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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서 장군 유허지를 보며 권력의 무상함을...

왕권 찬탈에 눈 먼 수양대군의 계유정난과 김종서 가문의 멸문지화

2013.08.08(목) 17:07:33이영희(dkfmqktlek@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절제 김종서(金宗瑞, 1390∼1453).

우리 역사에서 그를 수식하는 말은 참 많이 있습니다. 육진 개척자, 한국의 국경선을 획정한 인물, 문신이면서 무장으로 더 잘 알려진 사람, 강직하고 위엄 있던 관료,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해 세종, 문종, 단종대에 이르기까지 왕들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어 중앙 관료에서 한번도 밀려나 본 적 없는 사람. 한 시대를 풍미한 걸출한 학자... 그리고 계유정난의 참화.

 김추의 아들로 태어나 태종때 문과에 급제한 후 두루 관직을 거치다 세종 때에는 함길도관찰사가 되어, 육진을 개척했고 고려사, 세종실록, 고려사절요 등 주요한 서책을 만든 문무를 겸비한 그, 김종서 장군.
 

김종서 장군 유허지

▲ 김종서 장군 유허지. 오른쪽 앞은 행적비이고, 저 뒤에 서있는 비는 유허비임. 


 공주시 의당면 월곡리에는 왕위 찬탈을 노린 수양대군에 의해 단종 1년(1453)에 두 아들과 함께 죽임을 당한 후 역모의 누명을 쓰고 계유정난에 휘말려 참담하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그의 유허지가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멸문지화를 당한 그의 자취는 생가지와 묘만 남아 오늘날 후손들에 전하고 있는데, 며칠전 찾아가 본 그가 출생한 곳으로 알려진 이곳 공주 의당면 월곡리는 당시의 아픔을 기억하고 있는지 그저 조용하고 평범한 농촌 마을이었습니다,
 

월곡마을 의당초등학교 오른편으로 난 이 길을 따라 가면 저기 슬레이트 집이 한채 보이고 그 앞에 유허지가 나옵니다.

▲ 월곡마을 의당초등학교 오른편으로 난 이 길을 따라 가면 저기 슬레이트 집이 한채 보이고 그 앞에 유허지가 나옵니다.


 김종서 장군의 유허지는 의당초등학교 정면을 바라보면서 오른쪽으로 돌아 200m쯤 가다 보면 왼쪽 산 아래에서 나타납니다.
 

수풀 속에 외로이 서 있는 유허지의 행적비

▲ 수풀 속에 외로이 서 있는 유허지의 행적비
 

행적비 뒤에서 바라본 마을쪽 전경

▲ 행적비 뒤에서 바라본 마을쪽 전경


 수풀 사이로 난 작은 계단을 밟고 올라가자 먼저 행적비가 보이고 그 뒤로 유허비가 나란히 서서 보이는데 이 두 비가 세워져 있다는 사실조차 거의 모든 사람들이 모르는 듯 했고, 그래서인지 찾아와 주는 사람도 거의 없는 듯 했습니다.

 선생의 생가 터이면서 그의 가족이 평생을 살았던 곳으로 추정되는 이 의당 초등학교와 주변의 땅에 대해 주변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정승의 집터’라고 불러왔고 김종서 장군의 순천 김씨 가문이 계유정난으로 하루아참에 화를 입고 멸문을 당한 뒤 지금까지 다른 가옥이나 건물을 짓지 않고 보존해 왔다고 합니다.

 덕분에 이 생가지는 현대식 건물에 파묻히지 않은채 온존히 오늘날까지 지켜질수 있어서 이곳에 행적비와 유허바를 새워 보존할수 었던것 같습니다.
 

김종서 장군 유허지와 인연이 깊은 의당초등학교

▲ 김종서 장군 유허지와 인연이 깊은 의당초등학교


 그리고 들어보니 이 유허지는 의당초등학교와의 남다른 인연이 있더군요.

 의당초등학교를 처음 건립할때 당시 학교 건립 담당자는 김종서 유허지 부지를 학교 땅으로 함께 사 들였는데, 그 이유는 학교측이 일부러 이 땅을 보존하면서 학생들의 역사 교육장소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합니다. 그 덕분에 유허지도 온전히 잘 보존, 관리해오고 있다고 합니다.

 처음에 그런 생각을 하신 교육자의 뜻이 참 좋습니다.
 

유허비

▲ 유허비

유허비 뒷 모습

▲ 유허비 뒷 모습
 

비몸에 적힌 그의 충절과 전공 기록

▲ 비몸에 적힌 그의 충절과  당시의기록


  유허비에는 <충익공절제김종서장군유허비>라 씌어져 있고 현재 향토문화재자료로 선정되어 관리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김추는 이곳 공주 의당면 월곡리에서 도총제를 지냈고 어머니는 대사헌 배규의 딸 성주배씨였는데 김종서 장군은 3남중 둘째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세종 때 함길도관찰사가 되어 야인들의 국경침입을 격퇴하고 6진을 설치하여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한국의 국경선을 확정하였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지용을 겸비한 명신이었으나, 단종이 12세로 왕위에 오르자 좌의정으로서 어린 왕을 보필하다가 왕위를 노리던 수양대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지요.
 

행적비 대리석 사이로 삐죽 고개를 내밀어 자란 풀. 왠지 권력무상를 떠올리게 하는...

▲ 행적비 대리석 사이로 삐죽 고개를 내밀어 자란 풀. 왠지 권력무상를 떠올리게 하는...


 김종서 장군에게 권불10년, 화무십일홍이란 말은 적절치는 않지만 일장춘몽이라는 말과 함께 권력의 무상함을 떠올리게 합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걸출한 인물이 어느 권력욕에 눈이 먼 사람에 의해 생전의 혁혁한 치적은 물거품이 되고 멸문까지 당해야 했던 역사적 사건 뒤안길에서 보니 그이 생가 터 유허지에는 그저 무상의 허허로움만 맴돌 뿐이었습니다.

 그래도 후손들은 당신의 충정과 역사적 치적을 기억하며 뜻을 기리고 있으니 너무 외로워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김종서 유허지 <충남 공주시 의당면 월곡리 138-2>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9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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