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박봉의 쥐벌이인 까닭으로 사무실 주변에 포진한, 아니 차라리 포위당하고 있는 커피전문점엔 눈길조차 줄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한 잔에 무려 6천 원 이상이나 하는 커피를 마신다는 건 내 사전엔 결코 있을 수 없는 때문이다. 그 돈이면 소주가 몇 병인데...! (^^;)
이같은 나의 한계를 잘 아는 지인들은 그래서 커피전문점 보다는 소줏집으로 날 데리고 가길 즐긴다. 소줏집에 가서 술을 마시노라면 이따금 음료수를 시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가만 보면 예전엔 콜라가 강세였으나 요즘엔 사이다가 대세이지 싶다.
그래서 말인데 ‘사이다’ 라고 하면 나라고 해서 할 말이 없는 게 아니다. 여러분들은 45년 전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겠는가? 아울러 그 때의 담임선생님 이름을 잊지 않을 수 있는가! 그랬다. 내가 여덟 살이 되어 천안의 S초등학교에 입학한 건 바로 45년 전 봄이었다.
나의 담임은 채0숙 선생님이셨는데 그 분의 존함이 지금도 또렷한 것은 내 기억력이 비상한 때문이 아니다. 이는 그 선생님이 내게 보여주셨던 부분 거개가 마치 모정의 그 것처럼 애틋하고 살가움까지 강물처럼 출렁였던 때문이다.
비록 홀아버지와 애면글면 어렵게 살았을망정 시험만 봤다손 치면 무조건 100점을 받았다. 그렇게 질주하는 나에게 선생님께선 늘 따뜻한 화로의 역할까지를 마다치 않으셨는데 하루는 학교 뒷산으로 소풍을 가게 되었다.
한데 당시는 소풍의 기본옵션인 김밥은 몰라도 사이다 한 병을 사 마신다는 것이 꽤나 힘에 부치는 게 ‘엄연한 현실’이었다. 여하튼 이윽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나무가 비교적 우거져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잘 뵈지 않는 곳에 앉은 선생님이 은밀히 날 부르셨다.
그리곤 그 귀하고 맛난 사이다를 한 병 서슴없이 따시는 게 아닌가! “자, 어서 이것 좀 마시거라.” 풍성한 거품과 어우러진 달달한 맛은 정말이지 그날 소풍의 압권에 다름 아니었다. 이런 선생님이 내 엄마였더라면... !!
그날 선생님이 나에게만 주신 그 달콤한 사이다는 더욱 가열찬 힘을 내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나는 소풍 뒤에 더 ‘열공’하여 마침내는 반에서의 1등을 넘어 전교 수석까지를 차지하기에 이르렀으니까.
세월은 여류하여 나는 반백의 중년이 되었으니 그 선생님께선 칠순도 넘은 할머니가 되셨으리라. 꼭 한 번만이라도 뵙고 싶은 채0숙 선생님!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계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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