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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사성은 아산시가 자랑하는 인물이다

2012.01.24(화) 경천(ee6@kg21.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맹사성은 충남 아산시 온양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수문전제학 맹희도이고 본관은 신창이고 자는 자명 호는 고불 고려말의 무신 최영의 손녀사위이다. 나는 충남 아산시 배방읍에 있는 맹사성고택을 여러번 방문했다. 맹사성고택은 고려 말의 무신 최영이 지은 집으로 맹사성의 부친 맹희도가 물려받은 후 수백년간 대를 이어 살아오며 보존되고있다. 맹사성고택은 신창맹씨 종중 소유로 되어있다.

맹사성고택은 설화산을 등지고 있는 정면 4칸 측면 3칸의 ㄷ자형 맞배지붕집이다. 뜰에는 맹사성이 심은 수령 600여년의 은행나무 두 그루가 마주 서 있으며, 은행나무 아래서 강학(講學)했기 때문에 맹씨행단이라고도 불렀다. 맹사성고택이 있는 마당에 서서 보면 돌로 울타리를 만든것이 보이고 이 울타리를 벗어나면 약간 비탈진 언덕에 “삼상당”이 있다. 맹사성의 유물을 모아 전시하고 있는 유물 전시관이 세워졌다 이곳에 고불맹사성유물일괄(중요민속자료 225호)이 보관되어 있다. 주변에 현충사, 온양온천, 외암리민속마을, 아산온천, 도고온천, 충무공 이순신장군묘 온양민속박물관, 삽교천방조제 등의 관광지가 있다.

맹사성은 고려 우왕때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청렴하면서도 강직한 관직생활로 선비정신을 드높였다. 관학파인 권근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충효 사상의 철저한 실천가였다. 정치사상은 왕도정치에 따른 덕치주의가 핵심이었으며 맹사성은 살림살이를 일삼지 않고 식량은 녹미(祿米)로 하였고 매양 출입할 때에는 소(牛)를 타기를 좋아하였으므로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 영의정 성석린은 선배로서 그의 집 가까이에 살았는데, 매양 그의 집앞을 오고 갈 때는 그 집앞에서 말을 내려 지나갔다.

맹사성은 청백리로도 이름이 났고 부모에게 효성을 다한 효자로도 이름이 났다. 맹사성은 조선왕조 3대 태종대왕때 백관의 비행을 규찰하는 기관인 사헌부의 으뜸벼슬인 대사헌에 재직시 지평 박안신과 함께 태종대왕의 부마(임금의 사위)인 조대임(태종의 딸 경정공주의 남편)을 왕의 허락도 없이 국문하여서 태종대왕의 노여움 때문에 충청도 한주에 유배되었으나 영의정 성석린의 변호로 풀려났다.

1430년 “태종실록” 편찬을 감수하여 실록이 완성되고 세종이 보려하니 “왕이 실록을 보고 고치면 후세에 이를 본받게 되어 사관(史官)이 두려워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며 반대해 왕이 맹사성의 뜻에 따랐다. 1432년 좌의정에 오르고 1435년 나이가 많아서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으나, 나라에 중요한 정사(政事)가 있으면 반드시 그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그는 사람됨이 소탈하고 조용하며 엄하지 않아 벼슬이 낮은 사람 찾아와도 반드시 공복(公服)을 갖추고 밖에 나아가 맞아들여 윗자리에 앉히고, 돌아갈 때에도 역시 공손하게 배웅하여 손님이 말을 탄 뒤에야 들어왔다.

맹사성은 정승으로 있으면서도 집에 비가 샜다. 맹사성은 조선왕조 4대 세종대왕때 좌상(오늘날에 부총리에 해당)에 있을 때 가끔 임금의 허락을 받아서 충남 아산시 배방읍에 있는 자기의 고향집을 방문하곤했다. 맹사성은 그 어느해에 임금의 허락을 받아서 충남 아산시 배방읍에 있는 자기의 고향집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이 방문한다는 소식이 맹사성의 고향집 인근에 있는 고을 수령(읍장 면장 군수에 해당)들이 맹사성에게 잘 보이려고 맹사성의 고향집에 이르는 길을 잘 정비하고 청소를 잘해 두었다. 청소를 잘해 둔 뒤에 모습이 형편없는 사람이 지나가니 시골 수령들이 외모가 초라한 사람을 꾸짖었다. ‘여기는 우리의 좌상대감이 지나갈 자리인데 너같이 초라한 사람이 지나갈수 없다’고 꾸짖었다. 시골수령들이 아무리 기다려도 좌상대감인 맹사성이 지나가지 않으므로 알아보았더니 조금전에 외모가 초라한 사람이 맹사성인 것을 알게 되어서 수령이 도망가던중 관인(官印)을 못에 빠뜨려 그 못을 인침연(印沈淵)이라 했다는 숨은 이야기도 전해진다.

위의 숨은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사람의 인격이 고상한 것은 외모에 있지아니하다. 분에 넘치는 사치와 방종을 우리는 싫어한다. 평범한 옷이라도 잘 세탁하고 잘 다려서 입는 다면 우리는 만족한 생각을 가져야한다. 지금은 어려운 시기라고 한다.

오늘 우리는 일본을 주목해 보아야한다. 일본사람들의 물건파는 장소에 가보면 외국의 물건은 진열대 맨뒤에 진열하고 일본의 물건은 앞에 진열하여 일본물건을 먼저 사줄것을 고객들에게 요구하는 태도를 한국사람들은 본받아야한다. 힘들게 벌어들인 외화를 절약하기 위해서도 국산품을 애용하는 태도로 우리는 살아가야한다.

우리는 신라시대에 경주 남산밑에 살았든 백결선생을 알고있다. 백(百)은 백번을 의미하고 결(結)은 기워입는 것을 의미한다. 백결선생은 옷이 찢어지면 덧대어서 옷을 여러번 수리해 입었다.

명절이 돌아와서 이웃에서 떡을 해먹는 모습을 보고 백결선생의 부인이 슬퍼하는 모습을 바라본 백결선생은 대악(碓樂:방아타령)을 즉 떡방아 찧는 소리를 악기를 통해서 부인에게 들려주면서 슬픈 부인을 위로해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인간의 행복이 물질에만 있지를 아니하다. 우리는 소속구성원들끼리 상호간에 서로 정신적으로 위로하고 협조하는 곳에 한국사회의 발전이 있다.

생산공장들이 있는 장소옆에 와서 남녀들이 어울려 만취가 되어서 서로 얼싸안고 난무(亂舞)하는 모습을 우리는 가끔 볼 때가 있다. 열심히 땀흘려 일하는 사원들옆에 와서 자기것을 가지고 자기마음데로 마음껏 마시고 고성방가하는 일부사람들의 모습이 정말로 우리민족의 화합(和合)에 도움이 될까요? 기쁠때 같이 웃고 슬플때 같이 우는 분위기에 한국민족의 발전의 밝은 빛은 밝아올것이다. 분위기에 어울리는 행동이 우리에게 발전을 가져다 주는 기회가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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