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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절 가야사지 발굴 3차조사 결과발표

2014.11.12(수) 11:48:21이영희(dkfmqktlek@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에는 가야사지(충청남도 기념물 제150호)가 있다. 말 그대로 가야사라는 절이 있던 터다.
가야사지는 조선말, 흥선대원군이 자기 아버지인 남연군 이구의 묘를 경기도 연천에서 이장하기 위해 불태워 버린 슬픈 역사를 가진 절이다.
 
당시에 덕산면 가야산(伽耶山) 옥양봉 남쪽 기슭에 있던 가야사는 국내 4대 총림 가운데 하나인 '덕숭총림'으로 지정된 수덕사를 말사로 둘 정도의 사세(寺勢)를 가진 절이었다고 하니 그 규모가 짐작이 간다.

덕산

▲ 덕산현 지도 - 1872년
 
 

하늘에서 본 남연군묘와 가야사지

▲ 하늘에서 본 남연군묘와 가야사지


가야사지 발굴 터

▲ 가야사지 발굴 터


슬픈 절 가야사지 발굴 3차조사 결과발표 사진


슬픈 절 가야사지 발굴 3차조사 결과발표 사진


슬픈 절 가야사지 발굴 3차조사 결과발표 사진


슬픈 절 가야사지 발굴 3차조사 결과발표 사진


슬픈 절 가야사지 발굴 3차조사 결과발표 사진


슬픈 절 가야사지 발굴 3차조사 결과발표 사진


이런 대형 사찰이 개인의 욕심에 의해 불태워졌기 때문에 귀중한 보물이나 역사적 가치가 있는 사료가 묻혀 있을 수도 있고, 또한 역사성을 가진 건물지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금년 6월부터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의 주도로 발굴조사가 시작됐다.

그리고 얼마전이었던 10월13일에 현장에서 3차 발굴조사 자문회의가 열렸는데 이때 다수의 유물과 역사적 사실이 발표됐다.

이날 발표에 의하면 그동안의 발굴조사를 통해 가야사의 사명(寺名)과 사역(寺歷)을 추정할 수 있는 유물이 출토됐으며,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8동의 건물 터가 발견돼 가야사의 가람배치와 범위 등을 확인하는 등 많은 성과를 거뒀다고 한다.
 
또한 가야사지 바로 위에서 절터를 바라보며 만들어져 있는 남연군묘의 제각(祭閣)시설 유구도 확인했다고 한다.
 
그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이번에 절터에 대한 문화재 발굴조사가 이뤄진 것이고 상당부분 비밀이 밝혀진 것이다.
 
제각시설은 남연군묘의 제례를 지내기 위한 시설로 남북 방향을 장축으로 조성돼 있으며, 장방형의 기초시설을 중심으로 ㅁ자 형태 암거(담장)로 보호되는 형태로 구성돼있다.

또한 제각시설은 남연군묘 위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가야산의 주봉인 석문봉과 남연군묘에 방향을 맞춰 배치돼 있으며, 상부의 기단 및 초석시설은 일부 훼손된 것으로 추정된다.
 

가야사진 출토유물

▲ 가야사진 출토유물


슬픈 절 가야사지 발굴 3차조사 결과발표 사진


슬픈 절 가야사지 발굴 3차조사 결과발표 사진


슬픈 절 가야사지 발굴 3차조사 결과발표 사진


슬픈 절 가야사지 발굴 3차조사 결과발표 사진


슬픈 절 가야사지 발굴 3차조사 결과발표 사진


작년에도 1차 발굴조사가 이뤄졌는데 불전지를 포함한 5동의 건물지가 확인됐고, 불상 8점 등 모두 313점의 유물이 출토됐다.
 
현재 가야사지 경내로 추정되는 곳은 충남도 소유이지만 토지임대를 통해 논과 밭, 과실수 농장 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가야사지는 남연군묘 동쪽으로 현재 민간인 소유로 되어 있는 경작지를 포함해 최소 약 3만㎡ 이상될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니 그 규모가 실로 대단했음이 짐작된다.
 

남연군 이구의 묘

▲ 남연군 이구의 묘


여기서 잠깐 가야사지와 남연군묘의 악연을 짚고 갈 필요가 있다.
 
야망을 품고 있던 흥선대원군은 이곳 가야사가 있는 곳으로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당시에는 묘가 경기도 연천에 있었음) 옮기면 두명의 왕을 배출할수 있다는 지관의 ‘이대천자지지’설을 따르기로 했다.
그는 결국 아버지의 묘를 옮겨 쓰기 위해 절을 불태워 없앤 것이고, 그 자리에 지금의 이 묘를 만들었다.
 
높다란 위치에서 내려다 본 가야사의 불타 없어진 흔적이 쓸쓸하게만 느껴진다.
 

슬픈 절 가야사지 발굴 3차조사 결과발표 사진


이 보호각이 남연군 이구를 싣고 온 상여인 남은들 상여를 보관하고 있는 곳이다.
현재 실제 남은들상여는 국립민속박물관에 전시돼 있고 이곳에 있는 것은 당시의 모양 그대로 재현한 것이라 한다.
 
하여튼 지관의 말이 맞아 떨어진 덕분인지 실제 흥선대원군은 고종과 순종을 왕위에 얼리는데 성공하기는 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권력자들의 욕심 때문에 남연군의 상여를 메고 500리길을 걸어와야 했던 당시 백성들은 얼마나 고달팠을까.
 
또한 이곳으로 옮겨온 남연군묘도 그 훗날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독일 상인이던 오페르트의 도굴사건 때문이다.
 
오페르트는 1868년 4월 조선이 천주교를 탄압한다는 이유로 구만포로 상륙해 덕산 군청을 습격하고,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 했으나 묘가 생각보다 단단해 도굴에 실패했다.
그후 이 사건은 흥선대원군의 쇄국저책을 강화하는 빌미가 되었다.
 
어쨌거나 흥선대원군의 권력욕에 의해 불태워진 가야사.
충청남도 역사문화 연구 관계기관에 의해 제대로 그 실체가 밝혀져 역사적 고증이 이뤄지고 더 많은 사실들이 알려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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