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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정신·개화사상 구현, 민족의 진로 개척한 월남 이상재 선생

충청의 독립운동가, 보이스카웃 총재·조선일보 사장, 인재양성·민족언론 문화창달 앞장

2015.07.06(월) 16:33:19홍주신문(uytn24@hanmail.net)

선비정신·개화사상 구현, 민족의 진로 개척한 월남 이상재 선생 사진


월남 이상재(1850~1927) 선생은 1850년 10월 26일 충청남도 서천(舒川)군 한산(韓山)면 종지리에서 고려 말 충신 목은 이색의 16대 손으로 태어났다. 한산은 선생의 본관이다. 호는 월남(月南), 본명은 계호(季皓). 그가 태어날 무렵은 조선조 500년의 국운이 쇠하여 관리들의 부패가 극심하고 일본을 비롯한 외세가 침략하려는 움직임이 노골화되던 때였다.

월남은 18살 때 과거를 보러 처음으로 서울에 올라갔다고 한다. 관료계의 부패는 인재를 등용하는 과거시험까지 번져 있어서 합격 여부는 순전히 금권과 정실에 달려있었던 시기였다. 선생은 낙방하여 이 같은 실상을 온몸으로 겪은 후에 “참으로 한심하다. 다시는 들어갈 데가 아니구나”라고 탄식하고 과거장에 들어갈 생각을 버렸다고 한다. 선생은 서울에 남아 세도가의 문객(門客)으로 10년 동안 세상을 배웠다. 이때 그와 사귄 이가 박정양으로 정부가 1881년 일본에 신사유람단을 파견할 때 단장을 맡았던 사람이다. 1884년 우정국총판(郵政局總辦)을 맡고 있던 홍영식의 권유로 우정국 주사가 되어 인천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선생은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연루된 것으로 조사를 받았으나 당당히 처신하고, 고향으로 내려갈 것임을 밝혀 처벌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선비정신·개화사상 구현, 민족의 진로 개척한 월남 이상재 선생 사진


1881년 박정양이 신사유람단의 한 사람으로 일본에 갈 때 수행원이 되어 일본으로 건너가, 동행하였던 홍영식·김옥균, 어윤중 등의 개화파 지식인들과 깊은 교분을 나누었다. 이들의 수행원으로는 미국 유학경험이 있는 지식인인 유길준, 윤치호, 고영희 등이 이상재와 함께 따라갔다. 1884년 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실패로 돌아가자, 고향인 서천 한산으로 낙향하여 농사를 짓다가 박정양에 의해 계속 등용되었다.

선생은 자신에 대한 신임이 두텁던 박정양이 1887년 초대 주미공사로 임명되자 그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1등 서기관으로 근무하였다. 당시 월남은 한국사람을 낯설어하는 미국 청소년들이 외교관인 자신에게 돌을 던지면서 무례하게 굴어 경찰조사를 받게 되자 ‘너그럽게 용서해달라면서 선처해 줄 것’을 요청할 정도로 너그러운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이러한 관용은 후에 독립운동가로서의 이념이 되기도 했다. 선생의 미국생활은 오래 가지 못하고 이듬해 청나라의 압력을 받아 사신들과 함께 귀국하였다.

선비정신·개화사상 구현, 민족의 진로 개척한 월남 이상재 선생 사진


부친상을 당해 고향에 내려가 있던 선생은 박정양이 1894년 갑오개혁 후에 내무독판(內務督辦)이 되자 그의 추천으로 우부승지(右副承旨)겸 경연참찬(經筵參贊)이 되었다. 이어 학무국장(學務局長)을 맡으면서 젊은이들에게 바른 교육을 시키고, 민족자주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깊이 생각하게 됐다. 이후에 전개되는 선생의 후반인생을 보면 그것은 독립운동가로서 전범을 보이며, 올곧은 삶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보여주는 실천가임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선생은 1896년 서재필, 윤치호 등과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대중계몽집회인 만민공동회 의장과 사회를 맡아 활동했다. 하지만 1898년 독립협회는 부보상들의 어용단체인 황국협회를 앞세운 보수파들의 탄압으로 해산되었다. 1902년에는 개혁파 인사들이 대거 구금되거나 일본으로 피신하는 개혁당 사건이 일어나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당시 선생은 감옥에서 성서를 읽고 개신교에 입교했다. 이는 당시 지식인들이 서구종교인 개신교를 기울어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한 하나의 이념으로 받아들였던 현상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출옥한 뒤로는 황성기독교청년회를 중심으로 꾸준히 계몽운동에 참가했다. 조선기독교청년회(YMCA)는 3·1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으나 이 일로 3개월간 구금되었다. 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의 전신인 소년척후단조선총연맹 초대 총재, 조선일보 사장을 역임하면서 다양한 사회운동을 하였다. 선생은 기독교에 늦게 입문하여 나이가 들어서 젊은 사람들과 함께 청년회 운동을 하였고, 세상을 떠나던 해에도 신간회 초대 회장을 맡는 등 끝까지 원기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고 한다.

선비정신·개화사상 구현, 민족의 진로 개척한 월남 이상재 선생 사진


유머가 넘치는 밝은 성격이라 ‘만년청년’으로 불렸다고도 한다. 당시 보수적인 이들은 선생의 행동에 불만을 가졌으나, 선생은 “내가 청년이 돼야지, 청년더러 노인이 되라고 할 수는 없다”면서 청년들과 교류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는 것. 또한 자신은 셋방에서 살면서도 어려운 고학생이 있으면 학비를 줄 정도로 청년들을 다음 세대의 지도자로 키우기 위해서 노력했다.

1927년 2월에는 이념을 초월해 민족적 단결을 목표로 하는 민족단일 전선인 신간회가 결성되자 회장으로 추대됐다. 이미 고령과 노환으로 병석에 누워 이를 수락했으나 3월 29일 숨을 거뒀다. 4월 7일에는 선생을 추모하는 장례가 처음으로 ‘사회장’이라는 이름하에 경성(서울)에서 치러졌다. 당시 경성 인구는 35만 명 정도로 추산됐는데, 사회장에 운집한 추모객은 20만 명을 헤아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광복 70년인 지난 3월 서거 88주기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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