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통합검색 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화면컨트롤메뉴
인쇄하기

전체기사

전체기사

충남넷 미디어 > 소통 > 전체기사

안락사, 어떻게 볼 것인가

2012.01.12(목) 김진환(wlsghks7001@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서서히 고령화시대로 들어가고 있다. 우리나라 남성의 평균수명은 76세 , 여성의 평균수명은 83세 정도이다. 이는 노인인구의 문제가 우리 코앞에 닥쳤다는 말이다. 죽음은 누구나 피하고 싶다. 하지만 우리네 삶이 나고 성장하고 돌아가는 과정속에 있고, 자연을 포함한 누구나 생장소병몰의 프로그램안에 있으니 그리 서글픈 일도 아니다.

냉정한 눈으로 보면 우리네 삶은 죽기위해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지막이 다 싸늘한 주검으로 조용히 눕게된다. 이웃에게 그리 모질게 할 것도, 살이 타도록 삶에 천착할 이유도 알고 보면 별로 없다. 그저 성실하고 책임감있게 살되 잘못되더라도 담담한 생각을 가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다 마지막은 공평한 일이 아닌가.

자기 분노에 못이겨 주먹을 휘두르고, 갖은 욕심을 다 부리고, 자리 영욕을 위해 눈을 부라리는 사람들을 보면 그는 죽지 않을 사람으로 보여 차라리 불쌍하게 느껴진다. 요즈음 추락하는 정치인들을 보면 이런 생각이 더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브레이크가 고장난 채 고속으로 달리는 두발 자전거를 보는 듯하다.

우리 이제 한번쯤 죽음을 위한 죽음이 아니라 아름답고 행복한 죽음을 선택하기 위해서 지금 나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를 스스로 채근하고 고민도 해보고, 마음맞는 이들과 함께 담론을 주고 받는 일도 필요하지 않을까.

안락사는 편안한 죽음을 의미한다. 죽음자체가 그리 반가운 것은 아니지만 엄연히 우리네 인생의 한 무대이고 장면이다. 그것은 피할수 없다.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이에 대해 우리가 디자인을 멋지게 할 필요가 있다. 죽음에 무슨 다자인이 있냐고 반문할 지는 모르지만 아름답고 행복한 죽음을 선택한다고 마음먹으면 아름답고 행복한 결혼식을 준비하는 것처럼 설레이는 일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태어날 때는 무슨 영문인지도 몰랐다. 눈을 뜨고도 그곳이 어딘 지 몰랐고 누가 무엇을 먹여 주어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몰랐다. 그렇게 와서 그렇게 가길래 어른들은 삶이 참 덧없다고 말씀하신것 같다. 하지만 더없는 육신의 중량만큼 우리의 찬란한 영혼은 그 빛을 더하는 일이 우리의 정신속에 일어나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차려야 한다.  차는 운전수가 몰듯이 우리네 삶은 우리의 영혼과 정신이 운전하기 때문이다.우리 안에는 거룩하고 고귀한 신성이 존재한다. 인성, 즉 인간성은 수성(짐승의 성질)과 신성사이에서 왔다갔다한다. 사람을 반신반수라 하지 않았는가.

육신의 반복을 윤회라 불렀는가 보다. 우리는 무슨 일이 잘 안되면 될때까지 반복을 하기도 한다. 그렇게 자꾸 하다가 마침내 이루어지면 쾌재를 부르듯 우리의 정신과 영혼도 완성이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 부모님의 육신을 타고 이 지구에 오고가고 하는 일이지 싶다.  

완성이 될 때까지 우리의 육신은 반복차원에서 안락사는 개념이 다루어져야 한다. 가정적 입장, 사회적 환경, 국가적 안목도 중요하지만 어디까지나 안락사는 죽음 직전의 한 존귀한 인격체의 선택사항이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안락사는 극심한 통증을 지속적으로 이어가는 특별한 경우에 있는 환자를 위한 산자의 배려로 인식되어야 하고 이것은 당장 공론화되어야 한다. 맹독을 해독하는 약이 있듯이 안락사 제도가 필요한 곳도, 필요한 사람도 반드시 있다.

죽음에 대한 심도있는 담론을 주고 받는 일은 우리가 더욱 성숙한 시민사회로 나아가는 촉매제이다. 누구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을 원하듯이 죽음 또한 그리여기고 그리 진행되도록 서로 도와야 한다. 과거에는 우리 선조들의 삶이 그러하였다. 흔히들 알고있는 고래장(고려장)은 부모님을 내다 버리는 일로 알고 있으나 실은 우리 고유의 천화사상을 토대로 한 소박한 장례행위였고, 생의 마지막 수련방법이었다.

일생의 할 일을 다 한 부모님은 자식들에게 남길 유언을 하고 산자수명한 곳으로 자식의 도움을 받아 들어간다. 작은 움막을 짓고 단식을 하여가는 동안 머리는 한 없이 맑아지고 그 동안 육신을 통한 영혼의 성장에 감사하며 허리를 반듯이 세운채 마지막 정리 수련을 하는 것이다. 

"하늘이시여, 지상에서 많은 영혼들과 함께 희망을 나누었으며 보람찬 여정을 이제 마치려 하니 지금까지 돌보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제 저를 받아 주시여 찬란한 빛의 세계로 가고자 하오니 받아 주십시오" 그러한 간절한 염원과 함께 정신은 본래 자리로 돌아가게 하고 육신은 미련없이 흙으로 되돌린 것이 바로 우리의 전통 고래장이고 과거 안락사의 한 모습이다.

안락사는 눈부신 경제적 성장아래에서 우리들의 형편이 나아져서 들어온 용어이다. 이 말이 외국에서만 나도는 말이 아니라 이제 우리의 입에 회자되고 공론화되어 반드시 필요한 이들에게는 선한 모습으로 도움을 주는 제도로 자리를 잡았으면 한다.

제4유형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4유형:출처표시+상업적 이용금지+변경금지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댓글 작성 폼

댓글작성

충남넷 카카오톡 네이버

* 충청남도 홈페이지 또는 SNS사이트에 로그인 후 작성이 가능합니다.

불건전 댓글에 대해서 사전통보없이 관리자에 의해 삭제될 수 있습니다.