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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스마 넘쳤던 후백제 대왕, 논산의 견훤왕릉 답사기

2013.08.17(토) 12:09:20금산댁(dksjks22@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아기를 낳을 때는 늘 태몽이 전해져 옵니다. 호랑이가 나타나서 꽉 잡았다거나, 남편과 낚시를 갔는데 커다란 잉어가 보이길래 얼른 품안에 안았다는 등...

 어차피 사람 사는 일이기에 태몽은 일반인이나 왕족이나 다 똑같이 있게 마련인데 태몽과 관련된 전설 하나가 있습니다.

 한 처녀가 한 귀공자와 사귀었는데 이 귀공자는 심야에만 살그머니 나타났다가 새벽녘 날 새기 전에 황급히 사라져 버리곤 하길 반복하였답니다. 그렇지만 딱히 자기 집을 알려주지도 않았다는군요.

 그래서 어느날, 바늘에다 긴 실을 꿰어 귀공자의 옷에 묶어 놓은 후 다음날 새벽 그의 방을 나서는 귀공자의 옷자락에 꿰어 있는 명주 실을 따라 갔는데 놀랍게도 그 실은 어느 집의 지붕에 있는 기왓장 속으로 들어가 있더라는군요.
 궁금증을 이길수 없어 기왓장을 걷어 내고 보니 그 안에는 커다란 지네 1마리가 꿈틀거리고 있었답니다.

그 후 그녀가 아기를 낳았는데 그가 바로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었습니다.
 이 태몽 덕분에 견훤을 일컬어 ‘지네장군’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태몽 설화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당시 견훤 왕과 평생의 라이벌 관게였던 왕건측이 그를 폄하하기 위해, 즉 “견훤은 지네 혹은 지렁이의 자식이다”라며 형편없는 사람으로 만들기 의해 조작한 태몽이라는 설입니다.

 역사가 승자에 의해 기록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 부분도 그렇게 해석하면 될것 같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우리가 아는 견훤은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충남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에는 후백제 왕이었던 견훤왕릉이 있습니다, 백제후손 충청남도민이라면 후백제왕 견훤에 대해 좀 알아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 견훤왕릉 답사를 떠나보았습니다.

견훤왕릉 입구

▲ 논산의 견훤왕릉 입구
 

저 멀찌기 왕릉이 어렴풋이 보입니다.

▲ 저 멀찌기 왕릉이 어렴풋이 보입니다.


 견훤(867~936)은 상주에서 의자왕의 8대손인 부여 아자개의 아들로 태어나 서남해지방 방위에 공을 세운 후 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서 892년(진성여왕 6)에 반란을 일으켜 무진주(광주)를 도모하는 등 독자세력을 키워 나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서기 900년에 신라의 수도인 금성(경주)을 함락시켜 친려 정책을 쓰던 경애왕을 살해한 후 후백제를 세웁니다.

 이후 견훤은 고구려를 이어 새로운 나라를 세운 고려 태조 왕건과 평생의 경쟁관계 속에서 지내게 됩니다.

찾는 이도 많지 않은 견훤왕릉. 약간 쓸쓸하게...

▲ 찾는 이도 많지 않은 견훤왕릉. 약간 쓸쓸하게...
 

비석 하나 덩그러니...

▲ 비석 하나 덩그러니...
 

견훤

▲ '후백제 왕 견훤릉'이라고 씌여 있음.


 그런 와중에 견훤은 수많은 해전을 치르면서 강대한 힘을 키웠고, 주변 지방에 있는 호족들과 결합하여 결국엔 후백제라는 나라를 세우게 된 것입니다.

 견훤은 총명하고 기백 넘치고 용기있는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요즘 표현대로 카리스마가 넘쳤던 인물이었다는 것이죠.

 오래전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짐이 곧 국가다”라며 왕권의 절대성을 부여했듯이, 견훤 역시 늘 강대한 국력과 지도력, 카리스마로 자신이 치른 전투에서 연전연승 하면서 세력을 확장해 나갔던 것입니다.

비석 뒤의 비문

▲ 비석 뒤의 비문
 

카리스마 넘쳤던 후백제 대왕, 논산의 견훤왕릉 답사기 사진

▲ "모악산이 보이는 곳에 묻어 달라" 했던 그의 유언대로 멀리 전주 모악산이 보이는듯.


 양국의 계속되는 전투중 견훤은 팔공산 아래에서 왕건의 군대를 격파하여 왕건 수하의 김락과 신숭겸을 죽이는 등 큰 전과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929년 고창(안동)에서 왕건의 군사에게 크게 패한 후부터 차츰 형세가 기울기 시작했고, 왕위 후계를 둘러싼 내부 암투가 시작됩니다.

서기 935년 10월.

 견훤은 불공을 드리고 전주 모악산 금산사를 나서려던 차에 큰아들 신검에 의해 금산사에 강제로 연금을 당하게 됩니다.
 군사를 일으켜 아버지 견훤을 유폐한 것입니다. 반란이었죠.

 견훤의 아들 신검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는 큰아들인 자신 신검을 멀리하고 후궁의 아들인 금강에게 왕권을 물려주려 하자 선수를 친 것입니다.

 견훤은 자신을 배반한 큰아들에 대한 분노 속에서 두달 가까이 금산사에 연금돼 있다가 결국 고려의 왕건에게 몸을 맡겼고, 이후 홧병에 의해 마지막 숨을 거두고 말았답니다.

 삼국사기에는 견훤의 죽음에 대해 “깊은 근심으로 인해 등창이 심하게 생기고 수일 후에 황산불사(논산에 있는 고찰 개태사)에서 죽었다”고 씌여 있다고 합니다.

홀로 외로이 잠들어 있는 견훤 왕.

▲ 홀로 외로이 잠들어 있는 견훤 왕.
 

찾아 와 주는 이도 없이...

▲그래도 누군가 찾아 와 꽃다발을 놔두고 갔습니다.


 또한 동국여지승람에는 “견훤의 묘는 은진현의 남쪽에 있는데, 임종시 유언으로 완산이 그립다 하여 이곳에 무덤을 썼다”고 되어 있다는군요.

 삼국사기의 기록처럼 홧병에 등창까지 도져 죽었다는 사실을 정설로 받아들일수 있을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친아들에 의한 반란과 왕인 자신을 유폐시킨 것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해 등창까지 생겼을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불운의 왕.

 후계 문제로 아들의 반란과 그로 인한 국력의 쇠퇴,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기억속에 남지 못한채 맞이한 쓸쓸한 최후....

 

불운한 대왕 견훤, 이것에 머물러 계십니다.

▲ 불운한 대왕 견훤, 이것에 머물러 계십니다.


 오래전 TV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보았던 견훤의 모습에서 투영된 그의 기개 넘치는 용모와 달리 대부분 ‘패자’로써 기억되는 왕 견훤.

 그러나 필자는 어느 군주보다 강한 왕권과 카리스마로 후백제를 키워 나갔던 인물 견훤 왕을 떠올리며 잠시 숙엄한 마음으로 왕릉을 쳐다봅니다.
 이젠 그 많은 영욕의 세월을 덮어두고 더 깊이 잠드시라고...

 백제 후손은 이렇게 “여기,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 왕께서 잠들어 계시다”고 기억해 드릴것을 약속하며 발걸음을 옮깁니다.

견훤왕릉(충청남도 기념물 제26호) : 충남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 산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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