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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교에 담긴 단상

2011.09.01(목) 홍경석(casj007@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찾은 근사한 시설의 천안역사는 여전히 수많은 승객들을 연신 실어 나르고 있었다. 그러나 과거엔 천안역도 그리 크진 않았다. 당시 천안역사의 바로 앞엔 커다란 능수버들이 있었는데 그건 또 다른 천안의 상징물이었다.

천안의 상징으론 이 외에도 천안삼거리와 호두과자, 그리고 유관순과 병천순대 등이 그 뒤를 잇는다. 아무튼 당시에 나는 소년가장이 되어 천안역 바로 앞의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행상을 하였는데 예나 지금이나 사통팔달의 관문인 천안역과 터미널은 많은 승객들로 붐볐다.

고단한 하루의 일과를 마친 뒤 어스름 겨울에 송이눈이 쌓일라 치면 귀갓길이 꽤나 험난했다. 천안역에서 온양나드리 쪽으로 내려오다가 중간에 위치한 육교를 넘으면 바로 커다란 규모의 충남방적과 만나게 되었다.

당신의 집이 봉명동이었기에 나 역시 이 육교를 건너야만 비로소 집에 갈 수 있었다. 헌데 육교의 특성이 쇠로 만들어진 까닭으로 자칫하면 미끄러지기 십상인 까닭에 낙상하는 어르신들도 속출했다.

그랬으되 땅거미가 져서 어두운 겨울이 되면 다들 그렇게 가족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갈 요량에 발걸음이 크게 분주했다. 하지만 나에겐 살갑게 맞아줄 어머니가 없었음에 늘 그렇게 발걸음은 천근 이상으로 무겁곤 했다.

어쨌거나 세월은 여류하여 나도 가장이 되고 두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그러나 십여 년 전 장사를 하다가 그만 쫄딱 망했다. 그래서 장마철에 장화 없음 못 사는 달동네로 이사를 했다. 당시 아이들은 고교와 중학생이었는데 그렇지만 알거지가 된 나의 초라한 입장과 현실에서 남들처럼 학원을 보내는 따위의 사교육은 언감생심이었다.

그리하여 고심 끝에 찾아낸 어떤 ‘밝은 샛길’이 바로 돈 안 들어가는 도서관을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마침 집 근처에 소규모 도서관이 들어서 반갑기 그지없었다. 주말과 휴일이면 아이들 손을 잡고 육교를 넘어 그 도서관을 퍽이나 애용했다.

도서관에선 하루 종일 죽치며 책을 봐도 누구 하나 시비 거는 이가 없어 참 좋았다! 여하튼 그처럼 도서관을 애용한 덕분으로 아들과 딸은 소위 이름난 대학을 나올 수 있었고, 나 또한 작가로 등단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고로 육교에 대한 고마움을 크게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오늘 아침부터 집 근처의 육교가 일꾼들에 의해 본격적인 해체 작업에 들어가고 있었다.

그 시절 육교는 때론 나에게 극심한 배고픔과 가족 부재의 뜨거운 눈물을 뿌리게도 했다. 하지만 지금의 육교는 아이들을 튼실하게 키우는데 따른 어떤 원군(援軍)이기도 했기에 아쉬움이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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