물 등을 통해 지자체간 연결고리를 만들어 한국문화의 우수성을 알리고 중국 관광객 유치 등 관광산업의 활성화하는데 협의회원 도시 모두가 공동 노력하여 줄 것” 을 당부했다.

한편, 한국민족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자료에 의하면 최치원이 868년(경문왕 8)에 12세의 어린 나이로 중국 당나라에 유학을 떠나게 되었을 때, 아버지 견일은 그에게 “10년동안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격려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뒷날 최치원 자신이 6두품을 ‘득난(得難)’이라고도 한다고 하여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었던 점과 아울러 신흥가문출신의 기백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당나라에 유학한지 7년만인 874년에 18세의 나이로 예부시랑(禮部侍?) 배찬(裵瓚)이 주관한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였다. 그리고 2년간 낙양(洛陽)을 유랑하면서 시작(詩作)에 몰두하였다. 그 때 지은 작품이 『금체시(今體詩)』 5수 1권, 『오언칠언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 100수 1권, 『잡시부(雜詩賦)』 30수 1권 등이다.

그 뒤, 876년(헌강왕 2) 당나라의 선주(宣州) 표수현위(漂水縣尉)가 되었다. 이 때 공사간(公私間)에 지은 글들을 추려 모은 것이 『중산복궤집 中山覆?集 』 1부(部) 5권이다. 그 뒤, 877년 겨울 표수현위를 사직하고 일시 경제적 곤란을 받게 되었으나, 양양(襄陽) 이위(李?)의 문객(門客)이 되었다. 곧 이어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변(高騈)의 추천으로 관역순관(館驛巡官)이 되었다. 그러나 문명(文名)을 천하에 떨치게 된 것은 879년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고변이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어 이를 칠 때 고변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서기의 책임을 맡으면서부터였다.

그 뒤, 4년간 고변의 군막(軍幕)에서 표(表)·장(狀)·서계(書啓)·격문(檄文) 등을 제작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 공적으로 879년 승무랑 전중시어사 내공봉(承務?殿中侍御史內供奉)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에 승차되었으며, 겸하여 포장으로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았다.

이어 882년에는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고변의 종사관으로 있을 때, 공사간에 지은 글이 표·장·격(檄)·서(書)·위곡(委曲)·거첩(擧牒)·제문(祭文)·소계장(疏啓狀)·잡서(雜書)·시 등 1만여 수에 달하였으며, 귀국 후 정선하여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을 이루게 되었다. 이 중 특히 「격황소서(擊黃巢書)」[일명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명문으로 이름이 높다.

885년 귀국할 때까지 17년동안 당나라에 머물러 있는 동안 고운(顧雲)·나은(羅隱) 등 당나라의 여러 문인들과 사귀어 그의 글재주는 더욱 빛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당서(唐書)』 예문지(藝文志)에도 그의 저서명이 수록되었다. 이규보(李奎報)는 『동국이상국집』 권22 잡문(雜文)의 「당서에 최치원전을 세우지 않은 데 대한 논의(唐書不立崔致遠傳議)」에서 『당서』 열전(列傳)에 최치원의 전기가 들어 있지 않은 것은 중국인들이 그의 글재주를 시기한 때문일 것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29세로 신라에 돌아오자, 헌강왕에 의해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知瑞書監事)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국내에서도 문명을 떨쳐 귀국한 다음해에 왕명으로 「대숭복사비문(大崇福寺碑文)」 등의 명문을 남겼고, 당나라에서 지은 저작들을 정리해 국왕에게 진헌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신라사회는 이미 붕괴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지방에서 호족세력이 대두하면서 중앙정부는 주(州)·군(郡)의 공부(貢賦)도 제대로 거두지 못해 국가의 창고가 비고, 재정이 궁핍한 실정이었다. 889년(진성여왕 3)에는 마침내 주·군의 공부를 독촉하자 농민들이 사방에서 봉기해 전국적인 내란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에 최치원은 895년 전국적인 내란의 와중에서 사찰을 지키다가 전몰한 승병들을 위해 만든 해인사(海印寺) 경내의 한 공양탑(供養塔)의 기문(記文)에서 당시의 처참한 상황에 대해, “당토(唐土)에서 벌어진 병(兵)·흉(凶) 두 가지 재앙이 서쪽 당에서는 멈추었고, 동쪽 신라로 옮겨와 그 험악한 중에도 더욱 험악해 굶어서 죽고 전쟁으로 죽은 시체가 들판에 별처럼 흐트러져 있었다.”고 적었다.

당나라에서 직접 황소의 반란을 체험한 바 있는 그에게는 고국에서 벌어지고 있던 전쟁과 재앙이 당나라의 그것이 파급, 연장된 것으로 느껴졌던 모양으로, 당대 제일의 국제통(國際通)다운 시대감각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귀국한 뒤, 처음에는 상당한 의욕을 가지고 당나라에서 배운 경륜을 펴보려 하였다. 그러나 진골귀족 중심의 독점적인 신분체제의 한계와 국정의 문란함을 깨닫고 외직(外職)을 원해 890년에 대산군(大山郡: 지금의 전라북도 태인)·천령군(天嶺郡: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부성군(富城郡: 지금의 충청남도 서산) 등지의 태수(太守)를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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