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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박물관에 전시된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

2013.07.17(수) 16:35:52이영희(dkfmqktlek@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충청남도 도민들은 공주와 부여의 찬란했던 백제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물론 백제문화는 공주 부여뿐만 아니라 호남 일부지역과 서울 경기 일부지역도 포함은 되지만 왕궁이 있었고, 국가의 수도로서 왕의 무덤까지 있었던 공주 부여의 충청남도 만한 정도는 되지 못합니다.

 하물며 공주와 부여는 웅진과 사비라는 이름으로 백제의 옛 수도였으니까요.

 그런 공주 부여에는 백제의 선조들이 남겨주시고 간 찬란한 유물이 국보급부터 일반 문화재까지 아주 많은데 이 유물들의 결정적 특징중 하나라면 유물의 생성시기가 적혔거나 생성시기를 알려주는 기록문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기록들을 통해 주변의 웬만한 모든 유물들이 당시를 전후해 시기, 형태, 사용자, 그리고 시대적 배경과 국제정세까지 소상하게 알수 있으니까요.

 역사에서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지 않을까요. 이 기록은 곧바로 아이들이 배우는 교과서의 내용을 바꿀 만큼 큰한 역할을 합니다.

 부여에서 출토된 국보 제288호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百濟昌王銘石造舍利龕) 역시 그런 측면에서 귀하고 소중한 문화재입니다.

부여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

▲ 부여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


 현재 이 사리감은 부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사리감은 백제 때 사리를 보관하는 용기로써, 능산리 절터의 목탑 자리 아래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출토 당시 이미 사리감은 폐기된 상태였으므로 사리 용기는 없었다고 합니다.

 사리감의 크기는 위쪽은 원형, 아래쪽은 판판한 높이 74㎝, 가로·세로 50㎝인 터널형이고  감실 내부의 크기는 높이 45㎝ 정도로 파내어 턱을 마련하였는데 내부에 사리 장치를 놓고 문을 설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합니다.

오른쪽 옆에서 본 사리감 외형

▲ 오른쪽 옆에서 본 사리감 외형


 사리감 이야기를 하기전에 시 한편 읽고 가지요.
 일전에 한국시인협회에서 국보사랑 시운동을 펼친적이 있는데 이 행사는 시인들이 국보를 소재로 한 시를 발표하고 이를 바탕으로 전국 박물관에서 순례 시낭송회를 개최한 것입니다.

제목 : 사리감 소묘
글쓴이 : 한분순

오롯이 여민 꽃잎 / 말갛게 머금은 씨눈에
마음 닿으면 넘실대며 / 살아나는 백제 신비
천년의 계절을 지나 / 그윽한 역사 만개한다.
백제 창왕, 형형하던 / 그 숨결 스며들어 
시들줄 모르는 / 견고한 아름다움
금석문 빗장 뒤에서 / 꽃망울 된 사리의 기억.
찾아온 이들, 속 깊은 사연 / 모두 맺힌 천년 가슴이 / 이슬에 씻겨 새로 돋아나
다시 쓰는 백제 역사 / 무량수 드리워진 뜰 안 / 꽃이 핀다, 지지 않을.     

시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뭔가 느껴지는 참 좋은 글 같습니다.
좋은 시 한편을 감상하고 났으니 사리감의 진가에 대해 보겠습니다.

 이 사리감의 감실 좌우 양 쪽에는 각각 예서(隸書)체 풍의 글자가 10자씩 새겨져 있는데, 명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른쪽 명문

▲ 오른쪽 명문
 

왼쪽 명문

▲ 왼쪽 명문


오른쪽에 “百濟昌王十三秊太歲在(백제창왕13년태세재), 왼쪽에 丁亥妹 公主供養舍利(정해매공주공양사리)”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를 풀어 보자면 “이 사리감은 성왕(聖王)의 아들로 554년 왕위에 오른 창왕(昌王)[위덕왕(威德王)]에 의해 567년 만들어 졌으며, 성왕(聖王)의 따님이자 창왕(昌王)의 여자 형제인 공주가 사리를 공양하였다”는 내용입니다.

 이 사리감 자체는 형태나 예술성, 그리고 사용된 부재료(예를 들면 금, 은, 동, 혹은 석조 등) 같은 것을 놓고 볼때는 아주 큰 점수를 주기 어렵다 해도 거기에 적힌 명문이 너무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사리감에 적인 내용을 바탕으로 주변의 모든 문화 유물에 대한 연대평가가 이뤄지고, 그 시기의 사회성이나 복식, 제도, 생활형태가 모두 파악될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리감 설명

▲ 사리감 설명


 또한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은  당시의 역사 연구에 너무나 중요한 금석문(金石文) 자료로서 백제와 중국과의 문화교류의 일면도 파악할 수 있고, 사리를 봉안한 연대와 공양자가 분명하고, 백제 절터로서는 절의 창건연대까지 당시의 유물에 의해 최초로 밝혀진 작품이랍니다.

 우리가 뉴스를 듣다 보면 앵커가 “언제 어디서 어떤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그것이 어느 시기의 어떤 것들에 대한 의문을 풀어줄수 있는 귀중한 자료여서 역사학자들을 크게 흥분시키고 있다”고 하는 멘트를 하는 경우를 자주 접합니다.

 실제로 더 이상의 자료가 없어 어떤 부분에 대한 추정이 막혀 있었는데, 그것을 설명할수 있는 기록이 있는 문화재가 발견이 되어 수백 수천년 전 역사의 수수께끼를 풀어준다면 학자들은 정말로 흥분할 것 같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런 귀중한 문화유물을 남겨주신 선조들께 진심어린 감사와 경의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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